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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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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혈귀마대(墨血鬼馬隊)

작성자
익명
작성
10.03.20 23:59
조회
7,089

고려 북방의 관문인 통주의 산야.

길게 늘어진 산맥의 등허리마다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노송들이 검극처럼 박혀있다. 높고 낮음이 분명한 산정과 계곡 사이에는 낮게 깔린 안개가 바다를 이루고 있다.

모두가 잠들어있어야 할 이른 새벽.

수천 개는 족히 넘을 듯한 묵직한 북소리가 잔잔하게 잠들어있던 운무가 흔들어댔다.

두둥- 두둥-

북소리에 맞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묵빛의 철갑기마대. 그 뒤로는 무려 10만에 달하는 요(遼)의 보군이 도열해있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맞은편에서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어댔다.

콰광- 콰광-

북소리와 징소리가 한데 어울릴 즈음, 계곡의 맞은편에서 수천의 기마병이 운무를 헤집듯 달려 나왔다. 야율적렬이 금룡장도를 높이 쳐들었다.

“고려군이다. 철마대는 돌격하라.”

두두두-

거대한 무리를 이룬 두 기마대가 하얀 운무를 걷어내며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잠시 후 거칠게 격돌했다.

쿠궁-

장도와 장도가 엇갈리고, 장창과 장창이 서로를 찔렀다. 장도와 장창 사이로 순백의 안개가 난잡하게 소용돌이쳤다. 도격음과 창격음이 사방에서 뿜어졌고,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통주가 뚫리면 안북부까지 위험하다. 절대로 물러서지 마라.”

“장창병은 우회하여 적의 허리를 공격하라.”

어디에서 들려오는 명령인지도 모르겠고, 어느 편 장수의 명령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같은 편끼리 밀고 밀리다가 적이 보이면 대도를 휘두르고 장창을 찔러댈 뿐이었다.

채채챙-

“으아악.”

핏물이 솟구칠 때마다 시간은 흘렀고, 찬란한 아침햇살이 순백의 운무를 밀어냈다. 하지만, 장수들과 병졸들은 지칠 줄 모르고 창과 도를 휘둘렀다. 비명소리도 여전했고, 말울음소리도 여전했다.

그때였다.

두두두-

검붉은 갑주를 뒤집어쓴 열한 필의 말이 요군의 중앙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갔다. 말 위에는 암홍색의 찰갑에 핏빛 흉갑을 두른 장한들이 장도를 비껴들고 있었다. 특히 중앙에 선 자의 손에는 은빛 도광을 뿜어내는 창천언월도가 들려져 있었다.

그 모습에 야율적렬이 혼비백산했다.

“무, 묵혈귀마대가 나타났다.”

꺽쇠 모양의 추행진을 구축한 묵혈귀마대가 수만의 요군 사이를 무인지경으로 질주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비명소리와 붉은 핏물이 뿜어졌다. 그들의 목표는 갑주를 입은 장수들이었으며, 그들의 방향은 금룡전갑을 입고 있는 요의 황제 성종이었다.

하지만, 성종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다는 듯 허세를 부리기까지 했다.

“대총사는 무얼 하는가? 어서 저놈들을 사로잡아 내 앞에 꿇리라.”

대총사 소배압이 군례를 취해보였다.

“존명!”

그리고는 뒤에 도열해있는 정체모를 복면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대들이 나서줄 때가 왔소. 부탁하오!”

험한 전쟁터에서 갑주가 아닌 무복을 입은 자들. 대총사의 시선을 받고도 당당히 고개를 들고 있는 자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소배압에게 저토록 정중한 부탁을 받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대우가 당연한 것이라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이고는 곧바로 말 위에 올라탔다.

“저기 거란의 황제가 있다! 힘을 내라!”

창천언월도를 든 강조가 말을 박찼고, 장도가 휘둘러질 때마다 요병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그러자 갑자기 화살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궁수들이 안달이 났는지 자기편 병사들이 픽픽 쓰러지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화살 따위에 발목이 잡힐 귀마대가 아니었다. 날아오는 족족 장도를 휘둘러 여유 있게 떨어뜨렸다.

슈슈슉-

틱틱!

그런데 그때였다. 어지럽게 날아오는 화살 가운데에서 유독 강한 기운을 품은 강노의 소리가 들려왔다. 공기를 찢는 소리가 여느 화살과는 차원이 달랐다.

쌔애액-

“흡!”

깜짝 놀란 강조가 재빨리 언월도를 휘둘렀다.

탕!

그런데 언월도를 쥔 손의 충격이 상상을 초월했다.

‘헉! 설마, 무림인이…?’

눈을 부릅뜬 강조가 고개를 들어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그 순간.

쌔애액- 팟!

“끅!”

한쪽 어깨가 떨어져나가는 통증이 몰려왔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말에서 굴러 떨어졌고, 주변으로 요병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아버님!”

“형님!”

귀마대가 화살비와 요병들을 걷어내며 강조에게 몰려들었다. 그런데 또다시 강노의 소리가 들려왔다.

쌔애애애액- 파-팟!

“끄어억!”

또 한 명의 대원이 말에서 떨어졌다.

“형님!”

“숙부님!”

순식간에 발생한 두 명의 부상자. 묵혈귀마대가 조직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귀마대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치와 혁이는 아버님과 순이을 보호하라. 찬이와 규는 강노를 막아라. 나머지는 퇴로를 뚫는다.”

요병들은 계속 몰려들었고, 화살도 그치지 않았다. 이따금씩 강노도 날아왔지만, 이미 귀마대의 인식 안에 들어온 후였다.

쌔애애애액-

타-당!

강노는 어렵지 않게 튕겨졌고, 쓰러진 대원들은 말 위로 올려졌다. 나머지 묵혈귀마대가 퇴로를 뚫기 시작했다.

그러자 화살이 갑자기 뚝 그쳤다. 동시에 검은 무복을 입은 일곱 명의 무사가 요병들의 어깨와 머리를 밟아가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그들을 본 강선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헉! 무… 무림인!”

하지만 놀랄 틈도 없었다. 소리 지를 틈도 없었다. 이백여 보에 가까운 거리를 순식간에 날아와서는 곧장 검을 뿌렸기 때문이다.

까강!

제 일격은 맹호장도를 들어 간신히 막아냈지만, 한 번의 공격으로 그칠 검세가 아니었다.

까가강!

장검의 화려한 궤적이 사지를 노렸고, 그럴 때마다 강선의 몸이 움찔움찔했다. 간신히 막아내긴 했지만, 상황은 너무나도 불리했다.

전쟁터에만 맞추어 단련된 장도술. 거기에 갑주와 장도의 엄청난 무게. 무림인의 쾌검을 단마대결로 물리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이들은 보통의 무림인이 아니었다. 검극에 서린 빛무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검기!’

순간 강선은 확신했다. 살아서는 이자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음을. 그리고 결심했다. 단 한 사람의 목숨만이라도 살려 보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머지 열 명이 목숨을 버려야 할 것이다.

