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시장이 태동한 이후부터 급속하게 팽창하고 있는 오늘날에 이르도록 ‘웹소설’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찬탄이 아닌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대본소 시대 무협이 소설 취급도 받지 못하고 ‘무협지’로 불리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어쩔 수 없는 서브컬쳐의 숙명이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웹소설을 향하는 비판의 화살표들이 전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 주된 비판은 소재와 형식의 지나친 획일화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대여점 시절에 유행했던 ‘양판’, 양산형 판타지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장르 내의 모방은 항상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웹연재과 편당결제 시스템으로의 변화가 독자가 요구하는 글의 호흡을 격변시켜 획일화를 가속시켰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변화 끝에 소위 ‘사이다 사이클’에 맞지 않은 많은 소재와 서브 장르들이 도태되었습니다. 정판, 고전 무협, 어반 판타지 같은 단어들이 지겨움보다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은 이렇게 흘러간 메타가 되어버린 옛날 판타지의 분위기를 가져와서는 최신 웹소설 문법을 세련되게 적용해서 어레인지한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악마들과 손을 잡고 세상을 멸망시킨 대흑마법사였지만 죽기 직전 모종의 이유로 선신과 계약을 맺고, 그 대가로 70년전으로 돌아와서 이제는 세상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회의 이단심문관이 됩니다. 이단심문관으로 기름부음 받은 실전압축근육의 힘과 전생의 최고위 흑마법사의 지식으로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지옥과 그 하수인들을 때려잡으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의 매력은 첫번째로 이 배경 설정입니다. 선신들은 이미 힘을 잃었고 전세계에서 악마와 추종자들이 들끓는 암울한 세계관을 작가는 유치하지 않고 또 너무 답답하지 않게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도시의 지하도에서 인신매매로 구입한 노예들을 공양해서 악마를 소환하려는 이교도들. 밤마다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라이칸슬로프. 인조 역병을 창조해서 도시를 통째로 제물로 바치려 하는 흑마법사. 이들의 뒤를 쫒아 어두운 뒷골목을 뒤지고 다니는 괴물사냥꾼... 디아블로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색채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두운 분위기는 사실 웹소설에는 잘 맞지 않아 버려진 것들 중 하나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암울하게 흐르면 독자들에게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주게 되고, 반대로 스트레스 없는 이야기를 전개하면 세계관의 분위기가 망가지기 마련이니까요. 작가는 이런 문제를 주인공 캐릭터로 극복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페르난데스에게는 세상을 구해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지만, 선악의 이분법에 갖힌 얼간이나 정의감 넘치는 고구마 영웅 스타일은 전혀 아닙니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거짓말도 하고 악당의 방법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죠. 웹소설 문법에 비추어 봐도 전혀 어긋나지 않는 주인공입니다.
이처럼 무겁고 암울한 세계관에 시원시원한 주인공 캐릭터를 풀어놓는 것은 젊었던 시절 홍정훈 작가의 소설을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 분들 평을 들어봐도 이 의견에 동의하는 분들이 꽤 있더군요. 이처럼 상충되는 두 요소를 어느 한 쪽이 잡아먹히지 않게 살리려면 작가의 절묘한 밸런스 조절이 필요한데 아직까지는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분명히 세계관의 상황은 암울합니다. 이단심문관 악마사냥꾼들은 한 명이 새로 임관하는 동안 열 명이 죽어나나고, 강대한 왕국의 지하에서 사교도들이 나라를 장악해나가며 엘프족의 대함대는 뱀파이어 귀족들의 음모에 박살나기 직전이고... 주인공은 강한 힘을 지녔지만 대신 마법의 힘을 잃었고 혼자서 이들을 다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전생에 대악당이었고 그런만큼 누구보다 악당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죠. 악마추종자들의 음모의 사슬을 하나씩 끊고, 장래 인류의 영웅이 될 미래의 강자들을 하나씩 포섭하고, 마법적 보물과 유산들이 악용되기 전에 하나씩 선점해나가는 것이 이야기의 주된 얼개입니다.
칭찬을 늘어놓았으니 단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초반부에 베이타서스와 계약, 그리고 성흔을 받아 깨어나는 파트에 진입장벽이 좀 있습니다. 설정 설명이 지루하거든요. 이 뒤로는 그렇게 턱턱 막히는 부분이 없으니 5-6화가 텁텁하다 싶으신 분들은 거기만 잘 참고 넘겨보시길...
두번째로 현재 메인히로인적 위치면서 사이트킥이라 할 수 있는 키르하스의 캐릭터가 애매합니다. 리메이크 전보다는 심리묘사가 추가되긴 했지만 등장하자마자 주인공에게 감화되어서 따르게 되는 시퀀스가 깔끔하게 납득되지는 않았습니다. 작가가 히로인을 묘사하는 실력은 다른 남캐나 악당들에 비해 썩 뛰어나지는 않은 것 같더군요. 설정 상 최소 4명의 히로인이 조력자 포지션으로 합류할텐데 이후로는 나아지는 모습을 기대하겠습니다.
이 소설은 원래 20몇화정도가 연재되다가 공모전 참가를 위해 리메이크된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 추천글에는 지금은 연재되지 않은 분량의 이야기가 약간 섞여 있습니다. 감안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리메이크 전후로 주인공 컨셉이 좀 바뀌었는데 (근돼에서 실전압축근육으로) 글 자체가 훨씬 나아진 것 같습니다. 보던 사료가 갑자기 공급중단되었을 땐 화가 좀 나기도 했었지만... 리메이크라서 하루 2화씩 빠르게 올라오는 것도 좋네요.
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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