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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제

설명



wolf the rain

작성자
익명
작성
10.03.20 15:27
조회
1,170

소복이 내려앉은 눈밭 위로 작은 발자국 하나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헉헉 거리며 뛰어가는 여자의 숨소리. 알래스카의 차가운 공기 때문에 땀이 흐를 것 같지 않은 아침이었지만, 그녀가 뛰어간 자리에는 진한 땀 냄새가 배어있었다.

-띠리리리.

짧게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그녀는 달리던 것을 멈추고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 조슈.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엘르, 알래스카에 가더니 달리기 선수라도 되려고 그래?

조슈의 농담에 엘르는 하이톤으로 소리 내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몰라서 그래. 알래스카의 아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런 날 아침에 가만히 집에 있는 건 날씨에 대한 모독이라구!”

-난 추운 건 딱 질색이야.

“나도 추운 건 별로야. 근데 여기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니까? 이런 건 직접 봐야 해. 참! 놀러 온다고 하지 않았어? 어서 와. 그래야 내가 왜 아침마다 조깅을 빼먹지 않고 하는지 알게 된다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번 학기 끝나면 알래스카에 한 번 갈까 하고 있어.

뜻밖의 말에 엘르는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귀에 바짝 가져갔다.

“정말? 정말이야, 조슈?”

-그렇다니까? 아빠도 이미 허락하셨어. 물론, 두 달이나 더 기다려야 하는 일이긴 하지만……. 미리 말 해주고 싶었어.

주저하는 조슈의 말에 엘르는 그가 차마 내뱉지 못하는 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배시시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알아. 빨리 봤으면 좋겠다.”

그리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엘르가 말했다.

-나도……어서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며 엘르는 한껏 좋아진 기분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뽀드득하는 그녀의 발소리에 맞춰 다시 시작된 발자국들이 선명하게 눈 위에 찍혔다. 그리고 정확히 그녀의 발자국 위를 짚고 선 그림자가 멀어지는 그녀의 땀 냄새를 쫓기 시작했다.

한 달 후,

알래스카로 향하는 작은 경비행기 안에서 조슈는 어두운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요즘은 알래스카로 들어가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없어서 손님이 드문드문 했는데, 요 며칠 사이 갑자기 알래스카 행이 많아져서 나름 짭짤하다니까?”

경비행기 운전사가 옆에 앉은 남자에게 누런 이를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남자는 아무런 대꾸 없이 보조 핸들을 잡고 그의 움직임에 맞춰 조종간을 잡아당겼다.

“하긴, 외지에서 오기만 하면 하나 둘 죽어나가는데 누가 오려고 해? 현상금 사냥꾼이나 좀 드나들면 모를까.”

두 사람의 대화를 (경비행기 운전사 혼자서만 얘기를 하고 있긴 했지만) 묵묵히 듣고 있던 조슈는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손등을 들어 닦았다.

“근데 넌 어디까지 간다고 했지?”

거의 다다른 경비행장을 보며 운전사가 물었다.

“치그니크 마을이요.”

“아-. 치그니크! 사냥꾼들도 그쪽으로 간다고 하던데, 운이 좋으면 마을로 들어가는 사람들 차를 얻어 타고 갈 수도 있겠구나?”

선심 쓰듯 말하는 남자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보인 조슈는 그의 누런 이를 보지 않기 위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운전사는 익숙한 듯 경비행장을 한 바퀴 돌아 속도를 늦추더니 덜컹거리는 실력을 마음껏 자랑하며 가까스로 착륙했다.

“고맙습니다.”

요란한 착륙 덕분에 속이 울렁거렸던 조슈가 서둘러 경비행기를 빠져나와 차가운 알래스카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눈이 쏟아지려는지 꾸물거리며 몰려드는 먹구름을 보며 얼른 마을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차를 찾았다. 하지만, 어중간한 시간 때문인지 지나다니는 차는 고사하고 사람들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런…….”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걸어가기에는 약간의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는 것을 지도를 통해 익혀두었던 조슈는 하는 수 없이 품에서 메모지를 꺼내 거기에 적힌 낯선 번호를 확인하고 데스크로 향했다.

“이봐.”

막 데스크 쪽으로 발을 옮긴 조슈의 뒤로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이곳에서 아는 척을 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놀란 눈으로 돌아본 조슈는 이내 그 남자가 보조 운전석에 앉아 있던 말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경계를 풀었다.

“치그니크에는 왜 가는데?”

“아……. 그냥…….”

그동안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엘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애써 그녀를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버린 조슈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따라 와.”

“……네?”

휙 돌아서 버린 남자는 조슈의 말을 기다릴 생각이 없는 듯 멀리 보이는 빨간 트럭을 향해 걸어갔다.

‘대체 뭐지?’

그를 따라 나서야 할지 아니면 무시하는 게 좋을지 선뜻 결정하지 못한 조슈는 요즘 흉흉한 알래스카 소문 때문에 아무나 따라나서는 것은 모험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결국, 데스크가 있는 건물로 향했다.

딸랑 거리는 소리에 20대 후반의 여자가 사무적인 눈길로 조슈를 바라보더니 이내 방긋 웃어보였다. 잘생기진 않았지만, 누구나 호감을 가질 만한 조슈의 외모에 여자는 나이도 망각한 채 유혹적인 몸짓으로 데스크에 가슴을 기대며 말했다.

“무슨 일이니?”

조슈는 커다란 그녀의 가슴이 거북한 듯 애써 고개를 돌려 시선이 돌아가지 않도록 주먹을 움켜쥐며 대답했다.

“전화를 좀 쓸 수 있을까요?”

“전화? 얼마든지.”

여자는 자신의 자리에 있는 까만 전화를 들어 데스크 위에 올려놓았다. 물론, 자신의 가슴 근처에 바짝 당긴 채 말이다.

“하,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전화기 옆으로 다가간 조슈는 메모지에 적힌 번호를 꼭꼭 누르며 신호가 울리기를 기다렸다. 그 와중에도 여자는 깊게 파인 가슴골을 그대로 보이고는 조슈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메모지를 힐끔 쳐다봤다.

“응? 앨버트 번호네?”

아까부터 신호만 울릴 뿐 대답 없는 앨버트 대신 그녀가 환한 얼굴로 아는 채를 했다.