“원진(圓陣)! 모두 뭉쳐라!”

두 명의 대원이 더 쓰러졌다. 강조와 강순은 어느 샌가 요병들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구할만한 여력이 없었다. 지금은 단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도 힘에 부쳤다.

“지용이는 갑주를 벗고 회귀하라! 나머지는 목숨을 걸고 지용이를 사수한다.”

강지용은 강조가 말년에 얻은 늦둥이로서 이제 겨우 열여덟 살에 불과했다. 마상술과 장도술이 워낙 뛰어나 특별히 합류시키기는 했지만, 이런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기엔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다.

물론 강지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들을 사지에 버려두고 혼자서만 꽁무니를 뺄 수는 없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익!”

까강-

“저만 혼자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강선이 호되게 꾸짖었다.

“감히 항명하는가?”

말을 길게 할 틈도, 망설일 여유도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반각도 버티지 못하리라.

“중원의 무림에 피의 복수를…!”

강선의 외침에 강지용이 고개를 숙이며 군례를 올렸다. 코끝이 시큰해지고,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존명!”

그리고는 재빨리 갑주의 끈을 끊어냈다. 복면인 중 하나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강선이 앞을 막아섰다.

“네놈의 상대는 여기다!”

채채챙-

순식간에 몇 번의 검격이 이루어졌고, 강선의 온몸은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복면인의 장검이 아닌 요병들의 환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버리기로 작정한 목숨이 아니던가? 고통쯤이야 잠시 후면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아니, 이제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될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고통이니 한 번 쯤은 즐겨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크하하!”

입으로는 광소를, 눈으로는 광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불과항력이었다.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반각 이상을 버텼다는 점이다. 이 정도면 강지용은 무사히 빠져나갔으리라.

“끄어억!”

털썩!

드디어 한 사람씩 무릎을 꺾기 시작했고, 잠시 후 모든 대원들이 성종 앞에 무릎 꿇리는 신세가 되었다.

“하하하. 드디어 네 놈을 내 앞에 무릎 꿇렸구나! 포로가 되니 기분이 어떠하냐?”

강조는 성종의 말 따위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소배압의 뒤에 도열해있는 복면인들을 노려보았다.

“끄으으. 그대들은 어찌하여 우리와의 불문율을 깼는가?”

불문율.

그것은 저 옛날 고구려와 중원 무림 사이의 오랜 관행이었다.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약속.

전쟁과 사냥으로 단련된 고구려인들은 모두가 일당백의 전사들이었다. 반면 무림인들은 하나하나가 비무의 달인들이었다.

즉, 뭉치지 않은 고구려인은 무림인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무림인은 뭉친 고구려인을 당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보니 서로가 서로를 피하게 되고, 그것이 불문율이 된 것이다.

하지만 강조는 무림인들의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무시당한 성종이 길길이 날뛰었기 때문이다.

“네 이놈! 감히 짐을 능멸하는 것이냐? 여봐라! 저 놈의 수하들을 한 놈씩 끌어내라. 저 놈이 보는 앞에서 사지를 절단 낼 것이다.”

가장 먼저 끌려나온 사람은 강선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범벅으로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다.

“묻겠노라. 나의 충견이 되겠느냐? 아니면 저놈의 사지가 잘려나가는 것을 구경하겠느냐?”

강조가 강선을 바라보았다. 강선도 힘겹게 고개를 움직여 강조를 바라보았다. 두 형제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고, 그때 강선의 양쪽 입술이 씰룩 움직였다.

씨익-

강선이 웃었다. 코끝이 찡해지는 웃음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일생의 마지막이 될 웃음이었다.

강조의 눈빛이 흐려졌다.

강선은 성문을 굳건히 걸어 잠그고 농성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독하리만큼 싸움을 좋아하는 강조는 그 말을 무시했다. 묵혈귀마대를 무리하게 출전시켰고 결국 이 꼴이 되었다.

“네 말대로 공성전을 펼쳤어야 했거늘.”

그러고 보니 강조의 일평생은 독선과 독단으로 점철되어있었다. 단 한 번도 누구의 말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회나 사죄를 한 적도 없었다.

“미안하구나, 아우야!”

후회.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사죄. 너무 늦은 후회였고, 너무 늦은 사죄였다. 하지만, 그런 후회나 사죄는 한 번이면 족하리.

‘내 눈앞에서 동생의 사지가 잘려나가게 할 수는 없다. 결코!’

흔들리던 강조의 눈빛이 정연해졌다. 시선을 돌려 조카들과 자식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몸은 망신창이였지만, 눈빛은 살아있었다. 묵혈귀마대로서의 자존감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강조의 주변으로 미약한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채 한 줌도 되지 않는 마지막 진기에 생명을 담보로 한 원기까지 모조리 끌어 모은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를 악문 채 벌떡 일어나며 성종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아!”

그것을 시작으로 나머지 대원들도 사력을 다해 달려들었다. 마지막 불꽃이라도 태워보겠다는 듯 다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다. 그 악귀 같은 모습에 성종이 화들짝 놀랐다.

“으악!”

얼떨결에 마차 위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다. 그러는 사이 소배압의 뒤에 서있던 일곱 복면인이 재빨리 튀어나왔다. 이미 망신창이가 된데다 갑주조차 벗겨진 상태였기에 그들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털썩! 털썩! 털썩!

고려의 묵혈귀마대가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고려 현종 1년(서기 1010년) 겨울의 일이었다.

“형.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귀주!”

“거기는 왜?”

“아버님과 숙부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

“그게 뭔데?”

“중원 무림에 대한 피의 복수!”

“그 몸으로? 팔다리도 못 쓰는 데 어떻게?”

말을 몰아가던 강지용이 하나씩밖에 남지 않은 팔다리를 바라보았다. 말이 걸음을 놀릴 때마다 옷이 헐렁하게 출렁였다. 하지만, 슬퍼하는 기색 따위는 없었다.

“지호 네가 있잖아.”

“내가? 내게 그럴 힘이 있어?”

“없으면 만들어야지.”

“어떻게?”

“옛 정안국의 땅에 악마의 힘이 봉인되어있다고 들었어. 그 봉인을 풀 거야.”

30년 후.

“문주님, 찾았습니다!”

강지호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서적을 들추고 있던 강지용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야? 찾았어? 그게 어딘가?”

귀주에 자리 잡은 지 꼬박 30년. 그동안 요의 감시를 피해 정안국의 옛 땅 전체를 이 잡듯이 뒤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아버지 강조가 말했던 그 전설의 비고(秘庫)는 없었다. 그래서 거의 반쯤 포기할 즈음이었다.

“서경압록부에서 압수를 따라 오십여 리가량 떨어진 곳입니다.”

“그래? 어서 가보세.”

이미 늦은 오후였지만, 아침저녁을 따질 게재가 아니었다. 청려장에 의지해 벌떡 일어서서 쩔뚝이는 걸음으로 뛰쳐나갔다. 팔다리가 하나씩밖에 없는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빠르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헉! 뭐가 이렇게 넓어?”

