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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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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왕

작성자
익명
작성
10.03.20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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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

황사가 자욱한 봄이었다.

안개처럼 눈앞을 가리는 흙먼지 때문에 정초동은 얼굴을 찡그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이까짓 황사가 무슨 대수냐는 듯 숨을 훅 들이마셨다. 그리고 곧 그 대가로 숨이 넘어갈 것처럼 재채기를 하며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에, 에, 에이취! 아이구, 이런 제기랄.”

간신히 몸을 툭툭 털고 일어선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쭉 뻗은 관도를 걷다가 약간 옆으로 방향을 튼 뒤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여행자용 지도에는 이 부근에 있는 작은 마을 하나가 표시되어 있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어갈 생각이었다.

사실 정초동은 근 몇 주째 반야초(般若草)라는 약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세 개의 가지에 달린 일곱 개의 잎이 공처럼 동그랗게 오므라들어 있는 이 풀은 음기(陰氣) 중에서도 극음(極陰)의 성질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자신의 성질과는 반대로 건조하고 평균기온이 높은 곳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쉽게 찾아보기가 힘들었고 그만큼 높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정초동이 반야초를 찾는 이유는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것으로 삼화혼원단(三華混元丹)이라는 환약을 조제할 생각에서였다. 삼화혼원단에는 반야초 외에도 황금거북의 등껍질인 황금구판(黃金龜板)과 설산(雪山)의 심처에서만 자란다는 만년설삼(萬年雪蔘)이 주재료로 들어갔다. 그 밖에도 다양한 부재료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삼화혼원단은 무림에서 그것을 직접 본 사람조차 손꼽을 정도로 상당한 보물이었다.

삼화혼원단을 사람이 섭취하면 단전(丹田), 옥당(玉堂), 인당(印堂)의 삼대 요혈에 여의주라고 하는 자그마한 기의 응체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서서히 머리 위로 떠올라 삼화취정(三華聚頂)의 조화를 이룬다. 그렇게 되면 인체의 경락에 존재하는 기혈(起穴 : 경락이 시작하는 혈)과 종혈(終穴)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든 경락이 연결되어 진기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무한히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진기의 소모가 거의 없어지고 전신주천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 결국은 모든 세맥(細脈)을 뚫어 인체에 무한히 내재된 잠력(潛力)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게 된다. 이 삼화취정의 경지를 수련으로 얻는 방법도 있으나 그것은 거의 한 갑자(甲子)나 걸리는 요원한 일이어서 삼화혼원단을 얻는 이는 단숨에 고수의 경지로 뛰어오를 수 있었고 풍문에는 신선의 경지도 넘볼 수 있다는 절세의 영약이었다.

정초동은 이러한 것을 만들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반야초를 찾은 다음에는 나머지 두 가지를 찾으러 설산과 동해에 가봐야 했다. 서로 반대방향이라 정초동이 세운 시간계획은 빠듯했다.

하지만 계획과는 달리 정초동은 꽤 오랜 시간을 이 근방의 황토고원에서 지체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가장 쉽다고 생각했던 반야초가 이렇다면, 황금구판과 만년설삼은 얼마나 어려울 것이란 말인가?

앞으로 걸어갈수록 흙먼지는 더욱 짙어져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눈앞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봄답지 않게 으슬으슬한 한기가 엄습해와 정초동은 겉옷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낡은 쥐색 장포(長袍)는 그럭저럭 바람을 잘 막아주었다.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먼지가 걷힌 곳엔 고요한 풍경이 보였다. 무채색의 하늘과 땅 사이 멀리로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얼핏 보아도 커다란 건물은 보이지 않았고 지나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이거 너무 깡촌인데...... 밥은 주겠지?”

정초동은 뒷짐을 지고 태평하게 걸었다. 그런데 마을 어귀에 거의 다다랐는데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안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은 고사하고 쥐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숨소리와 냉랭한 바람소리만 들릴 뿐, 황량한 정적만이 폐허와도 같은 이곳을 덮고 있었다.

“뭐야, 도대체. 저기요! 아무도 없어요?”

정초동은 삼십 냥을 주고 샀던 여행자 지도를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애초부터 옥면호리(玉面狐狸) 그 인간을 믿는 게 아니었다. 분명히 지도에는 이곳에 대한 설명으로 여유로운 인심, 생활수준 괜찮음, 나그네에게 후하게 대함, 대대로 무문(武門)을 계승한 집성촌(集姓村)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다 무너져가는 집들과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보이는 상황은 뭐란 말인가. 마치 전쟁이라도 몇 번 치르고 모두 도망간 꼴이다. 정초동은 나중에 꼭 옥면호리에게 멋진 신선약(神仙藥)을 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먹으면 정말 골로 가서 하늘나라 신선이 될 수 있는 약을. 하지만 그 여우는 의심이 워낙 많아서 속이기도 쉽지 않을 텐데. 정초동은 노인처럼 혀를 끌끌 찼다.

마을 중앙에는 사람 키보다도 한참 커다란 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회색과 붉은색이 섞여 있는 커다란 화강암이었다. 정초동은 그 돌을 잠시 밀어보다가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어떤 놈이 힘자랑하려고 이런 걸 깔아놨어?”

팔목이 저려 와서 정초동은 인상을 찌푸렸다.

“운동 부족이야, 운동 부족.”

어찌됐든 일단 묵을 곳을 찾아야 했다. 보이는 건물들 중 그나마 가장 깨끗하고 넓다 싶은 곳으로 정초동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디선가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사박.

정초동의 양쪽 귀가 순간 쫑긋 섰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보폭과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표정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사박.

다시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가까운 곳이었다.

정초동은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며 겉옷 안쪽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가늘고 긴 손가락은 겉옷 안쪽에 단단하게 동여맨 수많은 주머니들을 스치다가 그 중 하나에 이르러 멈췄다.

‘근력단(筋力丹).’