“앨버트……를 알아요?”

“이 동네에서 앨버트를 모르면 간첩일 걸? 한 달 전에 딸이 죽고 나서 진범을 잡아야 한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니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근데, 앨버트는 어떻게 아는 거니? 넌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녀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가 죽었다는 말이 흘러나오자 조슈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죽었는데 어쩜 저렇게 태연하게 말을 할 수 있는지, 조슈의 눈에는 그녀 역시 살인자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지금 이 시간엔 집에 없을 거야. 해가 저물어야 집에 들어가니까.”

받지도 않는 전화를 들고 있는 조슈가 안 되 보였는지 그녀가 선심 쓰듯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끊으려던 참이라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수화기를 내려놨다. 이대로라면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동승하거나, 혹은 앨버트가 집에 와서 전화를 받을 때 까지 시간을 때워야 했다. 하지만, 자신을 묘하게 바라보는 이 여자가 더 없이 부담스러워 차마 그곳에 더 있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온 조슈는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으니 충분히 걸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도로 쪽으로 나왔다.

“어?”

휑한 도로 위에 빨간 트럭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설마하며 다가간 조슈는 낯익은 남자가 운전석에 있는 것을 보며 순간, 고마운 마음과 과도한 친절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로 차창을 두드렸다. 끼기긱하는 낡은 체인 소리와 함께 창문이 내려가며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저……태워 주시겠어요?”

조슈의 말에 남자가 피식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긍정으로 받아들인 조슈는 뒤로 돌아 옆 좌석 문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차가 한 발짝 정도 앞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실수를 한 것이리라 생각한 조슈는 다시 한 번 손을 뻗어 문을 잡으려 했지만, 이번에도 같은 식으로 남자가 차를 몰아갔다. 누가 봐도 자신을 놀리는 일이라는 것을 안 조슈가 미간을 찌푸리며 잽싸게 뛰어가 차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태워 줄 게 아니면 처음부터 말을……!”

“타.”

남자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빙판을 달리는데도 심하게 요동치는 트럭 때문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중심을 잡는 것도 힘든 판에 남자는 텀블러에 빨대를 꽂은 채 뭔가를 열심히 빨아 먹는 여유까지 보였다.

“마을엔 왜 가는데?”

한참만에야 남자가 텀블러를 한 손에 쥔 채 물었다. 먹을 만큼 다 먹은 것인지 아니면 조금 남겼는지 모르겠지만, 내려놓을 생각은 없는 듯 하얀 텀블러를 꼭 쥐고 있었다.

“…….”

의도적으로 말을 아끼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슈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자신의 입으로 그녀의 이름을 거론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랄까?

“으흠……그렇군.”

뭘 그렇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남자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듯 핸들을 붙든 채 운전에 집중했다.

자신이 살던 곳과는 확연히 다른 알래스카의 풍경에 조슈는 몸서리를 쳤다. 원래 추운 것을 즐기지도 않는데다가 눈이라는 것 역시 그에게 좋은 기억을 안겨 준 적이 없었으니 온통 눈으로 덮인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겨우, 그녀를 보기 위해 결심을 했던 것인데 전혀 다른 의도로 찾게 되었으니…….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토하고 만 조슈는 고개를 돌렸다.

“레인.”

남자가 말했다.

‘비? 알래스카에도 비가 오나?’

조슈는 고개를 내 빼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끼고 있긴 했지만, 비가 온다기 보다는 눈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었다.

“넌?”

그제야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얘기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조슈가 서둘러 대답했다.

“조슈에요. 조슈 마를렌.”

“마를렌? 큭! 기집애 같네.”

그런 놀림을 자주 받긴 했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듣기엔 그리 달갑지 않았다. 기분이 표정에 그대로 묻어나는 조슈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미간을 찌푸리며 레인이라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는 그쪽 풀 네임은 뭐예요?”

나이를 가늠하기는 힘들었지만, 저쪽이 먼저 말을 낮추는 걸 보면 자신보다 연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높여 물었다.

“그냥 레인이야.”

“풀 네임이 레인이라……?”

“굳이 알 필요 없잖아.”

정말이지 건방지고 교양 없는 남자였다.

“아……네. 그러시군요.”

비꼬는 의도였는데 레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원래 무신경 한 건지 아니면 애초에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는 건지 알 길은 없었다.

“아……젠장!”

난데없이 레인이 들고 있던 텀블러를 조슈에게 던지듯 건네고 입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조슈가 얼어붙은 채 텀블러를 꼭 쥐고 레인을 돌아봤다. 텀블러 안에서는 무언가 찰랑이며 흔들리고 있었다. 아까 그는 음료를 다 먹은 게 아니라 적당히 먹고 남겼던 모양이었다.

“이런 똥개 새끼들!”

왼쪽을 돌아보며 레인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피해 달리듯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며 잔뜩 집중했다. 그가 보고 있는 왼쪽으로 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다는 것을 발견한 조슈는 그곳이 숲의 입구라는 사실을 상식으로 이해하고 왠지 모를 긴장감에 텀블러를 꼭 쥐었다.

“어이 어이! 붙들어!”

레인이 소리쳤다.

“네네네? 뭐, 뭐뭐뭘?”

꽉 움켜쥔 핸들이 뽑히진 않을까 염려되는 가운데 레인이 준비동작도 없이 가속 패달을 있는 힘껏 내리 밟았다.

“아아아아악!”

빙판길에서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트럭 덕분에 조슈는 뭔가를 붙들 틈도 없이 석상처럼 앞을 보며 소리를 질러댔다. 들고 있던 텀블러가 기둥이라도 되는 것 마냥 꼭 움켜 쥔 채……!

“웃기지 말라 그래!”

대체 레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혼자 뭔 쇼를 하는 건지 그리고 뭐가 그리도 짜증나고 다급한지 핸들을 돌리는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순간 차 아래로 뭔가 묵직한 것이 덜커덩거리며 지나갔다.

“어허어억! 바, 방금 그, 그게 뭐예요?”

발끝으로 전해지는 진동으로는 틀림없는 생물체였다. 커다란 덩치의 짐승?

“그거나 잘 들고 있어! 아, 씨발! 어디서 텨나와!”