“가로가 열다섯 보. 길이는 딱 백 보더군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강지용이 찾고 있는 것은 지하의 공간 따위가 아니었다.

“이곳에 뭐가 있다는 거지?”

강지호가 다시 소매를 잡아끌었다.

“이쪽으로.”

관심을 가질만한 게 있다면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돌침대뿐이었다. 그런데 강지호가 향한 곳은 벽이었다.

“거기에 뭐가… 응?”

관솔불을 들이대자 벽면을 빼곡히 장식한 작은 문양(文樣)들이 보였다. 사람의 움직임을 묘사한 그림들과 그것을 설명하는 글자들이었다.

“제일장. 월하검무?”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런데 한쪽 벽이 끝나는 부분에 유독 눈에 띄는 글귀가 있었다.

[월야만검을 이루는 자, 곧 세상의 위에 군림하리라.]

반대쪽 벽면에서는 익숙한 글귀도 보였다.

[제이장. 청무. 청무를 추는 자 대자연과 하나가 되리라.]

청무. 그것은 고구려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심법이었다. 하지만, 익히지 않는 심법이기도 했다. 그 성취가 너무 느려 중원의 삼류 쓰레기심법만도 못했기 때문이다.

[제삼장. 적무. 적무를 추는 자 대자연을 지배하리라.]

[제사장. 황무. 황무를 추는 자 등선에 오르리라.]

“어떻습니까? 문주님께서 찾던 게 바로 이것 아닐까요?”

강지용도 그러기를 바랐다. 하지만,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글쎄. 잘 모르겠군! 그냥 심법과 검무가 아닌가? 헌데 아버님께서는 왜 이것을 악마의 힘이라고 하셨을까?”

순간 강지호도 퍼뜩 정신이 들었다. 분명 봉인된 악마의 힘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운데의 돌침대를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힘이 봉인된 물건이 있다면 그것뿐일 테니까.

그때 강지용이 쩔뚝이며 돌침대를 향했다.

“음, 이리 해보세.”

강지호의 가슴이 덜컥했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대충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안 됩니다. 문주님께서는 혈의문을 지키셔야지요. 차라리 제가 봉인을 풀어볼 테니 문주님께서 검무와 심법을….”

하지만,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강지용이 슬픈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몸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니 내 뜻대로 하게. 이것은 문주로서의 명이야. 그리고 형으로서의 부탁이네.”

“……!”

그렇게 강지용은 돌침대를 맡았고, 강지호는 벽면을 살폈다.

“청무심법은 건너뛰고….”

관솔불을 들이대며 적무를 따라 움직여보았다.

“여기서 이렇게 하고… 다시 이렇게….”

동작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살피며 따라해 보았다. 밑에는 적무를 출 때의 마음가짐과 주의할 점들까지 자세하게 적혀있었다. 그 중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부동심을 유지하라.’와 ‘숨이 멎을 만큼 천천히 움직여라.’였다.

간단한 동작들이라서 쉽게 따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지 않다. 하지만 실패하면 또 일어서는 식으로 계속해서 반복했다. 그렇게 반나절 정도가 지나자 비로소 한 번의 완벽한 적무를 펼칠 수 있었다. 그런데.

‘끄억!’

적무의 마지막 동작을 마치는 순간 갑자기 숨이 탁 막혀왔다. 숨만 막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랫배가 새까맣게 타버릴 듯 뜨겁게 달구어졌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라도 삼킨 듯했다.

‘으윽! 왜… 이러는… 거지?’

이를 악물고 참아보았다. 하지만,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고, 온몸이 굳어지며 뒤틀리기까지 했다.

‘서, 설마 주화입마?’

그리고 잠시 후 정신을 잃었다.

강지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정확히 보름 만이었다. 천정이며, 벽이며, 집기들이 눈에 익은 것이 분명 자신의 방이었다.

“정신이 드는가?”

문주 강지용이었다.

“웨에.”

분명 ‘예!’라고 대답했는데 엉뚱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강지용이 고개를 푹 숙이며 사죄했다.

“미안하네. 내 불찰일세. 바로 그 적무가 봉인된 힘이었어. 내가 자네를 이 꼴로 만든 거야.”

‘아닙니다, 형님. 전 괜찮습니다.’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말을 듣지 않았다.

“우웨이어 허이….”

그날 이후 강지용은 비고에서 살다시피 하며 봉인의 열쇄를 찾았다.

그리고 다시 50년 후.

“한 가지만 약속해주신다면 문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혈의문 문주실에 두 사람이 앉아있다. 백발이 성성한 문주 강숙이 중년인을 향해 물었다.

“무엇인가?”

“제가 마지막이어야 합니다.”

“음….”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조부 강지용의 유지를 자신의 손에서 끊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다. 더 이상 비고에 들어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고가 발견된 지 54년.

봉인의 열쇄는 밝혀졌다. 무시 받고 천대 당하던 청무심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봉인이 풀린 적은 단 번도 없었다. 그저 21명이 헛되이 죽고 29명이 병신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것만 약속해주신다면 비고에 들어가겠습니다.”

중년인의 이름은 강신. 그가 스스로 비고로 들어가겠다고 나선 것은 문주의 아들이자 5촌 조카인 강민석 때문이었다. 문주가 답답한 마음에 자신의 아들을 비고에 넣으려 했던 것이다.

청무심법조차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그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가 어찌 성공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는 소문주가 아니던가?

고민을 마친 문주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네.”

확언을 받은 강신은 다음날 아침에 바로 비고를 향했다.

환갑을 넘은 노모와 청춘을 잃은 아내. 이제 막 청운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는 세 아들과 한창 꽃봉오리 같은 두 딸.

눈에 밟히는 것은 많았지만, 비고에 드는 순간 다 잊어야 했다. 일체의 잡념의 비워야 했다. 그것만이 자신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고, 혈의문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일 테니까.

서두를 필요도 없으리라. 무려 54년간의 기다림. 며칠 더 기다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을 테니까.

월하검무.

40평생을 사는 동안 지겹도록 익혔지만, 혹시라도 놓친 것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가며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했다.

“선풍낙화.”

검을 대각으로 교차해 그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때론 길게, 때론 짧게, 때론 빠르게, 때론 무겁게.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도 그 형세와 기세가 끝없이 변화했다. 그럴 때마다 주변으로 미약한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앞으로 뿜어졌다.

“빙령수류.”

부드럽게 움직이던 신형이 송곳처럼 찔러 들어갔다. 검극이 비틀어지는 것이 마치 바위틈을 비집는 물길 같았다.

벌써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강신은 조금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마음을 단속하여 일체의 잡념도 허락하지 않았다. 오로지 월하검무에만 매진했다.

“설화진혼.”

그것은 순결한 여인의 아름다운 춤사위였다. 영혼이라도 얼려버릴 것만 같은 순백의 움직임. 하지만 단순한 눈속임이었을까? 넋을 빼앗을 듯 아름다웠던 춤사위가 순식간에 광풍처럼 맹렬한 기세로 쏘아졌다.

“휴우, 월야만검의 극의는 요원하기만 하구나.”