정초동은 마음속으로 자신이 고른 약의 이름을 생각하며 주머니에서 환약 한 알을 꺼내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갔다.

“아함, 졸립네.”

크게 하품을 하는 그의 입 속으로 환약이 쏙 굴러들어갔고 뜨거운 혀에 닿은 그것은 치르르 소리를 내며 녹아 없어졌다. 정초동은 입맛을 다셨다. 근력단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상쾌한 기분이 온 몸의 대혈과 세맥, 경락과 근육을 맴돌았다. 그리고 다시 소리가 들렸다.

사박!

순간 정초동은 몸을 돌리고 있는 힘을 다해 도약했다. 두 다리에 고여 있던 진기가 폭발적으로 반응하면서 지면을 밀어냈고 그의 몸은 순식간에 약 5장에 격하는 거리를 건너뛰었다. 놀란 듯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초동은 다시 뛰어 3장의 거리를 더 좁혔다. 건물 뒤로 사라지는 흐릿한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정초동은 숨을 훅 들이마시고, 하늘로 높이 뛰어올랐다.

태양이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으며 정초동은 앞에 있던 4장 높이의 건물을 훌쩍 뛰어넘었다. 어떤 사람의 작은 등이 그의 시야에 잡혔다. 순간 그자의 시선이 정초동과 정면으로 마주쳤고 정초동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꼬마아이?”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였다. 머리에 댕기를 하고 낡은 옷을 입은 그 아이는 정초동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정초동은 공중에서 떨어지는 중에 아이와 시선을 맞추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때 예리한 파공음이 들리며 무언가가 정초동의 뺨을 스치고 날아갔다. 깜짝 놀란 정초동은 착지와 동시에 몸을 한 바퀴 굴렸다. 그가 방금 전까지 위치하고 있던 곳에 붉은 화살 세 대가 간격을 두고 나란히 박혔다.

정초동이 좌우를 둘러보자 활과 화살, 창과 방패 등으로 무장한 많은 사람들이 건물 사이사이에서 나타났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본 정초동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뭡니까, 대체?”

“죽여라!”

돌아온 대답은 가차 없었고 사람들의 공격 역시 기다렸다는 듯 이루어졌다. 정초동은 순간 두 다리에 힘을 모아 펄쩍 뛰었다. 창과 화살, 검들이 그의 뒤를 매섭게 추격했다. 정초동은 쫓기면서도 일단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며 두 손을 들었다.

“아니 아니, 일단 진정들하시고! 저는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이온데......”

“죽일 놈!”

“개자식!”

“뒈져라!”

정초동은 더욱 맹렬하게 날아오는 화살과 암기들을 피하며 작은 소리로 옥면호리를 욕했다. 뭐, 여유로운 인심, 나그네에게 후하게 대함? 내 이 인간을 다시 만나기만 해봐라. 그러다 정초동은 가슴을 세게 부딪쳐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에구구!”

눈앞을 보니 아까 봤던 화강암이 자신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사람들은 적의에 가득 찬 눈초리로 포위망을 점점 좁혀왔다. 정초동은 그들의 눈에서 느껴지는 원독(怨毒)을 보고 말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손을 화강암 밑에 살짝 끼웠다. 그리고는 우렁찬 기합과 함께 힘을 쓰기 시작했다.

“이엽! 이야아아아......”

사람들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 정초동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았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짓인 줄 알고 몇몇은 코웃음을 쳤다. 저 커다란 화강암을 들 수 있는 것은 이 근방에는 오직 역사(力師) 육삼유 뿐이다. 그것도 두 손으로 온 힘을 다해 들어야 되는 것이다. 육삼유를 생각하자 피맺힌 원한이 떠오른 사람들은 다시 병장기를 고쳐 잡고 정초동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바위가 들렸다. 커다란 화강암. 사람보다도 더 커다란, 마치 자그만 산처럼 보이는 암석이 이제 겨우 열대여섯이나 되어 보이는 소년의 한 손에 번쩍 들린 것이다. 소년은 전혀 힘들지도 않은지 여유 있게 웃고 있었다.

“하앗!”

정초동은 마치 공깃돌을 다루듯 경쾌한 몸짓으로 바위를 던졌고 그것은 엄청난 소리를 내며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나 반대편 공터에 떨어졌다. 벼락과도 같은 굉음이 천지에 진동했다.

“아, 빗나갔네. 조금 옆으로 던지려고 했는데.”

정초동은 아쉬운 듯 손을 탁탁 털더니 석상처럼 굳어진 사람들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아까의 꼬마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초동은 아이에게 손을 가져갔다. 아까 바위를 들어 올렸던 그 손이었다. 사람들이 움찔했지만 아이는 전혀 겁먹지 않은 기색이었다. 정초동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나쁜 사람인줄 알았니?”

“네. 아니, 이제는 아니에요.”

“왜?”

“나쁜 사람이면 그 돌을 우리한테 던졌을 테니까요.”

“허!”

정초동은 웃으며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애가 참 똑똑하네요.”

그리고는 갑자기 옆으로 쓰러졌다. 놀란 사람들이 다가갔을 때 그는 이미 피곤한 듯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 * *

정초동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주위는 고요했다. 시간은 저녁때가 되었는지 방에 단 하나 나 있는 창문에는 이미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정초동은 금침을 깐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소지품들이 탁자 위에 올려놓아져 있는 것을 본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다시 챙겼다. 그리고는 빠진 것이 없나 꼼꼼하게 몇 번을 점검한 뒤, 살금살금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손을 짚고, 한 발을 걸치고, 막 나머지 발을 떼어 방에서 빠져나가려 할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정초동은 어색한 자세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눈을 돌리니 앞에는 어떤 아름다운 여인이 무언가를 받쳐 들고 와 있었다. 음식냄새가 풍기자 정초동의 배에서 화답하듯 꼬르륵 소리가 났다. 여인은 이상하다는 듯 정초동을 바라보았다.