텀블러를 눈으로 힐끔 가리킨 레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밖을 향해 욕을 내뱉고는 다시 핸들을 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차 앞 범퍼 쪽에서 ‘쿵’하는 울림과 함께 묵직한 진동이 울렸다.

“어어억! 뭐, 뭘 쳐, 쳤……!”

사색이 되어버린 조슈를 향해 레인이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자빠져서 죽는 소리 하지 말고 붙들라 했다!”

냉기 도는 목소리로 내뱉은 레인 때문에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아버린 조슈는 텀블러를 꼭 쥔 채 손을 더듬어 안전벨트를 찾았다.

“붙들어!”

다시 레인의 험악한 운전이 시작됐다.

“이런 개새끼들! 감히 누구한테!”

사색이 되어 있던 조슈는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온갖 욕설에 익숙해질 틈도 없이 자꾸만 차 밖에서 부딪히는 물체들 때문에 정신 줄을 서서히 놓아가고 있었다.

‘로드킬!’

만약 정말 로드킬이라면 몇 마리의 짐승을 치었는지 몰랐다. 레인이 가서 들이 박는 것인지 아니면 저들이 와서 몸을 날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딪힌 소리만 어림잡아 세어 봐도 열 손가락을 넘었다.

“이, 이봐요. 조, 좀 조, 조, 조심!”

“개새끼들 안 꺼져!”

가까스로 터져 나온 말이었지만, 그마저도 레인의 소리에 묻혀버렸다. 아찔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던 조슈는 그가 진정 미친것 아니면, 이 동네가 뭔가 미친 동네일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는지 밖에서 부딪혀 오는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난데없이 트럭이 요란한 브레이크 파열음을 내며 길게 밀려났다.

“으아아아악!”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눈을 가린 조슈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가 허우적거리는 바람에 들고 있던 텀블러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터, 텀블!”

놀란 조슈는 서둘러 고개를 들어 텀블러가 있던 허공을 바라봤지만, 빠른 속도로 뻗어 나온 새하얀 팔 하나가 반쯤 누워 있는 텀블러를 움켜쥐었다. 천천히 그 팔을 따라가자 핸들에서 손을 놓은 레인의 모습이 보였다. 차는 이미 정차했고, 레인이 끔찍이도 아끼는 텀블러도 무사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귀찮게 됐군.”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레인이 중얼거렸다. 대체 그가 왜 이러는 건지 조슈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밖의 무언가를 찾아내려 애써볼 뿐이었다.

“나 이거 참…….”

레인이 궁시렁거리더니 텀블러를 열어 홀짝이고 난 후 차 문을 열었다. 어딜 가느냐고 묻기도 전에 차에서 내린 레인은 조슈를 힐끔 보고 난 후 아무도 없는 앞을 향해 중얼거렸다.

“내가 먼저 시작한 거 아니라니까?”

“왜, 왜 그래요?”

“저건 뭐야?”

자신도 내려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던 조슈는 낯선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 그 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레인이 차에서 내릴 때 까지도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여자 목소리라니?

서둘러 고개를 돌린 조슈는 레인의 앞에 그의 반 토막 밖에 되지 않는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또 다시 놀라고 말았다.

“누구야?”

새하얀 볼이 씰룩거리며 붉은 입술이 들썩였다. 키는 작았지만, 말하는 폼이 나이가 어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먹어 봤자 고작 두세 살 위정도 되지 않을까 싶은 동안이었다.

“조, 조슈……라고 해……요?”

덕분에 말을 놓아야 할지 높여야 할지 선뜻 결정하지 못한 조슈가 어정쩡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여자는 조슈를 빠르게 훑어보더니 레인을 향해 날카롭게 눈을 날리며 중얼거렸다.

“적어도 조심은 해야지!”

“했어.”

심드렁한 표정의 레인이 대꾸하고는 텀블러를 기울였다. 텀블러 바닥이 하늘로 치솟는 걸 보면 안에 있는 음료를 이번에야말로 다 비운 듯 했다.

“어디까지 가는데?”

이번엔 조슈를 향해 물었다.

“치그니크 마을이……요?”

“하필 또 치그니크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여자의 중얼거림에 조슈는 레인의 눈치를 살폈다. 정말 텀블러를 싹 비웠는지 레인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들고 있던 텀블러도 운전석에 올려놓고 팔짱을 낀 채 여자의 결정을 기다리는 모습이 어딘가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훨씬 덩치 크고 나이 들어 보이는 레인이 한참 어려 보이는 여자의 결정을 기다린다니? 이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출이 되려면 적어도 연인이거나……?

“얘랑 사귈 바에야 똥개랑 자는 게 나을 거야.”

혼잣말이었을까? 난데없이 여자가 조슈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것도 마치 조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절묘한 타이밍에 말이다. 놀란 조슈가 얼른 고개를 들어 레인을 바라봤고, 레인은 관심 없는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여자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내 눈을 돌려 여자를 바라본 조슈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어, 어?”

“우선 같이 가.”

“걍 냅둬!”

레인이 귀찮은 표정으로 질색하며 여자를 향해 말했다.

“같이 가자니까?”

친절하게 웃고 있긴 했지만, 눈빛은 더 없이 싸늘했다. 그런 여자의 눈빛에 레인은 마지못해 자리에 앉으며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았다.

“안녕, 난 발티올라야. 친구들은 그냥 발렛이라 불러.”

여자 이름 치고는 꽤 강렬한 느낌이 든다는 생각을 하며 발렛이 내민 손을 잡은 조슈는 그녀의 따뜻한 체온에 긴장이 다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치그니크 마을까진 여기서 10분도 안 걸려. 미안하지만, 거기까지만 같이 가자, 조슈.”

발렛은 다정한 목소리로 조슈에게 양해를 구하며 고개를 돌렸다. 옆에 앉은 발렛은 생각보다 훨씬 작았고, 하얗기만 한 줄 알았던 얼굴은 양 볼이 발그레하니 귀엽기까지 했다.

‘아……뭐하는 거야. 엘르가 있는데…….’

서둘러 고개를 돌린 조슈는 찹찹해지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옆에 앉아 있던 발렛은 뭐가 그리 좋은지 키득거렸고, 운전하는 레인은 입을 삐죽거리며 치그니크 마을이라는 푯말을 힐끔 올려다봤다.