모든 동작들을 완벽히 구사한다고 자신했지만, 그 구결만큼은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하긴, 수십 년간 수백의 문도들이 풀지 못한 것을 겨우 며칠 만에 풀어낼 수는 없겠지.

“이제 적무의 봉인을 풀어볼까?”

악마의 힘이 봉인되어있다는 적무. 죽음의 춤. 막상 대하려니 가슴이 자꾸만 두근거렸다.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것은 잡념이었고, 호기심이었고, 두려움이었다. 심마가 찾아온 것이다.

‘안 돼! 흔들려서는 안 된다.’

기다렸다. 잡념이 사라질 때까지, 호기심이 누그러질 때까지, 두려움이 극복될 때까지 기다렸다. 단 한 번의 시도로 성공을 거두어야 했다. 그리고 한 시진 후. 강신의 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숨이 멎을 정도로 아주 천천히.

끊어질 듯 이어지는 춤사위. 악마의 춤사위라고 불리기엔 너무나도 부드러웠고, 죽음의 춤사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런데 한 번의 적무를 모두 완성했을 때였다.

‘흡!’

단전이 폭발하는 듯했다.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뜨거움. 게다가 그 열기는 차츰 확산되었고,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져갔다.

‘올 게 왔군, 주화입마!’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었다.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간신히 돌침대에 누었다. 하지만, 몸은 시뻘겋게 달구어진 쇳덩이처럼 계속 뜨거워졌다.

‘나도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었다. 막상 일이 닥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정신을 잃었다.

- 어서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어머니가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 위에는 붉은 하늘, 붉은 하늘 위에는 그보다 더 붉은 태양이 천지를 삼켜버릴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 너무 뜨거워요. 타죽을 것 같아요.

- 어디서 엄살이냐? 사조님의 뜻을 벌써 잊은 것이냐? 어서 일어나라.

추상같은 목소리. 거부할 수가 없다. 온몸을 태워버릴 것 같은 뜨거운 열기를 견뎌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어머니가 확 밀어버렸다.

- 헉!

갑자기 얼음이 쫙 갈라지며 물속으로 빠졌다. 그러자 열사의 사막은 순식간에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얼음호수로 변해있었다. 엄청난 한기에 온 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 너무… 너무 추워요. 구해주세요.

- 어리석은 놈. 부동심을 잊었느냐? 더위도 추위도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하여라.

- 너무 추워요. 죽을 것 같아요. 구해주세요.

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고통. 얼어붙은 몸이 조각조각 깨지는 통증. 차라리 아까의 그 열기가 낳을 듯했다. 구원의 눈빛으로 어머니께 손을 내밀었다.

- 제발… 구해주세요.

어머니가 손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얼음구덩이 밖으로 번쩍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사방은 다시 열사의 사막으로 뒤바뀌었다. 순식간의 변화.

- 헉! 너무… 뜨거워요.

이글이글 타오르는 사막. 온 몸이 함께 불살라질 것 같았다. 다시 아까의 그 얼음구덩이가 그리워졌다. 차라리 온 몸이 조각조각 깨지고 갈라지는 게 덜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그렇게 계속해서 얼음구덩이와 열사의 사막을 왕복했다. 몇 번인지도 모를 만큼 뜨거움과 차가움을 번갈아가며 겪어야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코끝을 스치는 잔잔한 바람이 느껴졌다. 고요한 숨소리도 들려왔다. 감겨진 눈꺼풀을 살그머니 들어 올리자 사각의 지하공간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휴우.”

가슴 가득한 분진들을 뿜어내듯 한숨을 내쉬었다. 입가에 고여 있던 땀방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얼굴로 떨어졌다. 손을 들어 얼굴을 훑어 내렸다. 질퍽한 땀방울들이 홍수가 되어 쓸려 내려갔다.

“어떻게 된 거지?”

너무나도 생생했다. 하지만, 막상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든 것이 제자리였다. 죽거나 병신이 되지도 않았고, 봉인된 악마의 힘을 얻지도 못했다. 다만 한 가지 변한 게 있다면,

“개운하군.”

개운해도 너무 개운했다. 새털만큼이나 가벼웠다. 손을 몇 번 파닥이면 당장이라도 하늘로 솟구칠 것 같았다.

“적무의 봉인은 풀린 것인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무엇이 봉인이고, 무엇이 악마의 힘이란 말인가? 선행자가 없다보니 찾아가서 물어볼 수도 없는 일. 그러다 문득 꿈을 떠올렸다. 지독한 열기와 극심한 한기를 번갈아가며 느꼈던 꿈.

강신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돌침대를 바라보는 것이다. 어둠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돌덩어리. 수십 년간 그 누구도 비밀을 풀지 못한 의문의 물건.

“이게 도대체 무슨 돌이야?”

하지만, 그 의문의 돌덩어리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만 있을 뿐이었다.

“휴, 도무지 모르겠군!”

하지만, 이대로 비고를 떠날 수는 없었다. 적무를 한 번 추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이룬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청무심법을 떠올렸다.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백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청무심법. 하물며 그보다 한 단계 위인 적무겠는가?

“그래, 한 번 가지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겠지. 이왕 이렇게 된 것 한 번 더 해보자. 두 번째는 더 쉽겠지.”

다시 비고의 중앙에 섰다. 강신의 신형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3년 후.

“문주님! 문주님! 나와 보십시오.”

“웬 소란이냐?”

문주가 허연 수염을 휘날리며 밖으로 나섰다. 호들갑의 주인공은 문주만큼이나 노구의 몸을 하고 있는 동생 강빈이었다.

“신이에요. 신이. 신이가 돌아오고 있어요.”

“신이가 누구… 잉? 신이가?”

문주의 입이 쩍 벌어졌다. 워낙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인지라 잠시 헛갈렸지만, 분명 3년 전 비고에 들어갔던 그 강신을 말하는 것이리라.

“어디냐? 어서 가보자.”

문주가 서둘러 말을 몰았다. 그 뒤로 백여 명의 문도들이 줄지어 뛰어갔다.

“신이야!”

“문주님!”

강신이 말에서 뛰어내려 땅바닥에 머리를 찧듯 큰절을 올렸다. 문주가 얼른 일으켜 세웠다.

“어찌 된 것이냐? 적무의 봉인을 푼 것이냐?”

강신이 고개를 들자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는 문주의 두 눈이 보였다. 그 눈빛에는 지난 수십 년간의 인내가 담겨있었다. 수십 명에 달하는 문도들의 희생이 담겨있었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놓지 못했던 사조의 꿈이 담겨있었다. 강신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예. 풀었습니다.”

강신이 적무의 봉인을 풀고 난 후 십년 동안 그 봉인은 두 번이나 더 풀렸다. 그러는 사이 서른 명이 넘게 죽거나 병신이 되었지만, 도전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활기 넘치던 혈의문이 갑자기 숙연해졌다.

“신아, 네게 너무 큰 짐을 지우고 가는구나!”