“아,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 둘 하나 둘...... 안녕하세요?”

여인은 가볍게 눈인사를 한 후 탁자에 식사를 내려놓았다. 정초동은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마치 대적을 대한 듯 식은땀으로 전신이 흠뻑 젖었다.

“자, 잘 먹겠습니다!”

정갈하게 차려진 식사였다. 정초동은 자리에 앉자마자 순식간에 그것을 깨끗이 먹어치웠다. 정초동의 음식 먹는 속도를 본 여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정초동은 여인의 목울대를 본 뒤 여인이 원래 말을 하지 못함을 직감했다. 여인의 목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매끄럽고 잔주름이 없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정초동은 숨을 고른 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살폈다. 붓으로 그린 듯 청초한 얼굴에 아담하고 예쁜 이마와 오뚝한 코, 붉은 입술이 절로 마음을 설레게 하는 자태였다. 다만 눈가에 살짝 서린 푸른 기운이 그녀에게 약간의 지병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혹시.”

정초동의 말에 여인은 대답 대신 두 눈을 깜박였다. 숨이 멎을 만큼 앙증맞은 모습이라 정초동의 얼굴은 다시 새빨개졌다. 하지만 간신히 숨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자다가 속이 아파서 깨고 하지 않으십니까?”

여인의 얼굴에 놀랐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정초동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 안에 손을 넣더니 작게 말린 종이와 휴대할 수 있게 된 붓을 꺼냈고,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그것을 여인에게 건넸다.

“처방입니다. 나중에 약을 지어서 드시면 위장이 많이 가라앉을 겁니다.”

여인과 손가락이 맞닿자 정초동은 그만 종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종이를 주운 여인은 그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작약감초탕(芍藥甘草湯). 작약 4전(錢), 감초 2전(錢).’

여인은 정초동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종이를 보았다. 그리고는 정초동의 손에서 붓을 받아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의원’

“아, 아닙니다. 그냥 의약을 좀 배웠을 뿐입니다. 후후후후훗.”

정초동은 스스로 가장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여인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고 놀란 정초동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주 절했다.

“아니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고 이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허허.”

그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정초동이 보니 아까 낮에 봤던 꼬마아이였다. 꼬마아이는 어색하게 맞절을 하던 두 사람을 보고 씽긋 웃었다.

“와아, 신랑이랑 신부 같네.”

여인의 얼굴이 새빨개지며 꼬마아이에게 눈을 흘겼다. 정초동은 그 모습을 보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 꼬마아이가 정초동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끌어 겨우 제정신이 들었다.

“촌장님이 오시래요.”

* * *

여인은 백영인이라 했고 꼬마아이는 백요홍이었다. 둘은 자매였고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다. 촌장의 집에서 딸처럼 컸다고 했다.

어두운 복도에는 등이 많이 꽂혀 있었지만 막상 켜 놓은 것은 조금 뿐이었다. 백영인과 백요홍은 이리저리 방향을 틀면서 미로처럼 얽힌 길을 헤치고 나아갔다. 역시 대를 이어 내려왔다는 무가라 그런지 외적이 침입할 때를 대비한 경계가 꽤 그럴듯한 것 같았다. 그들을 따라가면서 정초동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내가 왜 이곳에 있을까? 지금 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닌데. 애초부터 이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아니었다. 하여튼 옥면호리 그 인간 때문이야. 그런데 저 백 낭자는 도대체 뭘 먹고 저렇게 예쁜 걸까? 아.

그때 백영인이 걸음을 멈춰서 따라가던 정초동은 그녀와 살짝 부딪쳤다. 순간 물씬 풍겨온 여인의 체취와 부드러운 감촉에 정초동은 숨이 막혔다.

“죄, 죄송합니다!”

그때 문이 활짝 열리며 눈앞이 밝아졌다. 빛에 눈이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작은 방 안에는 강인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있었다. 굵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얼굴, 단단해 보이는 몸은 그 옛날 금나라와 싸웠던 악비 장군의 환생인 것 같았다. 다만 여기서 본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약간 지쳐있는 듯한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반갑소. 악가촌(岳家村) 촌장 악중산이라 하오.”

“정초동이라 합니다.”

“좋은 이름이군. 일단 앉으시오.”

악중산과 정초동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백영인과 백요홍은 한쪽에 나란히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악중산은 정초동의 행색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정초동은 그 시선을 담담하게 마주했다.

“좋은 눈이로군.”

“촌장님도 풍모가 대단하시군요.”

“허허, 허울 좋은 겉모습일 뿐이라오. 지금 이 마을에 닥친 위기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위인이니까.”

정초동은 예상했던 말이 나오자 멈칫했다. 촌장은 생각보다 훨씬 단도직입적인 성격인 것 같았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겠소?”

“저...... 마을 중앙에 놓인 돌은 봤습니다만, 혹시 그것과 관련이 있는 일입니까?”

“그렇소.”

촌장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는 말라죽어가고 있다오.”

* * *

사건의 발단은 구혼이었다.

악가촌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적룡무관(赤龍武館)이라는 곳이 있었다. 원래 지방의 작은 무관으로 시작했던 곳이지만 시작한 지 삼십 년이 지나며 두 세대를 거친 지금은 꽤나 큰 성세를 이루고 있는 근방 제일의 문파가 되어 있었다.