“아저씨!”

마을로 들어선 조슈는 반가움과 놀라움, 측은함이 뒤섞인 목소리로 앨버트를 불렀다. 때마침 현관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던 앨버트가 조슈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초췌해진 얼굴을 돌려 그를 맞았다.

“이런, 조슈!”

예상했듯 앨버트는 조슈를 보자마자 눈물을 보이며 들고 있던 엽총을 내던져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아저씨!”

안타까운 마음에 조슈는 자신보다도 훨씬 덩치가 컸던 앨버트의 어깨를 감싸 다독였다. 몇 달 사이 그의 어깨가 한 없이 작아졌다는 것을 느끼면서 말이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꾹꾹 눌러 참으며 앨버트를 위로하던 조슈는 마을에서 헤어지자고 하던 레인과 발렛이 트럭의 시동을 끄며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집으로 들어온 조슈는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엘르의 흔적을 쫓았다. 곧 만나게 될 거라며 뛸 듯이 기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당장이라도 2층에서 뛰어내려 올 것만 같았다.

“엘르.”

눈물이 핑 돌았다. 거실 구석에 있는 벽난로 위에는 엘르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담은 사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몇 번이나 보았던 사진들이었다. 어린 엘르와 소녀 엘르, 그리고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보았던 엘르의 모습과 알래스카로 이사 온 직후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까지……. 그녀의 거의 모든 것들이 그곳에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범인은 잡았어요?”

엘르의 사진을 보자 다시 분노가 치민 조슈가 눈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짐승이 한 짓이라고 그러더구나.”

“짐승?”

옆에 있던 레인이 콧등에 주름을 잔뜩 넣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 옆에 앉아 있던 발렛이 검지를 들어 그에게 주의를 주듯 ‘쉿’하는 흉내를 내보였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조슈가 앨버트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짐승이 아니라면서요?”

“아니지. 분명 아니야. 내가 아는 한 그건 짐승의 짓이 아니었어.”

“그럼 대체 뭐란 말이에요?”

“나도 그걸 알고 싶어. 조슈, 짐승이라면……사람의 머리를 떼어가서 뭘 하겠니?”

충격이었다.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머리를 떼어가다니? 대체, 누가? 아니! 그것보다도 엘르의 머리가……사라졌다는 말인가!

“설마!”

믿을 수 없다는 듯 조슈가 소리쳤다.

“그래. 엘르는 갈갈이 찢긴 채 몸만 덩그러니 남았어. 그런데도 그건 짐승의 짓이라는 구나.”

앨버트가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어린 조슈가 듣기에도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짐승이 내장을 비워버렸다면 대충 이해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머리를 떼어가서 어쩌겠다는 거지? 목걸이라도 만들겠다는 건가?

“찾아야 해! 엘르를 죽인 그 놈들을!”

그놈들이라는 말에 조슈는 뭐라 더 묻고 싶었지만,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앨버트를 보며 묵직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레인과 발렛을 힐끔 쳐다봤다. 그들도 지금 상황이 선뜻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는지 잠자코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친구들에게 미안하구나.”

한참만에야 앨버트가 레인과 발렛을 향해 미안한 듯 말했다. 딱히 친구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을 집에 끌어들였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조슈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레인과 발렛 역시 그런 조슈의 뜻과 함께하겠다는 듯 대꾸 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기 있는 동안은 이 방에서 지내도록 해. 여기 아가씨는……괜찮다면 딸 방에서 머물러도 좋으니까…….”

“하루만 신세지다 갈게요.”

주저하는 앨버트 대신 발렛이 몇 시간 만에 처음으로 상당히 예의바른 모습으로 그를 위로하며 걱정을 덜어주었다. 아직도 눈가가 빨간 앨버트는 피곤한 듯 방으로 들어갔고, 조슈와 레인은 한 방을 쓰게 되어 껄끄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여기까지야.”

발렛이 레인을 향해 말했다.

“손해 볼 건 없잖아.”

레인이 대답했다.

아무리 들어도 두 사람의 대화는 뭔가 중요한 주어가 빠진 것 같아서 듣기 거북했다.

“쓸데없는 일에 오지랖 부려봐야 득 될 거 없어. 거북해도 참아.”

발렛의 말이었다. 자연스럽게 미간이 일그러진 조슈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며 물었다.

“잠깐만요, 발렛! 어째서 내 생각에 대답을 하는 거죠?”

“뭐?”

“무슨 헛소리야?”

조슈의 말에 발렛과 레인은 진심으로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 둘 다 너무나 태연하게 같은 표정을 지으니 순간 얼굴이 달아오른 조슈가 뭐라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며 대화를 쫓지 못한 채 둘 사이에 끼어있었다.

“아무튼 레인. 적당히 해!”

“가는 길에 들른 것뿐이라고 했어!”

“넌 들른 거지만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러라고 하던가.”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올래?”

금방이라도 싸울 기세로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 때문에 사이에 끼어있던 조슈는 의도치 않게 둘을 중재해야 했다. 양팔을 벌려 서로를 멀찍이 떨어뜨려놓은 조슈는 쌀쌀하기만 한 레인보다는 그래도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발렛을 설득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생각에 그녀 곁에 바짝 붙어 서서 말했다.

“여긴 제 친구 집이에요. 그리고 위층에선 앨버트가 자고 있구요. 그러니까 여기서 이러지 말고, 미안하지만 오늘 하루만 좀 참아줘요.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앨버트 집에서는……엘르 집에서는 이러지 말아줘요.”

조슈의 진심어린 애원에 발렛은 표독하게 레인을 노려본 후 이내 누그러진 표정으로 조슈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일이면 우리도 떠나야 하니까. 걱정 마. 그럼 난 자러 가야겠어.”