문주직에서 물러난 강숙이 강신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에 가까웠는지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강신이 그 손을 힘 있게 잡아주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태상문주님께 입은 은혜가 하늘을 뒤덮습니다.”

“부디 사조님의 꿈을 잊지 말아주게. 묵혈귀마대의 원한을 갚아주게.”

“반드시 그리 할 것입니다.”

강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대답하였고, 그 목소리를 확인한 강숙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는 힘없이 손을 떨어뜨렸다.

고려 예종 6년(서기 1110년) 가을의 일이었다.

그해 겨울. 열한 명의 무사들이 요하를 건넜다.

두두두-

백마에 흑마, 점성마 등 타고 달리는 말은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의 복색은 한결같았다. 검붉은 핏빛의 무복. 마치 살귀나 혈귀의 무리라도 되는 듯했다.

요택을 지나 의무려산에 들자 눈이 어지러울 정도의 빼어난 경관이 나타났다. 하지만, 열한 명의 무사들은 오직 앞만 보고 달렸다.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바로 모용세가였다.

그 시각 모용세가는 잔치분위기였다. 요의 황제 성종으로부터 영세존의 증표를 하사받은 지 꼭 백 년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 오늘은 무림동도들에게 경사스러운 날이오. -

모용황의 천리전성이 멀리까지 메아리치듯 뻗어나갔다. 모용황이 탁자 위의 둥그런 패를 들어올렸다.

- 이 영세존의 증표가 하사된 날이기 때문이오. 이 패가 변하지 않는 이상 무림의 평화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오. 자, 모두 함께 축배를 드십시다. -

직접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와 동시에 모용세가의 마당을 가득 메운 천여 명의 하례객들도 각자의 잔을 비워댔다. 그런데 그때였다.

쌔애액 -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한 대의 강노가 모용황을 향하여 날아왔다.

“흡!”

허리를 젖혀 피하자 강노가 스치듯 지나쳤다. 대신 영세각의 문설주에 깊이 박혔다.

탕! 부르르-

어찌나 깊이 파고들었는지, 깃털의 끝부분만 겨우 남았다. 거기에는 작은 쪽지 하나가 묶여있었다. 모용황이 먼 곳을 노려보는 사이 대총사가 쪽지를 풀어 빠르게 훑어보았다.

“흡!”

대총사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모용황이 웬 호들갑이냐는 듯 눈알을 부라리고는 낚아채듯 빼앗은 쪽지를 펼쳤다.

[모용황의 목을 가지러 왔다. 일각의 시간을 줄 것이니 무릎을 꿇고 영접하라! 혈의문 묵혈귀마대주 강신.]

모용황이 쪽지를 읽어 내리는 사이 장내가 술렁였다. 감히 누가 있어 천하제일세가라 불리는 모용세가의 문설주에 화살을 꽂는단 말인가? 하지만, 무사들이 술렁이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째서 범인을 잡지 않으시는 것이지?”

“그러게. 뇌전신검님이라면 당장에 목덜미를 낚아챌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모용황은 그러지 않고 있었다. 아니, 못하고 있었다. 강노가 날아온 방향에 아무런 기척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대가 모용황의 오감을 피할 정도의 고수라던가, 아니면 오백 보 밖에서 강노를 날렸다는 이야기였다.

‘예사 놈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단전에 내력이 모아졌다. 강한 적을 앞둔 호승심의 발로였다. 하지만, 모용황이 미처 인식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대총사가 인식시켜주었다. 그것도 떨리는 목소리로.

“무, 묵혈… 귀마대!”

제법 섬뜩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모용황이 누구인가? 그 이름 석 자면 무림 전체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자가 없으리라. 그런 자에게 그깟 혈이니 귀니 하는 허황된 이름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영세존의 증표에 얽힌 내막 말입니다.”

그제야 모용황도 기억이 났다. 열한 명으로 구성된 무적의 기마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요는 모용세가를 끌어들였다. 그 대가로 얻어진 것이 바로 영세존의 증표였던 것이다.

“아, 강조!”

그런데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무려 백 년 전에 사라진 이름이 왜 갑자기 나타났느냐 말이다. 하지만, 마냥 고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천여 명에 달하는 하례객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웅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 모용세가의 위신이 떨어질 수도 있는 일. 모용황이 쪽지를 번쩍 들어 올리며 하례객을 향해 몸을 돌렸다.

- 무림 동도 여러분! 이 쪽지가 무엇인줄 아시오? -

소란이 삽시간에 진정되었다. 모용황의 두 눈이 좌중을 천천히 훑었다.

- 나에 대한 도전장이오! -

“도… 도전장!”

잠깐 조용해졌던 장내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모두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했다.

- 정확히 일각 후에 이곳으로 직접 찾아온다 하였소. 나는 그의 도전을 받아줄 것이오. 하여 영세존의 백주년을 영원히 기념할 것이오. -

소란을 압도하고도 남을 엄청난 위력의 천리전성이었다. 그리고 하례객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만세를 외쳤다.

“우와, 뇌전신검님의 비무를 직접 목도할 수 있다는 거야? 이야말로 가문의 영광일세.”

“어쩐지 꿈속에서 돼지가 엽전을 잔뜩 물고 있더라니.”

그리고 정확히 일각 후.

활짝 열려진 모용세가의 대문으로 핏빛 무복을 입은 열한 명의 무사들이 위풍당당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따각. 따각. 따각.

말발굽소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이 입은 핏빛 무복 때문이었을까? 천여 명의 하례객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군중지로였다.

영세각 앞에는 어느새 하례객의 담으로 이루어진 둥근 비무장이 만들어졌고, 그 한가운데에는 혈의문의 묵혈귀마대가 서있었다.

- 그대는 누구인가? -

모용황의 천리전성. 그것은 천리전성이라기보다는 사자후에 가까웠다. 그 엄청난 위력에 가까운 곳의 하례객들이 귀를 막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비무장 한가운데에 선 귀마대원들은 석상처럼 단단하기만 했다.

“혈의문의 묵혈귀마대주 강신.”

무미건조할 만큼 짧고 간결한 대답. 게기에 굳은 표정과 이글거리는 눈빛, 그리고 핏빛 무복. 인세에 사신(死神)이 있다면 바로 저 모습이리라. 하지만, 강호의 지존으로 군림하고 있는 모용황의 눈에는 그저 하룻강아지일 뿐이었다.

- 도전을 받아주겠노라. 허나 그 대가는 목숨이 될 것이다. -

그러자 강신의 한쪽 입술이 씰룩였다.

“훗, 목숨이라! 그것이 누구의 목숨이 될 지 참으로 궁금하군!”

짧게 말을 마친 강신이 장검을 뽑아들었다. 오랜 시간 참았다는 듯 청명한 검명이 토해졌다.

샤르릉-

모용황의 부드럽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와 동시에 주변으로 엄청난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과연 세외십존의 첫째라는 칭호를 받을만했다.

하지만, 강신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다만, 모용황을 맞을 준비를 시작했고, 나머지 열 명의 귀마대원은 바깥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모용황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모든 이들이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천리전성을 날렸다.