그곳의 관주 문일룡은 지도력과 실력을 겸비한 인물이었지만 성격이 잔인하고 여색을 밝히는 게 흠이었다. 그런데 그런 문일룡이 악가촌 촌장의 양녀인 백영인에게 눈독을 들인 것이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백영인을 본 문일룡은 큰 기대를 품고 다가갔다가 그녀가 악가촌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백 년 이상을 이어져온 악가촌의 명성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생에서 성공만을 거듭해 온 그였기에 악가촌이 쌓아온 이름 중에 어느 정도는 허명(虛名)이 섞여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일룡은 상대방을 생각해서 일단 정중하게 혼담을 넣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정중하지만 냉랭한 거절이었다. 문일룡은 화가 나서 이번에는 조금 더 노골적인 문장에 은근한 협박을 섞어서 다시 서찰을 띄웠다. 그러나 심부름을 갔던 제자들은 문전박대를 당했고, 화가 난 그들이 악가촌을 뒤집어놓으려고 했다가 오히려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몰매를 맞고 쫓겨 왔다.

문일룡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악가촌에 정식으로 비무를 신청했다. 악가촌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이에 응했고 서로 간에 다섯 명씩 나와서 진검승부를 펼쳤다.

그러나 결과는 적룡무관의 참패였다. 문일룡은 열이 뻗쳐서 잠도 자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이제는 단순히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보다도 문파의 위신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실력만큼 이름이 중요한 강호에서 그 이름이 손상되면 곧 모든 부분에서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게 된다. 문일룡은 친형이 있는 하내(河內)에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한 달 후, 심부름꾼은 친형의 소개를 받은 세 사람과 함께 돌아왔다.

하내삼사(河內三師)라 불리는 그들은 하내에서 명성이 자자한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높은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문일룡은 환히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거금을 약속하며 악가촌의 처리를 부탁했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검사(劍師) 설문귀였다. 그는 귀신처럼 조용히 악가촌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문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그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조용히 뒤를 따르다가 적당한 때 일검(一劍)을 찔러 넣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악가촌의 경계는 엄중해졌고 설문귀는 올 때처럼 소리 없이 악가촌을 떠났다.

다음은 둘째인 역사 육삼유의 차례였다. 대낮에 사람 몸뚱아리보다도 커다란 돌을 짊어지고 이십 리 길을 걸어온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악가촌의 한가운데에 그 돌을 쿵 하고 내려놓았다. 땅이 울리는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나오자 육삼유는 그들 중 몇을 잡아서 바위에다 계란처럼 으깨버린 뒤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사(方師) 증양평이 술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짙은 흙먼지가 악가촌 주변을 뒤덮었고 마을을 빠져나가려던 사람들은 아무리 헤매도 길을 못 찾아서 탈진하기도 하고, 또 먼지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주먹과 발에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악가촌의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모두 지지 않으려고 버티고는 있었지만 벌써 두 달째였다. 식량도 점점 떨어져갔고 사람들의 의지도 점점 약해져갔다. 그래도 백 년을 이어온 무가의 전통이 그들을 아직 지탱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촌장인 악중산조차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 * *

“어쩐지 이 마을에 들어올 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악중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해결책은 없는 겁니까?”

“사실 영인이는 자신이 문일룡에게 직접 찾아가겠다고 계속 말했지만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았지요. 우리 악가촌의 명예가 달린 일이니까.”

“그렇군요.”

이미 상황은 극한으로 치달아 있다. 악 촌장의 말마따나 지금 백영인이 간다고 해도 둘 사이의 해묵은 원한은 풀리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해결이 나야 한다. 그런데 왜 내가 여기에 있는 거지? 이 일이랑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정초동은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잘 빠져나갈 수 있을까?

“소협.”

악중산이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란 정초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협이라니요. 저는 그냥 평범한 떠돌이입니다.”

하지만 악중산이 그를 보는 눈은 간절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그에게 마지막 희망이라고 할 만한 것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게 자기라고 생각하자 정초동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알겠는데, 저는 그만한 실력이 없는데요.”

“아까 육삼유가 갖다 놓았던 돌을 멀리 던졌다고 들었소.”

“그건 약기운에 취해서 그런 것 뿐입니다.”

“약기운?”

“아, 그런 게 있습니다. 하하하...... 어쨌든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내삼사라면 하내삼마(河內三魔)라고도 불리는 마두들인데, 제가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를 지녔다고 해도 그런 자들과 맞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마지막 희망은 소협 뿐이오.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모두 백골이 되는 수밖에 없소.”

난감했다. 정초동은 일부러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하내삼사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 정도면 하내 지방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들이다. 정초동은 아직 그런 고수들과 상대해본 적이 없었고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옥면호리가 ‘너 정도면 강호에서 두려울 게 없을 것이다’라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지만, 그런 말 한마디를 믿고 뛰어들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어쩌다 이런 곤란한 지경에 빠진 걸까.

그때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백요홍이 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잔뜩 결심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정초동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건 네가 손대도 좋은 물건이 아니야.”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전 이걸 먹을 거예요.”

정초동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백요홍이 들고 있는 것은 정초동의 겉옷에 달린 수많은 주머니들 중 하나에서 뺀 환약이었다. 그 이름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십미영보환(十味靈寶丸). 내가 먹으면 기력이 회복되고 내상을 치료하지만 몸에 위험한 약물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오직 나에게만 맞춰놓은 거야. 다른 사람이 먹으면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몰라. 죽을 수도 있다. 그렇게 죽거나 병신이 된 사람을 몇 명 봤어.”

“어차피 죽게 될 텐데요 뭘. 아저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우린 모두 죽어요. 지금 죽으나 며칠 있다 죽으나 무슨 차이가 있죠?”

“똑똑하다는 말은 취소해야겠구나.”

“멍청해도 좋아요.”

백요홍은 말과 동시에 약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러자 정초동은 재빨리 손을 뻗어 백요홍의 손을 찰싹 쳐냈다. 환약은 또르르 굴러 백영인의 발 앞에 멈춰섰다. 백영인과 정초동의 눈이 마주쳤다.

‘미안해요.’

어쩐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한 슬픈 눈이었다.

