알브레히트 연대기와 불꽃의 기사를 잇는 세 번째 이야기.
그래도 동시대의 인물들이 등장했던 두 전작에 비해 이번 이야기는 수백년을 훌쩍 뛰어넘어 시작된다.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그 죄업을 갚기 위해 또 다른 살업을 저질러야하는 십자군 기사(크루세이더) 게르하르트의 모험 이야기.
하지만 단순히 모험이라는 단어가 주는 즐겁고 신나는 느낌과는 거리가 먼 고행길이다.
알브레히트처럼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며 적들을 참살하는 건 비슷하지만 이미 인생 밑바닥을 경험한 탓인지 꽤나 염세적이고 허무주의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다만 역대 주인공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던 기사로서의 명예에 대한 자부심은 공유하는 듯. 종자를 받아들이며 하는 말이 그의 기사도를 잘 보여준다.
"잘 들어라. 기사는 목숨보다 명예와 자존심을 우선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동네 깡패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남의 것은 함부로 뺏지 말며, 거짓을 멀리하고 항상 정직해야 한다. 명예란 곧 용기를 증명하는 걸 뜻한다. 남이 날 모욕한다면 목숨을 걸고 명예를 지켜라. 상대가 얼마나 강적이든 상관없다. 두려움 앞에서 물러서지 마라. 그것이 용기를 증명하는 것이다. 네가 비록 패배하여 죽는다 해도, 굴복하지 않았으니 명예롭게 죽는 것이다. 자존심과 명예. 실력을 쌓는 건 그 다음이다. 알았느냐?"
하지만 이상주의에 물든 꿈꾸는 기사의 모험담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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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인 야코프를 죽인 자가 누군가?"
그제야 게르하르트가 발산하는 기세에서 심상찮음을 느낀 베일리가 표정을 굳혔다.
"내가 죽였다면?"
베일리의 말에 게르하르트는 냅다 도끼를 뽑아 옆에 있는 화물을 내려찍었다.
쾅!
"다음번 말장난엔 네 목이 떨어질 것이다."
베일리의 눈빛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 여자의 몸으로 범죄조직의 수장까지 오른 인물이라 그런지, 그녀도 나름 강단이 있는 듯했다.
"이런 쓰레기같은 바닥에도 나름 불문율같은 게 있어서 말이지. 얘들아, 연장 챙겨라"
도둑들은 그녀가 말하기 전에 이미, 게르하르트가 도끼로 상자를 내려칠 때부터 무기를 뽑아 들고 있었다. 수는 대략 30여 명.
(중략)
마법사들을 처리한 게르하르트는 도끼를 뽑아 들고서 베일리에게 다가갔다. 온 얼굴에 피 칠갑을 하고서 살기가 번들거리는 푸른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그저 멍한 얼굴로 게르하르트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더 멋진데? 이런 건 한번도 본 적 없어."
"감정인 야코프를 죽인 자가 누군가?"
"나랑 한 번 자주면 말해줄지도."
퍽!
다음번 말장난엔 목이 떨어질 것이라 분명히 경고했고, 게르하르트는 그 말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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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소설에서였다면 대화가 좀 이어지고 동료나 부하로 받아들이겠구나 싶은 장면에서도, 여지 없이 죽여 넘기며 퇴장시켜버린다.
순진해 빠진듯한 기사의 이상과, 거침없이 칼과 도끼를 휘두르는 잔인한 폭력이 버무려지며 진짜로 기사다운 기사의 모습이 이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주인공 캐릭터가 알브레히트와 굉장히 많이 겹치는 듯 한데, 나중에 어떻게 이어지고 또 어떻게 차별화를 둘지 기대가 되는 부분.
무엇보다도 먼치킨 레벨의 무력으로 적을 쓸어버리는데도 유치하다기보다는 꽤나 박진감 넘치고, 그러면서도 전투력으로는 무적인 주인공이 다른 부분에서 인간적인 고뇌와 한계를 보여주는 게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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