레인에게 경고하듯 가겠다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한 발렛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엘르의 방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방문이 열리고 닫히며 그녀의 체취가 가득 담긴 방안의 향기가 아래층까지 내려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추억을 자극하는 그 향기에 조슈의 가슴이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이틀 뒤면……정말 엘르를 보내야 해.’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녀의 장래식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진범이 누구이냐를 가리는 일도 중요했지만, 죽은 엘르를 편하게 해 주는 것도 산 사람이 할 일이라 생각했다. 그 때문에 이 마을의 보안관이 직접 조슈에게 연락을 했다. 엘르의 죽음으로 충격에 빠져있던 그에게 앨버트 때문에 장래식이 아직 치러지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그래서 학기말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홀로 알래스카까지 온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으로 넋을 놓아버린 앨버트를 보니 차마 앨르를 쉽게 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머리가……잘려?’

실제로 짐승이 살아있는 먹이를 뜯는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긴 했다. 머리를 먹는 짐승은 본 적도 없거니와 흘러가는 소문으로도 들은 적도 없었다. 뜯어 먹는다 치더라도 살이 오른 부분이나 혹은 머리통을 으깨어 뇌를 빼먹었으면 모를까. 왜 통째로 머리를 가져간 것일까?

‘아니, 아니 생각하지 말자. 엘르……엘르만 생각 해.’

손님방으로 들어 간 조슈는 이불을 뒤집어쓰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이 들려고 하면 할수록 환하게 웃는 엘르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알래스카로 오기 전까지만 해도 애써 지우고 있던 엘르였는데, 이곳에는 엘르의 숨결이 체취가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조슈는 자신도 모르게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때문에 숨죽여 흐느꼈다.

문밖에서 그런 조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레인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거실 너머의 창을 응시했다. 창 밖에는 어느새 눈이 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다.

조슈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레인과 발렛이 사라지고 난 후였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바 아니었지만, 앨버트 역시 그런 일에 익숙하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다만, 아침식사라며 내 놓은 에그스크럼블을 뒤적이며,

“친절하다고 해서 모르는 사람은 가까이 해선 안 돼.”

라는 말과 함께,

“하긴, 처음부터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모두가 모르던 사람이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서로 친해지는 것 아니겠니?”

라는 자조 섞인 말을 중얼거렸다.

“앨버트. 내일을 위해서 오늘은 푹 쉬는 게 어때요? 엘르가……슬퍼할 것 같아요.”

해만 뜨면 숲으로 간다던 데스크 안내원의 말을 떠올리며 조슈가 조심히 물었다. 엘르를 잃었다는 슬픔보다도 그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숲을 헤매고 다녀서 훨씬 더 안쓰러운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 그에게는 약간의 휴식이 필요했고, 딸을 보내기 전 자신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조슈의 뜻을 이해했는지 앨버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적이다 만 스크럼블을 그대로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드시지 않구요?”

“아니 됐다. 피곤하구나. 밖에 나가게 되면 혹시 모르니 내 총을 가져가라. 보안관이 허가증을 물으면 내 이름을 대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한 채 2층으로 올라간 앨버트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은 조슈는 현관 옆에 세워진 엽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긴 했지만, 알래스카에서 허용되는 허가증은 없었다. 하지만,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 조슈마저 안 좋은 일을 당하게 될까봐 걱정한 앨버트를 위해서라도 총을 들고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곰이나 늑대를 만나게 되면 최소한의 방어는 해야겠기에.

집을 나와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긴 조슈는 이 길 위를 매일 아침 엘르가 달렸다는 것을 생각하니 한 달 전 그녀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나도 추운 건 별로야. 근데 여기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니까? 이런 건 직접 봐야 해.’

“……엘르, 아무리 그래도 알래스카는 추워.”

옷깃을 여미며 산책로를 따라 걸어 올라간 조슈는 커다란 나무가 굽어 있는 곳에서 멈칫 멈춰 섰다.

하얀 자작나무 사이에 뱅크스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무를 구경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그 앞에서 조슈가 걸음을 멈춘 이유는 그곳을 서성이는 레인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낯익은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내심 기쁘면서도 그에게 아는 척을 하는 게 썩 달갑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르는 척 하고 지나치기엔 그가 베푼 호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레인이 숲으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생각에 멀찍이 떨어진 채 조용히 그를 주시했다.

소나무 주위를 서성이던 레인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숲에서 발렛이 걸어 나왔다.

“역시 둘이 사귀는 거였나?”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티격태격 하면서도 붙어 다니는 걸 보면 평범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리려던 조슈의 눈에 낯선 것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은 조슈가 얼른 고개를 돌려 자신이 본 것을 확인했다. 착각한 것이었나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착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숲에서 나온 발렛의 손에 피범벅이 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똑똑히 확인했으니 말이다.

‘짐승의 짓이 아니야! 찾아야 해! 엘르를 죽인 그 놈들을!’

앨버트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분명, 그놈‘들’이라는 말을 했다. 한 명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이내 조슈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어쩌면 바로 코앞에 엘르를 죽인 자들을 두고 그대로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엘르를 죽인 자들이 자신과 앨버트까지 없애려고 접근했던 것이다!

하지만, 왜? 그들이 무슨 이유로 자신과 앨버트를 죽여야 한다는 거지? 하지만, 두 사람은 말도 없이 그대로 집을 나가지 않았던가?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긴 여행으로 피로해진 탓에 머리가 이상해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봐도, 발렛의 손에는 분명 빨간 무언가가 축 늘어진 채 들려있었다. 사람의 머리는 아니었지만, 피를 흘리고 있는 생명체임은 분명했다.

현기증이 일어나고 구토가 쏠렸지만, 차가운 알래스카의 바람을 폐 속으로 빠르게 집어넣은 조슈가 자신의 등을 지키고 있는 듬직한 엽총자루를 손으로 꼭 쥐어보였다. 생각하지 말고 확인해 보면 그만이었다.

하얀 자작나무 숲으로 사라져버린 레인과 발렛의 뒤를 쫓아 조슈가 서둘러 발을 옮겼다. 눈 밭 위에 빠르게 찍히는 조슈의 발자국 위로 긴장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크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며 발자국 위에 자신의 발을 올려놓는 검은 그림자가 멀어지는 조슈를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추운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조슈는 길이 아닌 곳도 싫어했다. 등산로는 부담 없었지만, 출입금지라던가 진입금지 따위의 금지간판만 보면 치를 떨었다.