정초동의 머릿속이 순간 멍해졌다. 그녀의 눈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들여다본 건 처음이었다. 바닷소리가 들렸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며 눈앞을 지나갔다. 수많은 해초들도 보였다. 사람들이 헤엄치며 뛰놀고 있었다. 수정처럼 맑은 바다가 그녀의 눈 안에 들어 있었다. 혼이 머리에서 쑥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으며 정초동은 악중산을 돌아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하겠습니다.”

“뭐라고?”

“한다구요, 해.”

무슨 말인지 몰랐던 악중산은 그게 승낙의 뜻임을 겨우 알아챘다.

“고, 고맙네.”

악중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를 취했다. 백영인도 활짝 웃으며 정초동에게 머리를 숙였다. 정초동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것만 같았다. 오늘 선녀가 웃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 버렸다. 백요홍은 그런 정초동을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바라보고 있었다.

* * *

날은 맑아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악가촌 주변에는 어둠이 짙게 내려 있었다. 두 달 전부터 악가촌을 뒤덮고 있는 흙먼지 때문이었다.

흙먼지가 만든 매캐한 그늘 아래 정좌하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등에 갖가지 색깔의 작은 깃발들을 꽂고, 머리는 길게 늘어뜨린 채 황색 도포를 입고 있는 그는 바로 하내삼사의 막내인 방사 증양평이었다. 그는 정좌한 채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갑자기 일진광풍이 휘몰아쳤다. 증양평의 회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세차게 날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바람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지만 주변에는 오히려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증양평도 그것을 느꼈는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하지만 주변에는 흙먼지만 가득할 뿐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증양평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등에서 깃발 하나를 뽑아들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었다. 피를 땅에 박은 깃발에 흩뿌린 증양평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지공장군(地公將軍), 궐풍(獗風)!”

그러자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었다. 흙먼지 속에서 어떤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증양평은 눈을 크게 떴다. 세상의 어떤 존재가 방술로 불러낸 바람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바람은 분명 그 뒤를 쫓아갔지만 목표로 했던 것은 끝내 잡지 못하고 허공을 움켜쥐다 스러졌다. 증양평은 다시 두 개의 깃발을 뽑아 땅에 박았다.

“천선(天仙), 폭뇌(暴雷), 비선(飛仙), 상화(相火)!”

깃발들은 마치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빳빳하게 펴졌다. 그때 다시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갈(喝)!”

호통 소리와 함께 붉고 흰 빛줄기가 증양평의 등 뒤로 섬전처럼 날아갔다. 하지만 이미 목표물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증양평은 필사적인 몸짓으로 등 뒤에 있는 깃발을 모두 꺼내어 주위의 땅에 꽂았다. 열 몇 개의 알록달록한 깃발이 전투 지휘를 받는 병사들처럼 일사불란하게 늘어섰다.

“천지오행(天地五行) 색동지상형(色動志象形) 유상무형(有象無形) 법극도리명(法極道理明)!”

그러자 주변의 모든 경물이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색은 사라졌고 빛도 희미해졌다. 바람소리도 숨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의 공간이 끝없이 펼쳐졌다. 누구라도 더는 숨을 곳이 없었다. 증양평은 드디어 자신과 마주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겨우 열댓 살이나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자신을 상대하는 자가 생각보다 훨씬 어린 것을 발견한 증양평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도대체 어떻게? 웬만한 무림의 고수도 자신의 술법 앞에서는 애를 먹거늘, 기연을 만나 엄청난 내공이라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증양평과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놀랍게도 웃고 있었다.

“아저씨, 꽤 대단하네. 세상에서 색을 없애버렸어.”

“넌 대체 누구냐?”

“나? 그냥 지나가던 사람인데 어쩌다보니까 끼어들었어. 뭐 어쩔 수 없지.”

소년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증양평은 입술을 깨물며 어린애 팔뚝만한 법검(法劍)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팔뚝살을 베어 길게 피를 묻힌 뒤, 법검을 허공에 놓았다. 증양평의 손이 떨어지자 법검은 허공에 그대로 정지했다.

“와, 신기하네. 공중부양이다, 공중부양. 그림이라도 그려놔야 후세에 증거로 남기겠는데.”

하지만 말과는 달리 소년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증양평은 그런 소년을 보면서 자꾸 정신이 분산되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 제법 심리전을 거는구나.’

차라리 상대방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증양평은 정신을 집중하고 두 손을 모은 뒤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일월성신(日月星辰) 구궁삼하(九宮三河) 사해오악(四海五嶽) 마례청(魔禮靑) 마례홍(魔禮紅)......”

법검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낮은 소리로 계속되는 주문에 주위 공간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종이를 구기는 것처럼 알 수 없는 힘이 공간 자체를 거칠게 움켜쥐며 부수고 압축해 들어왔다. 어느새 백색의 공간은 숨이 막힐 정도로 좁아져 있었다. 주변의 압력이 점점 거세짐에 따라 한 글자 한 글자를 발음하는 것조차 점점 힘에 겨웠지만 증양평은 억지로 진언을 계속했다. 눈을 가늘게 떠 보니 소년은 몸을 살짝 살짝 움직였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 가득했다.

‘아, 아니 어떻게 된 것인가? 왜 반응이 없는 거지? 이 거대한 압력이 느껴지지 않는단 말인가?’

“호아신변(護我身邊) 화개일월(華盖日月) 대라간참(大羅間斬)......”

이러다 자신이 먼저 죽을 것 같았다. 가슴이 터지고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그때 휙 소리와 함께 공간이 갈라졌다. 순간 증양평은 자신을 쥐고 있던 끈이 툭 끊어지는 것을 느끼며 허공을 날았다. 곧 몸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증양평은 피를 토하며 땅바닥을 굴렀다.

법검은 떨어져 있었고 세상은 다시 원래의 빛깔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증양평의 앞에는 소년이 서 있었다. 증양평은 흐릿해져가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며 자신의 앞에 선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나의 대라간참을 이겨냈단 말인가? 그것도 가만히 서서?”