- 네 놈을 베어 무림 천년에 평화가 올 수 있다면 무엇을 망설이겠느냐? 부디 원한 따위는 남기지 말고 영면(永眠)하라. -

모용황이 영세각을 박차 올랐고, 강신도 지지 않겠다는 듯 몸을 튕겼다. 모용황이 한 마리 우아한 학이라면, 강신의 몸짓은 그 학을 향한 화살이었다.

화려한 초식 따위는 없었다. 마치 비무에 앞선 검례라도 취하듯 대각으로 교차하며 정직한 검격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기운은 범인의 상상을 초월했다.

콰광-

검과 검이 부딪혀서 낸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폭발음. 검격의 일점(一點)에서 은빛의 검기가 파편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검례는 끝났다. 상대방의 실력에 대한 가늠도 끝났다. 서로가 만만히 볼 상대도, 무턱대고 두려워해야 할 상대도 아님을 알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일은 딱 하나뿐이었다.

자신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것. 일순간 떨어졌다 싶은 두 사람이 맹렬한 기세를 품고 다시 한 점을 향했다.

투카캉- 까강-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패도적인 검술. 모용황은 뇌전신검이라는 별호답게 쾌검으로 요혈을 찔렀고, 강신은 창술을 응용한 창궁비연검으로 모용황의 빈틈을 노렸다. 서로가 수비보다는 공격에 치중하다보니 매순간이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강신의 옆구리가 노출되자 기다렸다는 듯 뇌정일섬의 초식으로 재빨리 찔러 들어갔다.

“우옷!”

하지만, 그것은 강신의 노림수. 모용황의 패도적인 검법을 간파하고 일부러 허점을 보인 것이었다.

‘바람을 이기는 것은 굵은 노송이 아니라 연약한 풀잎이리라. 반검일섬!’

강신의 기세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패도적인 기운을 버리고 섬세한 검술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낚싯줄 사이로 거대한 물고기와 힘겨루기 하듯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카라라랑-

“흡!”

순간 모용황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강신의 검극에 옷깃이 살짝 찢어졌기 때문이다. 반촌만 더 깊었다면 적지 않은 생채기를 입었으리라.

하지만, 모용황이 누구던가? 검과 한 몸이 된 후 반백 년 동안 수백 번의 비무를 거친 노고수였다. 게다가 그 상대는 모두가 당대 최고의 검객들. 이제 갓 무림에 나선 강신의 노림수 따위가 통할 리는 없었다.

‘나를 상대로 사냥놀이를 하시겠다고? 흥! 참광난분의 변초나 감상해 보시지!’

모용황의 검극이 갑자기 기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검이 두 개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다시 네 개가 되었다. 그것을 본 모용황의 동생 모용걸이 한쪽 입술을 씰룩였다.

‘훗, 분광검이라! 형님께서 제법 큰 수를 보여주시는 군! 이놈, 견뎌낼 수 있겠느냐?’

모용황의 검은 어느새 여덟 개가 되어 강신의 사지를 찔러댔다. 머리와 몸통, 팔다리를 동시 노리는 것이다. 머리를 방어하다가는 몸통과 사지가 절단날 것이고, 몸통을 방어하다가는 목이 잘리리라.

하지만 강신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빛이 차가워졌다.

‘분명 일곱은 허상이다. 저 중 하나만이 진검이다. 그것만 찾으면 된다.’

연신 뒷걸음질 치며 검을 흔들어 모용황의 여덟 가닥 검을 모두 쳐냈다. 그런데,

카라라랑-

‘헉, 이럴 수가.’

신기하게도 여덟 자루의 검 모두가 진검이었다. 단 하나의 허상도 없었다. 차가웠던 강신의 표정에 처음으로 당혹감으로 떠올랐다. 반면 모용황의 표정은 득의만만해졌다.

‘후훗, 세외십존이라는 이름이 그리 가벼운 줄 알았더냐?’

사실 모용황의 분광검은 여덟 개의 검 모두가 허상이기도 했고, 진검이기도 했다. 상대의 공수에 따라 진검이 되기도, 허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용황이 직접 창안한 참광난분의 변초였다.

“우웃!”

강신이 연신 뒷걸음질 쳤다. 아무리 내력을 끌어올려도 여덟 개의 검로를 모두 잡아낼 수 없었다.

‘젠장 결국 이 방법밖에 없단 말인가? 빙령수류!’

뒷걸음질 치던 강신이 갑자기 땅을 박차며 모용황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죽을 자리가 바로 살 자리라는 식이었다. 강신의 장검이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처럼 힘차게 요동치며 모용황의 심장을 향해 거칠게 쏘아졌다.

‘헉! 이대도강!’

소스라치게 놀란 모용황이 검을 회수하며 재빨리 뒤로 도약했다. 순식간에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선 것이다. 그제야 강신도 한숨을 돌리겠다는 듯 자세를 갈무리했다.

‘저 애송이가 참광난분의 파훼법을 찾아낸 것인가?’

사실 모용황의 참광난분을 깰 계책은 이대도강뿐이었다. 즉,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것으로서 극쾌의 가벼움을 중검의 무거움으로 제압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용황을 제압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아직 감추어둔 수가 많이 남아있었으니까.

모용황의 신형이 다시 움직였다. 장검도 대각을 교차하며 빠르게 흔들렸다. 주변으로는 검의 흐름에 따라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동생 모용걸이 기겁을 했다.

‘헉! 형님께서 설마… 비영탄검을….’

역시 극강의 쾌검이었다. 하지만, 참광난분과는 그 궤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극강의 쾌를 오직 한 가닥의 검로에 담아 기세를 극대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 함부로 유출해서는 안 될 모용세가의 비기(秘技)이기도 했다.

챠르르르-

수십 번의 검격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 마치 두 검이 하나로 붙어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강신이 그리 허무하게 밀리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비영탄검의 검로를 제법 읽고 있는 것이었다.

모용황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제길, 이런 촌뜨기가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다시 시작된 일진일퇴의 공방전. 지켜보는 모용걸이 주먹을 꼭 쥐었다.

‘형님!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모용세가의 이름을 지켜주세요.’

그때였다. 화려한 호선을 만들어내던 모용황의 검로가 순식간에 급변하였다. 그것을 본 모용걸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헉! 어째서… 뇌전표풍검을…?’

그것은 모용황에게 뇌전신검이라는 별호를 안겨준 검법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모용씨가 천하 위에 군림할 수 있게 한 밑거름이기도 했다.

무려 칠백 년 전, 단석괴(檀石槐)가 후한과 고구려를 누르고 북방을 호령한 것이 바로 뇌전검 덕이었다. 그리고 모용외, 모용수 등이 전연, 후연, 서연 등을 건국하며 하북을 평정한 것도 뇌전검 덕이었다.

즉, 그것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어서는 안 될 세가의 비전(秘傳) 중에 비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판세가 갑자기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모용황의 검은 당장이라도 강신의 몸통을 꿰뚫을 듯했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강신은 연신 뒷걸음질 쳤다.