조슈가 7살 때인가? 엘르의 가족들과 함께 알래스카로 여행을 온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엘르의 엄마도 살아계셨고, 조슈 역시 엄마라고 부르던 사람이 있었다. 3살 된 어린 여동생 미카를 눈 위에 집어 던지며 즐거워했던 때가 떠올랐다.

알래스카에 도착 한 지 만 하루 만에 그곳의 설원에 푹 빠져버린 두 가족은 언젠가 알래스카로 이사 와서 살자는 약속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났다. 그리고 다시는 알래스카에 오고 싶지 않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던 여행이었다.

숲으로 들어가 레인과 발렛의 발자국을 쫓던 조슈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꾸만 떠오르는 옛 기억을 떨쳐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선명하게 스며드는 추억 한 자락이 조슈를 천천히 뒤덮어 버렸다.

캠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얼어붙은 호수가 있었다. 엘르와 조슈는 그곳에서 스키를 타기 위해 나무로 만든 스케이트를 들고 호수로 향했다. 꽁꽁 언 호수 위를 신나게 달리던 두 사람 앞에 어떤 ‘짐승’이 나타났다.

당시에는 개과 동물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으니 조슈나 엘르의 눈에는 그 짐승이 개로 보였다. 그것도 아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위협적인 존재의 개 말이다.

빙판 위를 미친 듯이 달려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빙판은 미끄러웠고,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흙을 박차고 달리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더군다나 뜻밖의 짐승을 만난 덕에 당황하고 놀란 두 사람은 연신 넘어지고 자빠지며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비명을 질렀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어른들은 두 아이의 뒤로 바짝 쫓아온 개……아니 늑대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앨버트는 당시에도 끼고 있던 엽총을 하늘에 쏘아 올리며 공포탄으로 겁을 주었고, 두 엄마는 아이들을 향해 뛰어갔다.

무시무시한 공포탄 소리에도 늑대는 아이들을 쫓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먼저 도착한 엄마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품에 안고 웅크리며 보호했다. 그러자 어찌된 영문인지 늑대는 네 사람의 주위를 서성이며 으르렁거리는 소리만 내더니 숲으로 돌아갔다.

아찔했던 그 기억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친 조슈는 어느새 숲 속 깊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엽총을 양 손에 쥐었다. 4개 밖에 들어있지 않은 탄환을 보며 여분의 탄환을 들고 왔는지를 빠르게 생각해봤지만, 안타깝게도 챙겨온 탄환은 없었다.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하는 찰나, 눈이 가득 쌓인 앙상한 나뭇가지 너머로 발렛의 반짝이는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그곳을 다가간 조슈의 머릿속에 다시 그때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늑대가 사라진 후 캠핑장이 안전하지 않다며 보안관에게 항의를 하러 간 앨버트와 조슈의 아빠. 남은 사람들은 짐을 챙겨 캠핑장을 떠나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자들이 없어진 틈에 생각지도 못하게 늑대는 다른 무리를 끌고 와 캠핑장을 덮쳤고, 캠핑카 안의 간이침대난간에 세 아이를 밀어 넣은 엄마들은 총과 식기들을 무기로 늑대들과 맞서 싸웠지만 결국…….

생각하고 싶지 않던 기억을 떠올리고 만 조슈는 걸음을 멈추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얀 눈 위에 선명하게 그려진 붉은 핏물들이 그의 머릿속에 각인 된 채 눈에 대한 이미지를 완전히 뒤바꿔 놨다. 그리고 밀려드는 추위에 한참을 떨었던 것으로 기억됐다.

넋을 놓은 채 추위와 공포에 몸을 떨던 엘르는 당시의 기억마저 잃었고, 아직 어렸던 미카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본능으로 울음을 참고 있었다. 두 여자를 끌어안은 채 늑대들이 엄마들을 뜯어 먹는 걸 고스란히 보고 있던 조슈는 알래스카가 저주스러웠다.

“어디서 피 냄새가 나나 했더니, 조슈. 여긴 왜 온  거야?”

발렛의 목소리였다. 낭랑하지만 허스키한 느낌이 배어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조슈가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얼굴에서 볼과 입술만 붉게 물들어 있어 어딘지 모르게 더욱 귀엽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 발렛.”

두 사람의 뒤를 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되면 자신도 이대로 죽어버리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슈는 총을 들어 발렛을 향해 겨누며 뒤로 물러섰다.

“가, 가까이 오지 마!”

그러자 발렛의 눈썹이 묘하게 일그러지며 콧등에 주름이 잔뜩 들어갔다.

“뭐 하는 거야, 조슈?”

“아, 아까 그게 뭐지?”

바들바들 떨면서도 조슈는 발렛의 손을 살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의 손은 말끔했다.

“뭐? 아까 그거?”

“아, 아까 저기서 봤다고! 피를 흘리는……!”

“아……. 내가 잡은 오소리를 말하는 거야?”

발렛은 뭘 그런 걸 가지고 이렇게 겁을 먹었냐는 듯 성큼 조슈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지 마! 가, 가까이 오면 쏘, 쏠 거야!”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의미로 장전을 한 조슈가 위협적으로 턱을 쳐들었다. 그러자 발렛은 여전히 콧등에 주름을 넣은 채 조심스레 양팔을 위로 올리며 말했다.

“이거 뭔가 단단히 오해한 모양인데?”

“오해든 뭐든! 아무튼 저쪽으로 가서 서!”

“왜 이래 조슈?”

“내 이름 부르지 말고! 분명히 오소리는 아니었어! 그게 뭐지?”

눈을 빠르게 돌리며 주변을 훑으며 조슈가 물었다. 그게 오소리가 맞는지 아닌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말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자 발렛의 미간이 눈에 띄게 일그러지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는데?”

“하여간 이런 것들은 지 멋대로 하는데 뭐 있다니까.”

난데없이 나타난 레인이 조슈가 들고 있던 엽총을 순식간에 낚아채며 말했다. 그가 다가오는 것도 보지 못했고,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던 조슈는 그의 손에 들린 앨버트의 엽총을 보고 당황했다.

“레, 레인!”

“이런 장난감으로 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엽총을 빙글 돌려보던 레인은 정말 장난감 취급 하듯 옆으로 휙 집어던지고는 품에서 텀블러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다시 빨대를 꽂아 뭔가를 쪽쪽 빨아먹기 시작했다.

