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에서 판타지중세월드로 환생한 주인공은 나름대로 재능도 있고 어느정도 성공도 하지만, 전생의 기억 때문에 즐거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허무감에 시달리다가, 신에게 전생의 기억에서 해방되게 해달라고 수시로 빕니다. 신이 실존하는 세계인지라 신은 그 민원을 수리해주죠. 대신 악성민원의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신과 한 계약을 완수하기 위해 더러운 고행길을 10여년이나 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주인공이 대가를 다 치르고 보니 정작 소원 들어줘야할 신은 사교도의 준동으로 신앙을 잃어 소원을 들어줄 힘이 모자랐죠. 그 사이 세상은 개판 났고 인생도 고행으로 꼻아박았으니 뭐 살 맛도 없고 다 끝난 판입니다. 이때 완전히 힘이 다한 줄 알았던 신이 주인공이 쌓아올린 대가에 판돈을 더 올려 그를 과거로 보내는 도박을 합니다. 과거에서 주인공은 미래에 있을 사교도의 준동을 막기 위해 벌써 물밑에서 번지고 있는 이단들을 잡는 이단심문관이 되고자 수도회에 입문합니다.
작품소개와 프롤로그가 비장해보이긴 하지만 본문 전개는 그렇게까지 무겁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적들의 피와 살이 튀는건 어쩔 수 없지만 이단은 쳐죽인다가 이런 장르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주인공의 전생이 현대인인 덕분인지 드립도 과하지않게 치고 재치가 있어요. 용병으로 암살자로 험하게 구른 덕에 경험과 능력은 있는데, 험한 과거에도 분위기가 심각해지지않도록 얼굴 뻔뻔하고 넉살도 좋습니다. 글이 무겁지 않고 명쾌하게 흘러간다는건 읽을 때 몰입하기 편합니다.
주인공 외의 조력자들도 선역이라고 무작정 착하기만 한 인물들이 아니라 자기 성향과 고집이 있지만 그럼에도 종교인이고 인간적인 선량함을 갖추고있는 입체적인 인물들이 많습니다. 그림같이 우직한 수도자 형제님도 한명 있지만 종교물이면 신심 투철한 분도 있어야죠.
이단심문관 계열의 작품들은 비장하게 악마와 싸우는 스타일도 좋지만 이렇게 수사물? 첩보물? 느낌으로 위장하고 있는 이단들을 조사 색출해가는 것도 재밌는 것 같아요. 제 짧은 식견에는 작가님이 수사과정(?)을 다채롭고 설득력 있게 잘 쓰시면서도 판타지다운 비약으로 속도감을 한번씩 줘서 질리지 않게 완급조절 잘해주십니다. 중세판타지, 추리, 전투 잘 섞인 활극 느낌이라 추천 드립니다. 편수가 꽤 쌓였는데 댓글이 적은 것 같아 아쉬운 마음에 써보았습니다.
+덧. 작가님이 중간설정을 고치는 중이라 개연성 중시하는 분들은 좀 더 있다가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아직 수정이 덜 됐는지 초반부 살짝 위화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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