“모용대협의 승리다.”

“역시 뇌전신검이시다.”

하례객들이 승리를 낙관하며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그의 동생 모용걸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정작 모용황은 그렇지 못했다. 아니, 한 걸음씩 전진 할 때마다 표정이 차츰 일그러졌다. 반면 뒷걸음질 치고 있는 강신의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흥분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모용황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뇌전표풍검을 펼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우려했던 일이 점차 사실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나를 상대로… 검법수련을…?’

“이이익!”

모용황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는 단 한 줌의 내력도 남기지 않고 모두 끌어냈다. 내력은 고스란히 검에 담겨졌고, 뇌전표풍검에서는 은빛 깃털 같은 검기가 사정없이 뿌려졌다.

“크아아.”

팡. 팡. 팡. 파파팟-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검기의 충돌이 이루어졌고, 대지를 뒤흔들만한 폭음이 연이어 뿜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용황은 조급해졌고, 강신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제야 모용걸도 상황을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세가비전까지 사용하면서 왜 저렇게 늑장을 부리나 싶었는데, 이제 봤더니 전력을 다하고도 상대를 누르지 못하는 것이다.

‘안 돼. 이대로 무너져서는 안 돼. 그렇다면 우리 모용세가는 끝이다.’

순간 모용걸의 오른손이 검병으로 행했다. 동시에 화려한 발검이 이루어졌으며, 신형은 비무장으로 날아들었다. 조금 치사한 방법이긴 했지만, 세가의 존립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샤르릉-

“네 놈의 상대는 여기 있다.”

묵혈귀마대의 부대주 강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또 한 명의 세외십존인 모용걸을 진즉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비로소 기회를 잡은 것이다.

까강-

모용걸과 강혁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그런데,

“우욱!”

모용걸의 실력이 생각 외로 강했다. 아니, 그보다는 강혁의 실력이 깊지 못한 것이겠지. 비록 가장 연장자이기는 했지만, 적무의 봉인을 푼 것은 가장 늦었으니까.

실전경험도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전력을 모두 끌어낸 모용걸과 달리 겨우 육성의 내력만을 끌어올린 채 무작정 뛰어든 것이었다. 그러니 수세에 몰릴 수밖에.

까가가강-

한 번 기세가 꺾이자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열세에 밀렸다. 순식간에 이십여 보를 주르륵 밀리며 하례객들이 둘러선 곳까지 쫓겼다. 깜작 놀란 하례객들이 황급히 물러섰고,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봐! 그건 내 발이라고!”

“으악! 밀지마!”

하지만, 뒷걸음질 치고 있는 강혁이나 밀어붙이고 있는 모용걸이나 그런 것들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강혁은 자신의 목숨이, 모용걸은 형 모용황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니까.

“이익!”

다급해진 강혁이 별수 없이 뇌려타곤을 취했다. 땅바닥을 마구 뒹굴어 위기를 모면하기. 즉, 체면을 버리고 목숨을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보고 있을 모용걸이 아니었다.

“어딜 도망가느냐?”

투탕탕-

모용걸이 틈을 주지 않고 뒤쫓았고, 강혁은 금방이라도 가슴이 꿰뚫릴 듯 처지가 위태로웠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강신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와줘야 하나? 혼자 극복하게 놔두어야 하나?’

사실 강혁의 깨우침이 늦고, 검술도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수에게 있어서 그 차이란 매우 미미한 것. 그 간격을 메우는 것은 아주 사소한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가장 빨리 얻는 방법은 생사대적과의 목숨을 건 대결이리라.

그것은 강신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진즉에 싸움을 마무리 지었으리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은 깨달음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월야만검!

모용황이라는 강적을 앞에 두자, 그 극의가 한 발 앞으로 다가온 느낌이 든 것이다.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가면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조금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오래 끌면서 기어이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우욱!”

강혁의 짧은 비명소리였다. 게다가 모용황이 뭔가를 깨우쳤는지 검세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강신의 욕심이 오히려 모용황에게 기회를 준 셈이 된 것이다.

‘안 되겠다. 빨리 끝내고 저 놈을… 응?’

드디어 전력을 뿜어내려는 순간 귀마대원 중 하나가 비무장으로 뛰어들었다. 적무를 깨우친 또 다른 한 명, 강세종이었다. 내력의 깊이는 얕았지만, 타고난 싸움꾼으로써 검술만큼은 쓸 만한 자였다.

“부대주님. 제게 맡기십시오.”

가슴에 깊은 검상을 입은 강혁이 몸을 굴리며 빠져나왔고, 강세종이 모용걸의 검을 막았다. 제법 호각지세를 이루는 것이 한동안 시간을 벌 수는 있을 듯했다.

‘되었군. 그렇다면 이놈에게서 뽑을 수 있는 건 죄다 뽑아야겠다.’

그때였다.

“크아아-”

모용황의 괴성이었다. 무림을 벌벌 떨게 한 뇌전신검이라는 별호나, 모용세가의 가주라는 위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체면이니 위치니 하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오직 검만을 쥐고 있는 것이다. 즉, 그가 평소에 ‘이루었노라!’ 외쳤던 완벽한 심검합일을 비로소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챠라라라랑-

‘우웃, 좋아!’

모용황의 검세가 사나워질수록 강신은 즐거웠다. 그것은 호승심. 무사로서의 본능이리라.

“우아아-”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검극에는 시퍼런 검기가 세 치 이상 길게 서려있었고, 강신의 검과 부딪칠 때마다 검기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우호호, 좋아! 더 날뛰어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분. 그것은 기쁨이었고, 흥분이었으며, 쾌락이었다. 온 몸의 솜털 하나하나가 모두 다 곤두서는 느낌. 동공은 활짝 열렸고, 주변의 사물은 마치 멈춘 듯 천천히 움직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뭔가 알 것 같아!’

그런데 그때였다.

“크아악!”

마지막 힘을 짜낸 듯한 엄청난 일격. 그리고는 갑자기 무릎을 꺾었다.

털썩!

강신의 눈이 동그래졌다.

‘헉! 뭐… 뭐냐?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정말이었다. 그저 방어만 했을 뿐 모용황을 향해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혼자서 날뛰다가 스스로 무릎을 꺾은 것이다.

하긴, 비무가 시작된 지 벌써 두 시진. 그것도 있는 진기 없는 내력 다 끌어낸 최선을 다한 공격이었다. 아무리 절대고수라 하더라도 탈진하는 게 당연한 일이리라.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가주님께서 위험하시다. 모두 검을 뽑아라!”

챠라라랑-

맑아야 할 검명이 천둥이라도 치는 듯 요란하게 들렸다. 무려 삼백여 명에 달하는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든 것이다.

“이런 제길!”

아무리 복수가 중요하다고 해도, 이 많은 사람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는 일. 하지만, 넋 놓고 지켜만 볼 수도, 그렇다고 도망을 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탈진한 모용황의 혈도를 찍고, 모용걸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 둘만 제압하고 나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 것 같았다.

“세종은 대원들과 원진을 이루라.”