그의 입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조슈는 하얀 빨대 속으로 검붉은 것이 빨려 올라가는 것을 발견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치솟고 올라오는 에그스크럼블 때문에 뒤돌아서서 그대로 게워내고 말았다.

“으윽, 난 계란이 제일 싫더라.”

“많이 먹음 똥내나지.”

열심히 게워내는 조슈를 보며 두 사람은 똑같이 콧등에 주름을 넣은 채 중얼거렸다.

“어라? 손님까지 끌고 왔는데?”

이내 발렛이 조슈의 뒤를 노려보며 말했다.

“난 아까부터 알고 있었어.”

텀블러의 뚜껑을 닫으며 레인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러자 발렛이 짜증나는 표정으로 레인을 흘겨보며 비아냥거리듯 그의 말투를 따라하며 말했다.

“아, 그러셨어요? 어찌나 잘나셨는지!”

“내가 좀 잘나긴 했지. 온다!”

피식 웃어보이던 레인이 날카롭게 시선을 돌리며 낮게 소리쳤고, 그와 동시에 앞에서 열심히 토하고 있던 조슈의 등을 잡고 훌쩍 뛰어올랐다.

열렬하게 토하고 있던 조슈는 난데없이 땅이 멀어지자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고, 덕분에 반쯤 올라오던 에그스크럼블이 위 속으로 다시 내려갔다.

아래쪽에 있던 발렛은 몸을 낮추며 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꼬맹아. 넌 여기 있어.”

귀찮음이 가득담긴 소리로 레인이 중얼거렸다. 그

의 말에 조슈가 눈을 떠 레인을 돌아봤지만, 그는 이미 발렛의 곁으로 돌아가고 난 후였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조슈를 걸어둔 채 말이다.

“으히이익!”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며 조슈는 이대로 죽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쪽에 있는 레인과 발렛은 똑같은 포즈로 몸을 낮춘 채 앞을 보며 카르릉 거렸고, 멀리서도 선명히 보이는 두 사람의 날카로운 이빨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여긴 우리 구역이라고 했는데?”

레인의 말했다. 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겠다는 듯 어느새 하얀 눈 위로 하나 둘 개과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림짐작으로 봐도 열 마리는 넘어 보였다.

‘늑대다!’

생김새가 과거 알래스카 여행 때 가족들을 덮친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그 생김새를 기억하고 있던 조슈가 그들을 늑대로 단정 지으려는 찰나,

“이것 봐. 떠돌이 들개들이면 떠돌이답게 살라고. 왜 남의 구역까지 들어와서 일을 만들고 다녀?”

‘개? 들개?’

레인의 말에 조슈는 다시 들개라고 부른 그들을 돌아보았다.

예전에 보았던 그 무리들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늑대라고 생각했었는데 레인의 말을 듣고 지금 보니 분명, 늑대는 아니었다. 훨씬 덩치도 작았고, 날렵해 보였으며 무리가 산만했다.

“컹커겅! 카르르릉!”

그 중 가장 털이 뻣뻣해 보이는 개 한 마리가 앞으로 나서며 위협적인 소리로 크르릉거렸다. 우두머리인 듯 했다. 그러자 발렛이 몸을 잔뜩 숙이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목구멍 안쪽에서 소리를 끌어냈다.

그런 발렛을 향해 긴 팔을 뻗어 막아 선 레인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워워, 다들 진정하자고. 우린 우리 구역으로 돌아왔을 뿐이라고. 똥냄새가 진동한다길래 잠깐 둘러본 것뿐이야.”

레인의 말에 발렛이 표독하게 그를 노려봤다.

“물론, 잔뜩 골이 오른 발렛은 똥냄새를 없애길 바라고 있을 뿐이고.”

그러자 저쪽에서 여기저기 커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인간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을 뿐이고!”

앞으로 나선 개가 신경질적으로 크릉거렸다.

“이거 왜 이러시나? 우리도 들은 풍월이 있는 몸들인데. 귀는 귓밥을 파라고 있는 게 아니거든.”

레인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러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앞선 개를 노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누구냐, 죽인 놈이.”

이내 대치 상태로 있던 두 무리의 경계가 흐트러졌다. 저쪽의 우두머리 뒤로 나머지 들개들이 일제히 레인과 발렛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뭇가지에 걸려있던 조슈는 들개들의 위력이 어떤지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에 둘 밖에 없는, 더군다나 발렛이 여자인 것을 감안해서라도 남자인 레인이 감당해야 할 들개들의 숫자가 월등히 많다는 사실에 소리를 내질렀다.

“위험해요! 도망쳐!”

조슈의 소리에 들개 우두머리가 고개를 들어 그가 있는 곳을 확인하더니 마치 미소를 짓는 듯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거렸다. 그 미소에 조슈는 다시 토가 쏠리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레인과 발렛이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막 세 마리의 들개가 발렛에게 달려들던 참이었다.

“안 돼!”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한 조슈가 너무 놀라 눈도 감지 못한 채 발렛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발렛은 날카로운 표정으로 조슈를 힐끔 쳐다보더니 손가락을 꺾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며 들개들을 향해 내뻗었다.

순식간이었다.

빠르게 빙글 돌아가던 발렛의 반짝이는 금발이 긴 원을 그리며 세 마리의 들개들의 목을 날려버렸다. 달려오던 기세에 날아간 목이 발렛의 뒤로 넘어가자 나머지 들개들이 컹컹거리며 흥분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텀블러가 허공을 날아 발렛의 품에 안겼다.

“뭐야, 난 아직 시작도 안 했…….”

“평화주의자께서 왜 이러실까? 텀블러나 봐.”

레인의 말에 하는 수 없이 텀블러를 받아 든 발렛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비켜선 자리에 성큼 나선 레인이 평소와 달리 미소까지 지은 채 가볍게 발을 치고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앞으로 튀어나간 레인은 달려드는 들개들의 다리 밑으로 파고들며 순식간에 그들의 대열을 무너뜨렸다. 넘어진 들개들은 바짝 약이 오른 표정으로 레인의 뒤를 쫓았고, 레인은 전혀 긴장하지 않은 몸짓으로 여유롭게 거리를 조절하며 들개들을 이끌었다.