한번 펼치면 끝날 때까지는 거둘 수 없는 필사의 주술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다 끝나서 공간 자체가 사라질 때까지 소년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인간이 어떻게 그런 압력을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소년은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칼을 이마 위로 쓸어넘기며 말했다.

“아니, 계속 움직였는데?”

“움직였다고?”

증양평은 깜짝 놀랐다. 그랬다. 소년이 가만히 서 있다고 본 것은 자신의 착시현상이었을 뿐, 사실 소년은 계속 자리를 바꾸면서 공간을 쥐어 터뜨리는 힘을 피했던 것이다. 그가 서 있던 자리는 사실 수백 번도 더 공격을 받았을 테니까.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증양평은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고 했지만 소년은 그의 수혈(睡穴)을 짚었다. 증양평은 눈을 감고 어린아이처럼 긴 잠에 빠졌다.

* * *

“흙먼지가 사라졌습니다!”

무장한 사내가 악중산에게 황급히 뛰어와 보고했다. 악중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빽빽하게 둘러선 사람들에게 외쳤다.

“적룡무관으로 간다!”

“와!”

활과 화살, 도검창곤으로 무장한 백여 명의 사람들이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찌를 듯한 살기와 울분이 그들 속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활을 든 백영인과 화살통을 든 백요홍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들 사이에 끼어있었다.

* * *

정초동은 몸이 급격히 피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신속단(迅速丹)의 부작용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열약(熱藥)인 남해 화산(火山) 극락조(極樂鳥)의 알을 넣어 만든 신속단은 강한 부성(浮性)이 있어 상기하허(上氣下虛)를 유도하여 몸을 새털처럼 가볍게 했다. 하지만 약기운이 돌수록 위로 몰린 기가 머리에 쌓여 어지럽고 열이 심해지게 되는 것이다. 정초동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두무냉통(頭無冷痛), 복무열통(腹無熱痛)이라.”

정초동은 의약계의 오래된 고사성어를 중얼거렸다. 머리가 차가워서 아픈 병이 없고 배가 뜨거워서 아픈 병이 없다. 바꿔 말하면 머리가 뜨겁고 배가 차가운 것은 만병의 근원이란 말이었다. 잠시 앉아서 정양이라도 하면 몸이 나아질 것 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저 멀리서 육중한 남자가 지축을 울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바로 역사 육삼유였다. 세 살 때에 황소의 뿔을 잡아끌고 일곱 살 때에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말도 안 되는 전설의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사십이 다 된 나이였지만 얇은 옷 아래로 드러나 보이는 울퉁불퉁한 근육은 어떤 젊은이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정초동은 품속에 손을 넣고 준비해두었던 환약을 꺼냈다. 괴력단(怪力丹). 악가촌에 처음 왔을 때 바위를 던졌던 근력단보다 훨씬 강한 약효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강했다. 정초동은 숨을 크게 들이켠 다음 약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눈앞이 붉어졌다. 견딜 수 없는 화기(火氣)가 심장을 타고 올라왔다. 또한 간에서는 응축되어 있던 목기(木氣)가 터져 나와 정초동은 거의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몸 안에서 폭죽이 끊임없이 터지는 것 같았다. 정초동의 이상한 행동을 본 육삼유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애송이에게 당하다니, 셋째도 많이 늙었군.”

육삼유는 코웃음을 쳤다. 그때 정초동은 붉어진 눈으로 육삼유를 바라보았다.

“한번 해봅시다. 뚱뚱보 아저씨. 누가 길고 누가 짧은지.”

“하하하! 건방진 녀석!”

육삼유는 크게 웃더니 갑자기 무섭게 돌진해왔다. 하지만 정초동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 나가 둘은 강하게 부딪쳤다. 손과 손이 거칠게 엇갈리고 시선이 사납게 부딪쳤다. 두 손을 맞잡은 상태에서 육삼유는 상대의 힘이 만만치 않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비리비리한 녀석 안에 어떻게 이런 힘이 숨어있단 말인가?’

“뭐야, 아저씨 너무 약하다. 이 정도면 동네 골목대장 정도밖에 못하겠네요.”

말과 동시에 지금까지보다 더 큰 힘이 육삼유를 밀어제쳤고 놀란 그는 몇 발짝 물러났다. 그 순간 정초동의 주먹이 육삼유의 복부를 강타했고 허둥대던 육삼유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정초동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매섭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육삼유도 이미 엉덩이가 바닥에 닿음과 동시에 조전쌍시(鳥展雙翅)의 자세로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정초동의 다리를 쓸었다. 의외의 공격에 정초동은 훌쩍 높이 뛰었고 거기서 빈틈을 발견한 육삼유는 이미 단봉조양(丹鳳朝陽)으로 찔러가며 두 발을 교차시켜 정초동의 가슴을 쳤다. 하지만 정초동은 이미 금계독립(金鷄獨立)세로 바닥에 내려서며 육삼유의 공격을 모두 풀어버렸다.

육삼유는 순간 두세 발짝 더 물러섰다. 상대가 보통이 아닌 것을 알자 자신도 온 힘을 다해야했다. 그는 전신의 진기를 끌어올리며 이빨을 꽉 깨물었다. 순간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피어오르며 그의 몸에서 은은한 금광(金光)이 맴돌았다.

“금강불괴(金剛不壞)!”

육삼유는 외침과 함께 정초동에게 다시 돌진해왔다. 정초동은 현란한 수영(手影)을 뻗어내며 육삼유의 전신을 강타했지만 마치 물먹은 솜에 닿은 것처럼 그의 공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놀란 정초동은 뒤로 물러섰지만 이미 육삼유의 어깨가 가슴팍에 닿아 있었다. 강한 충격이 밀려왔다.

“윽!”

정초동은 뒤로 멀리 날아가 땅바닥에 쓰러졌다. 가슴뼈가 욱신거리며 아픈 것이 한두 군데는 금이 간 것 같았다. 억지로 일어나고 있는데 육삼유가 다시 돌진해오고 있었다.