강신이 모용걸을 상대하는 사이 귀마대가 둥글게 모였다.

이 순간을 위해 무려 백년을 준비했다. 걸음마를 시작한 그 순간부터 오직 중원 무림을 향한 피의 복수만을 생각하며 검을 갈고 닦았다.

그래서일까?

요란하게 들려오는 검격음 사이로 비명이 뿌려질 때마다 땅바닥을 나뒹구는 자들은 모용세가의 무사들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뇌전신검님과 폭풍신검님을 도와드립시다.”

“모용세가를 구합시다.”

“더러운 사파 놈들을 몰아냅시다.”

천여 명이나 되는 하례객들이 들고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의외의 상황이 하나 더 있었다.

‘이놈 뭐야? 어떻게 가주보다도 더 센 거야?’

비교적 쉽게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던 모용걸이 의외로 강자였던 것이다. 그 검술이나 내력이 오히려 모용황을 능가했다.

‘하는 수 없군! 선풍낙화!’

기어이 십성의 내력을 모두 끌어올렸다. 모용세가에 들어온 후로 처음으로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순간 주변으로 옷깃을 흩날릴 정도의 바람이 일었고, 검극에는 짙푸른 검기가 길게 뿜어졌다.

꾸궁-

“우욱!”

모용걸이 얼굴을 찌푸리며 깊은 신음소리를 내뿜었다. 엄청난 충격에 다리가 휘청거렸고, 검병을 쥔 손아귀가 부르르 떨렸다. 그 틈을 노칠 강신이 아니었다.

‘빙령수류!’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공격. 하지만, 그 끝은 바위를 비집는 물길처럼 사정없이 흔들렸다. 모용걸이 사력을 다해 검막을 펼쳤다.

꾸르르-

하지만, 기세가 떨어진 검막은 빙령수류를 온전히 막아내지 못했고, 강신의 검은 결국 모용걸의 가슴을 꿰뚫었다.

“끄어억!”

모용세가의 감추어진 거룡, 모용걸. 일인자의 실력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형을 위해 고개를 숙였던 그가 드디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무릎은 이제 두 번 다시 펴지지 않으리라.

하지만, 강신은 늑장을 부릴 여유가 없었다. 무려 천삼백 명의 적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재빨리 원진 안으로 몸을 날리며 크게 외쳤다.

“단청(斷聽)!”

그것은 일종의 암호였다. 강신의 외침과 동시에 묵혈귀마대가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며 내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는 사이 강신의 입에서 공간을 찢어발기는 듯한 사자후가 길게 뿜어졌다.

= 크아아- =

엄청난 소리의 진동. 그것은 마치 거대한 해일이라도 되듯 사방으로 뿜어졌고, 주변으로 달려들던 수백의 무사들이 병장기를 떨어뜨리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컥! 귀… 귀가….”

“끄아악!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묵혈귀마대와 근접전을 펼치던 몇몇은 그 자리에서 절명하기도 했다.

사자후가 끝나자 장내는 일순간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례객이나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물론이고 소가주인 모용창휘 조차도 섣불리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추스르며 두려운 눈빛으로 강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충격이 적지 않은 것은 강신도 마찬가지였다. 사자후는 순간적으로 엄청난 내력을 소모해야 하는 것. 단전이 일순간에 텅텅 비어버려 다리가 다 휘청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저 많은 이들이 다시 들고 일어설 것이다. 허리를 당당하게 곧추세우고 온 힘을 다하여 대자연의 기운을 끌어 모았다.

- 무림동도 여러분! -

제법 묵직한 천리전성이  좌중을 압도하듯 뿌려졌다. 무리를 하면서까지 내뿜은 천리전성이었기에 그 위력이 사자후에 가까웠다. 하례객들과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몸을 움츠리는 사이 강신의 신형은 어느새 영세각 위에 올라있었다.

- 이 일은 우리 혈의문과 모용세가와의 오래된 숙원! 다른 문파와 새로운 은원을 만들고 싶지 않으니 더 이상 관여치 마시오. -

그러자 누군가가 겁도 없이 따져 물었다.

“그 숙원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피를 보이는 것이오?”

순간 강신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스쳤다. 그렇지 않아도 말해주고 싶었다. 혈의문의 꿈. 그것도 무려 백 년 동안이나 꾸었던 꿈. 강신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 나의 증조부님께서 전쟁 중에 무림인의 습격을 받아 돌아가셨소. 또한 나의 선조들이신 고려의 묵혈귀마대도 요와의 전쟁 중에 무림인의 습격으로 전멸하셨소. 그 무림인이 바로 모용세가요. 오늘 그 숙원을 갚은 것이오. -

“그럴 리가 없소. 중원 무림이 북방의 전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랜 불문율.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다들 쑥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 무림과 북방 사이의 불문율을 모르는 자는 없었으니까. 그러자 강신이 영세각의 탁자 위에 놓인 영세존의 증표를 집어 들었다.

- 이것은 요의 황제 성종이 모용세가의 영세존을 보장하는 증패. 그 조건이 바로 우리 증조부님과 묵혈귀마대의 암살이었소. -

“헉! 그… 그럴 수가….”

다들 입을 떡 벌렸다. 질문을 하던 자 역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잠잠했다. 잠시간의 정적이 이어졌고, 그 정적 위로 강신의 천리전성이 다시 한 번 뿌려졌다.

- 누구든지 이 복수를 막는 자가 있다면 묵혈귀마대의 이름으로, 혈의문의 이름으로, 그리고 고려인의 이름으로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오. -

강신의 말이 끝났지만,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강신의 검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 검이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 모용황의 목에서 붉은 핏물이 뿜어졌다.

고려 예종 6년(서기 1110년) 겨울. 즉, 강조가 죽은 지 정확히 백 년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Comment ' 22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11:10
    No. 1

    묵빛의 철갑기마대, 이젠 너무 흔히 나와요 ㅠ_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11:26
    No. 2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12:11
    No. 3

    잘 보았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16:48
    No. 4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19:41
    No. 5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19:57
    No. 6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18:55
    No. 7

    그닥 안끌리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19:18
    No. 8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21:09
    No. 9

    처음부터 끝까지 싸움 뿐이라서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 지...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21:41
    No. 1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23:14
    No. 11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4 21:35
    No. 12

    ..............예 복수혈전을 보여주는 군요. 근데 말입니다. 단편과는 어울리지 않는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5 04:20
    No. 13

    헉헉... 기네요.. ^^:;
    잘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6 18:11
    No. 14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7 08:43
    No. 15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7 08:53
    No. 16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7 18:37
    No. 17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8 13:24
    No. 18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8 18:18
    No. 19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조금 무리하게 압축시키긴 했지만 좋네요.
    초반이 서장이고, 복수부분을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으로 가다듬어서 소설을 써도 될 듯하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0 17:24
    No. 20

    한번 맺어진 은원은 사라지지 않는군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1 18:27
    No. 21

    재미는 있었지만...
    여러면에서 매끄럽지가 않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4.04 12:30
    No.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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