바짝 다가선 들개를 향해 무서운 위력으로 손을 휘두르자 들개 한 마디가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이내 더욱 흥분한 나머지 들개들이 레인의 뒤를 쫓았다.

[우두둑!]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을 구경하고 있던 조슈는 등 뒤에서 들리는 섬뜩한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뭇가지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뭇가지가 서서히 갈라지며 우두둑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 어, 어!”

버둥거리면 그대로 동강 나 버릴 것 같아 얼어붙은 채 잔뜩 긴장하고 있었지만, 조슈의 바람과는 달리 힘없는 나뭇가지는 그대로 조슈를 놓아버리고 말았다.

“으아아아아악!”

중력의 법칙에 따라 빠르게 바닥을 향해 떨어지던 조슈는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서서히 다가오는 하얀 눈을 보며 팔을 휘젓던 그는 정말 이대로 죽는구나 싶은 생각에 지난 세월을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새로 만든 비석에 선명하게 ‘조슈 마들렌 이곳에 잠들다’라는 글자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여간!”

레인의 목소리였다.

“난 수놈 구하는 데는 체질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도 먼저 달려왔잖아?”

이내 발렛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눈을 뜬 조슈는 자신의 뒷덜미를 잡은 레인과 그의 등에 매달린 발렛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리고 곧 레인이 두 사람을 지탱한 채 한 팔로 커다란 나무의 중간쯤에 걸쳐져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레인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런 사람이 살인마라거나 기타 다른 나쁜 사람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고, 고마워요.”

“인사는 나중에 하고 똥개들이나 달래야겠는데?”

레인의 말에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바짝 약이 오른 들개들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쳐든 채 서슬 퍼런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들개들 사이에 서서 한참을 뭐라 중얼거리던 레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슈의 곁으로 다가왔다. 레인을 감싸고 있던 들개들은 주위를 살피며 저마다 숲속으로 사라졌고, 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들개가 죽은 들개를 측은하게 바라보더니 고개를 조아리고는 다른 무리들을 따라 숲으로 사라졌다.

“왜, 왜? 왜 그냥 보내요?”

조슈가 화가 난 표정으로 물었다. 들개들의 움직임을 보면 엘르를 갈갈이 찢었다는 짐승들이 틀림없어 보였다.

책임을 추궁한다고 하기에는 이상했지만,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끔은 해야 했다.

“머리가 사라졌다고 했지?”

“같이 들었잖아요.”

“사체는 확인 했어?”

“……아직.”

내일이 장례식이었다.

엘르의 시신을 마주할 시간은 아직 충분했다. 아니, 엘르의 죽음을 외면할 수 있는 시간이 만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머리가 잘린 시신이 그 여자인지 확인 해 보래.”

“……네?”

“어쩌면 엘르? 엘르라는 여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

반가운 말이었지만, 어쩌면 저들이 저지른 일을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렇진 않을 거야.”

발렛이 대답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든 입으로 말하기 전에 발렛이 대답을 해 버리니 말이다.

“저들은 공격적이긴 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아. 알 수 없는 다른 무리가 있다고 했어. 그들이 인간을 사냥한다고 했으니……. 이곳도 순탄하지만은 않겠는 걸?”

발렛이 슬픈 표정으로 마을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확인 해. 네가 말하는 그 여자가 정말 죽은 건지. 아니면 그 여자로 착각한 건지.”

집으로 돌아온 조슈는 현관문을 바라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어쩌면 엘르가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시신을 확인 해 본다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럴 용기가 자신에게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엘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당장 알래스카로 올 수 없었던 자신 아니었던가? 그저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주저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시신을 봐야 한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들어선 조슈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난장판으로 변해버린 엘르의 집.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는 그녀의 집을 보며 조슈는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애, 앨……앨버트?”

그리고 서둘러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앨버트가 집에서 쉬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침범했다면 그래서 집안이 이 꼴이라면 앨버트도 위험할지 몰랐다.

“앨버트! 앨버트!”

2층으로 뛰어 올라간 조슈는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버텨야 했다. 확인해야 했다. 침대 위에 피투성이가 된 채 앨버트의 옷을 입고 있는 머리가 없는 시신을 말이다.

“너 이제 죽었다.”

“셧 업!”

발렛의 말에 레인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레인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이내 발렛은 미안한 표정으로 레인의 등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어른들 아시기 전에 빨리 가자.”

앞서가는 발렛을 보며 레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마을 쪽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에 들려진 텀블러를 들어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따뜻하고 비릿한 냄새가 훅하고 밀려들었다. 맛은 있지만, 꿀떡꿀떡 삼키기에는 비위가 그리 강하지 못한 레인이었다.

“환경오염을 막는 것도 좋은데, 그렇게 텀블러에 일일이 담고 다니는 거 불편하지 않아?”

발렛이 돌아보며 물었다.

“이것만한 것도 없으니까.”

레인이 중얼거리며 텀블러에 빨대를 꽂고 쪽쪽 빨기 시작했다. 새하얀 빨대 속에서 검붉은 액체가 일정한 간격으로 솟구쳐 올라 레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너 역겨워.”

발렛이 말했다.

“고마워.”

레인이 빙긋 웃었다.


Comment ' 9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13:34
    No. 1

    이야기가 완결된 느낌이 별로 들지 않네요.
    중간중간 좀더 설명해야 할 부분도 있는 것 같구요.
    그래도 꽤 흥미로웠습니다. 좋은 결과 있길 빕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23:38
    No. 2

    호오. 액션이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5 00:22
    No. 3

    오오~~늑대인간과 뱀파이어의 묘한 조화인가요?
    이거 장편으로 이어가도 될 것 같아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6 18:13
    No. 4

    뭔가 라이칸? 그런 존재라는건 알겠는데...
    결말이 왜 저런거지?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6 22:50
    No. 5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않고 끝나는 마무리가 아쉬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7 05:07
    No. 6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8 12:44
    No. 7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9 19:19
    No. 8

    대충 분위기는 알 것 같네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1 01:56
    No. 9

    이것도 그냥 소설 잘라다 놓은 것 같네요. 결말이 쌩뚱 맞고 끝 맺음은 없고... 아무리 잘봤어도 끝이 나쁘면 그다지 보기가 좋지 않아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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