“하아압!”

“와, 진짜 금강불괴란 말야? 이거 반칙 아니야? 공격이 안 먹히면 나보고 어쩌라고?”

정초동은 말과 함께 몸을 이리저리 날렸지만 육삼유는 재빨리 방향을 바꿔 정초동을 따라왔다. 끈질기게 쫓아오는 육삼유를 피하던 정초동이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무엇인가 결정을 내린 듯 두 손을 늘어뜨리고 차분히 육삼유를 바라보았다. 육삼유는 의문이 들었다.

‘뭐지?’

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육삼유는 더욱 무서운 기세로 정초동에게 돌진했다. 하지만 정초동은 그가 가까이 오자 순간 몸을 팽이처럼 빙그르르 돌렸다. 목표물을 놓친 육삼유는 급히 방향을 바꿔 정초동을 마주보았지만 이미 정초동의 작은 손은 그의 양 어깨에 얹혀 있었다.

“하늘 구경 해 본 적 없지?”

정초동은 손을 번쩍 들어 올렸고 그와 동시에 육삼유의 몸도 같이 붕 떴다. 빠른 속도로 날아서 허공의 한 점이 되었던 육삼유는 곧 올라갈 때보다 더욱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굉음과 함께 땅바닥에 부딪쳤다. 정초동이 보니 육삼유는 이미 기절해 있었다.

“오늘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았음. 금강불괴라도 땅바닥에 부딪치면 아프다.”

정초동은 중얼거리며 그 옆에 주저앉았다. 이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로 자신의 상태가 심각했다. 목이 바짝 타고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역시 약은 과용하면 안 좋단 말이야. 부작용이 있거든.”

한껏 여유를 가장한 말투였지만 자신의 목소리 속에서 울리는 떨림을 스스로도 느낄 수가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하내삼사의 맏형 검사가 남아 있었다. 하내에서도 검으로는 첫째로 손꼽히는 검의 귀신, 설문귀가 다가오고 있음을 그의 팽팽하게 긴장된 전신이 느끼고 있었다.

정초동은 작은 약봉지를 꺼내들었다. 봉지에는 붉은 먹으로 작은 글자가 씌어 있었다.

‘군화침정산(君火浸精散).’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펼친 다음 그 속에 있는 소량의 백색 가루를 코앞으로 가져가 조심스럽게 흡입했다. 혹시라도 바람에 날려갈까 종이를 감싸 쥐고 남김없이 들이킨 그는, 순간 등을 활처럼 구부리며 소름끼치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심장을 천군만마가 밟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귓가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단말마가 들려왔다. 모든 것이 붉은 색이 되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피 냄새. 도저히 잊을 수도 지워질 수도 없는 강렬한 피비린내가 났다. 지금까지 만나온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자신의 잘려진 목을 들고 밝게 웃고 있었다. 거기에는 백요홍도 있었다. 지금까지 봤던 수많은 여인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裸身)으로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백영인도 있었다. 지금까지 본 수많은 남자들이 모두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거기에는 악중산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를 자신이 밟고 있는 환영이 보였다.

죽음이 있었다. 삶이 있었다. 사람들이 태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피와 애액과 열기와 땀으로 가득한 끈적끈적한 지옥에서 웃고 울며 발광하는 정초동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잘라내어 그 피를 사방에 흩뿌리고 있었다. 백요홍과 백영인이 그것에 달라붙어 아이처럼 열심히 빨아먹고 있었다. 정초동은 미친 듯이 웃어 제쳤다. 목청이 터져버렸다. 고막도 터져버렸다.

정초동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옥 같은 환영을 떨쳐버리자 앞에 선 형상이 보였다. 고목처럼 보였던 그것은 자세히 보니 장작처럼 바짝 마른 사람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는 매서운 검객. 검사 설문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당신의 동생들을 이겨낸 것 말인가요?”

“아니. 네가 방금 이겨낸 것 말이다.”

정초동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설문귀를 빤히 바라보았다.

“에, 그게 보였다고요? 정말?”

“수련을 오래하면 영안(靈眼)이 뜨이지. 네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한 의지력을 갖고 있구나. 혹시 옥면호리와 관계가 있느냐?”

정초동은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건 또 어떻게?”

“그 노인과 닮은 부분이 있더구나. 똑똑한 척 하면서 정작 실속은 못 챙기는 것 말이다. 냉정한 척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여린 면이 남아있지. 그런 건 살아가는 데 전혀 필요 없는 것인데도 말이다. 여기에 온 후로 널 쭉 지켜봤다.”

“그렇습니까.”

정초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빙긋 웃었다.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결판은 내고 싶은데요.”

“그러자꾸나.”

정초동은 품 안에 손을 넣어 막대기 하나를 꺼내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약초를 빻을 때 쓰는 평범한 나무막대기였고 다만 색깔이 약간 짙을 뿐이었다. 하지만 설문귀는 놀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묵린강철(墨鱗鋼鐵)?”

“천 년 묵은 묵린사(墨鱗蛇)를 잡을 때 비늘 몇 개를 슬쩍했죠. 나머지는 옥면호리 그 인간이 싹 다 가져갔지만.”

“흠.”

설문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검을 고쳐 잡았다. 정초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설문귀와 마주섰다.

사아아.

바람이 불었다. 황토에 날리는 바람은 둘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먼 곳에서 함성소리가 들렸다. 순간 설문귀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때 정초동은 펄쩍 뛰어 설문귀에게로 쇄도했다. 그의 손에 들린 막대기가 쭉 늘어나며 설문귀의 인중을 노렸다. 설문귀는 얼른 뒤로 물러서며 검을 휘둘렀다.

펑!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화륵 피어올라 장내를 감쌌다. 정초동은 더욱 빠른 속도로 설문귀에게 달라붙어 전신의 요혈을 막대기로 겨냥했다. 막대기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며 설문귀를 공격했다. 설문귀는 마치 몸이 없는 사람처럼 수많은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정초동의 급소를 노렸다. 날카로운 검에 옷과 살점이 베이고 핏방울이 돋았다.

“으아아아앗!”

정초동은 핏발 선 눈으로 미친 듯 막대기를 휘둘렀다. 막대기의 잔영이 열두 개, 서른 여섯 개, 백 팔 개가 되어 설문귀를 감쌌다.

퍼퍼펑!

정초동은 실 끊어진 연처럼 피를 흘리며 멀리 날아갔다. 하지만 땅에 닿자마자 다시 튕겨 일어나며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미 두 눈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얼굴은 백랍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으아아아!”

설문귀는 침착하게 정초동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정초동은 점점 빠르게 움직여서 설문귀는 결국 그의 움직임을 놓쳐버렸다. 아차 하는 순간 뒷목에 강한 타격을 느끼며 결국 설문귀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정초동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가슴을 강하게 움켜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간질에 걸린 사람처럼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저 멀리서 뛰어오는 악가촌의 사람들이 보였다. 악중산도, 백영인도, 백요홍도 정초동을 향해 힘껏 달려오고 있었다.

* * *

정초동은 번쩍 눈을 떴다. 주위는 고요했다. 시간은 저녁때인 것 같았다. 방에 난 창문에 깃든 어둠을 확인한 정초동은 침상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소지품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채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기지개를 펴 보았다. 죽을 듯이 아프긴 했지만 걸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살금살금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손을 짚고, 한 발을 걸치고, 막 나머지 발을 떼어 방에서 빠져나가려 할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정초동은 어색한 자세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눈을 돌리니 백영인이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정초동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아, 운동하고 있었습니다. 하나 둘 하나 둘......”

백영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픽 웃었고 정초동도 따라 웃었다. 그때 백요홍이 문틈으로 쪼르르 달려와 정초동에게 말했다.

“인사도 안하고 가려고 했어요?”

“아, 아니. 그게 말야.”

“나빠요. 그렇게 가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작별할 시간은 줘야죠.”

정초동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쪼그려 앉아 백요홍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저씨는 바빠서 이만 가 봐야 돼.”

“나이 든 척 하지 말아요, 오빠. 그리고 영인 언니가 줄 게 있대요.”

“으응?”

정초동은 눈을 깜박였다. 그때 백영인이 그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든 그것은 공들여 짠 밤색 머리띠였다. 밤색 머리띠. 순간 정초동은 이것이 무슨 물건인지 잊어버렸다. 자신의 이름도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백영인의 눈 안에 있는 깊고 넓은 바다와 마주한 것이다. 그녀의 눈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착각을 하며 정초동은 멍하니 서 있었다.

“저기요, 저기요?”

“으응?”

정초동은 깜짝 놀라 제정신을 차렸다. 그때 백영인이 백요홍에게 손짓을 하는 게 보였다.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몸놀림인가. 백조가 우아하게 물기를 털듯 그녀의 수화도 깔끔하고 자연스러웠다. 정초동은 수화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 수화만이 아니라 그녀에 관련된 모든 걸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안 드냐고 하는데요?”

“......응?”

“머리띠가 맘에 안 드냐구요.”

“뭐?”

다시 놀란 정초동은 그제야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백영인을 보았다. 그러자 정초동은 서둘러 대답했다.

“무, 물론 무한한 영광이지.”

그러자 백영인은 머리띠를 들고 정초동에게 다가왔다. 성숙한 여인의 체취가 정초동의 온몸을 감싸자 그는 이내 꿀 속에 빠진 개미처럼 흐물흐물해졌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천지가 방향으로 가득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정초동은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심장소리가 너무나도 가깝게 들렸다. 나의 것과 그녀의 것이 교대로 뛰고 있었다.

“다 됐어요, 아저씨.”

쿡 찌르는 느낌이 들자 정초동은 눈을 깜박였다. 어느새 백영인은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고 자신의 이마에는 머리띠가 매어져 있었다. 얼떨결에 정초동은 자신의 이마를 매만졌다. 지저분하던 머리칼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고, 고맙습니다 정말.”

그 말에 백영인은 두 눈을 깜박이다가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본 정초동의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싫어지고 이곳에 남고 싶어졌다. 삼화혼원단이고 반야초고 다 필요 없다. 이대로 이곳에 남아서 백 낭자와 아들 딸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지만 그때 백요홍이 정초동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아저씨, 괜찮아요?”

“휴! 아, 고맙다. 넌 정말 똑똑하구나. 덕분에 살았다.”

“네?”

“아, 아니. 아니야. 그럼 정말 갑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정초동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창틀로 훌쩍 몸을 날렸다.

“그럼, 안녕!”

웃음과 함께 정초동은 방에서 사라졌다. 두 여인 역시 웃음으로 그를 보냈지만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쓸쓸한 정적만이 남았다. 그때 멀리서 메아리처럼 정초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만날 때까지 말야!”

그 소리를 들은 두 여인은 서로 마주보고 빙긋 웃었다. 선잠이 든 밤까마귀가 깜짝 놀랐는지 나지막하게 울었다. 밤은 고요히 깊어갔다.


Comment ' 4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6 17:51
    No. 1

    무난하게 재밌었습니다.
    뭔가 글을 더 이어도 좋을 것 같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8 13:50
    No. 2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9 18:16
    No. 3

    저런 약 함부로 먹으면 부작용이 심할 텐데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1 01:02
    No. 4

    재밌게 잘 봤습니다. 하지만 단편제와 어울리지 않는 글이네요. 뭐랄까. 그냥 소설을 한 귀퉁이를 잘라다 놓은것 이랄까요? 느낌 상으로 출판해보신 작가님 같은데 ㅋㅅㅋ.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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