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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롱지는 피아노 소리

작성자
익명
작성
10.03.20 23:53
조회
2,280

아롱지는 피아노 소리

-1-

느티나무의 푸른 잎이 스치는 바람에 흔들린다. 그 작은 울림에 따라 창으로 넘어오는 햇살이 이리저리 방향을 바꾼다.

유일하게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보이는 창을 가진 이곳은 학교별관의 피아노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언제나 느긋하고 평화롭게 흐른다.

그녀가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마다 동그란 방울이 건반에서 빠져나가 천장을 향해 날아간다. 매번 느끼지만 정말 신비한 광경이다. 그녀가 치고 있는 곡은 쇼팽의 에튀드. 내가 좋아하는 곡.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유난히 빛나 보였다. 그녀는 검고 반짝이는 그랜드피아노의 웅장한 몸에서 부드럽고 싱그러운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녀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휩쓸고 지나가자 작은 방울들이 와르르 솟구쳤다. 비할 수 없는 청량감에 난 행복해졌다.

이 신기한 피아노 방울(나는 그렇게 부른다)은 그녀가 피아노를 칠 때만 생긴다. 물론 나밖에 보이지 않는 듯하다. 당연히 이 신비한 현상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은 없다. 이상한 사람 취급당하는 것은 사양이니까.

비록 정체는 알 수 없어도 난 피아노 방울을 매우 사랑한다.

그래서 난 그녀와 사귀고 있다.

-어땠어? 내 연주?

막 연주를 마친 그녀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계속 피아노나 칠 것이지. 나는 이렇게 말하는 대신 그녀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훌륭한 연주였어.

-정말?

-그래.

그러니까 더 이상 쓸데없이 떠들지 말고 피아노나 치면 안 될까? 하지만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그녀는 새침하게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나도 네 피아노 듣고 싶어. 아무 거라도 좋으니까 쳐줘.

이런 무의미한 상황은 내가 정말 피하고 싶은 것 중 하나이다. 한숨을 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그녀가 다시는 피아노를 쳐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으므로 나는 한숨을 쉬는 대신 쓸쓸한 표정을 가장하며 살짝 시선을 아래로 향하며 말했다.

-난 네 피아노를 좀 더 듣고 싶은데.

그리고 그녀의 눈을 쳐다보면서 나직하게 한 마디.

-안될까?

그녀는 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작은 피아노실은 상쾌한 피아노 방울들로 가득해졌다. 나는 다시 행복해졌다.

피아노를 치는 것은 나도 좋아하는 일이다. 단지 그녀의 피아노를 더 좋아할 뿐이다. 집에는 피아노를 쳐 줄 그녀가 없으니까 그녀와 헤어져 집에 돌아온 나는 피아노 앞에 앉는다.

내가 치는 곡도 쇼팽.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곡.

하지만 그녀가 피아노를 칠 때와는 달리 피아노 방울은 보이지 않는다. 피아노 소리가 방안을 휩쓸듯 훑고 지나가기를 여러 번 반복해도 그저 그뿐이다.

갑자기 그녀의 피아노가 참을 수 없이 그리워 졌다.

-유학?

-응. 졸업하면 바로 미국으로 갈 거야.

나는 손가락으로 셈해 보았다.

-세 달 밖에 안 남았네?

그러니까 세 달 후면 그녀의 피아노가 떠난다는 얘기다. 나는 갑자기 멍해졌다. 그녀는 나를 향해 작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기서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돌아올 거야.

그녀는 내가 그녀와 헤어지는 사실에 놀랐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피아노는?

-넓은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울 거야.

그렇게 말하며 내가 모르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가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세 달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녀는 내일 미국으로 떠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학교의 피아노실에서 피아노를 쳐달라고 그녀에게 부탁한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 그러니까 아주 조금 나의 어딘가가 아픈 것 같다.

-내일 두 시에 떠나. 공항에 와 줄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봐.

그녀는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떠났다. 그녀가 떠난 텅 빈 피아노실에는 여운처럼 남아있는 피아노방울이 몇 개 날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손을 대자 그것은 퐁하고 터졌다. 나는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피아노가 없는 그녀는 나에게 별 감흥이 없다. 나는 무채색의 표정으로 공항에서 그녀를 배웅했다.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반씩 섞인 얼굴의 그녀는 오늘따라 매우 쾌활했으며 유난히 수다를 떨었다. 그러나 정작 떠날 시간이 되자 그녀는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해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탑승구를 향해 가다가 갑자기 돌아와서 나를 확 껴안았다. 나는 어라? 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녀를 안았고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울먹이며 말했다.

-기다려 줄 거지?

-……모르겠어.

내자 솔직히 대답하자 품속의 그녀가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나를 밀어내고는 젖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 한 번이라도 날 좋아하긴 했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좋아해’의 범주에 피아노는 존재했지만 그녀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녀가 눈치 채일 만한 행동은 한 적 없다. 그렇다면 뭐지? 그녀가 예민한 걸까? 아니면 여자들은 다 예민한 걸까?

잠시의 침묵 후 그녀는 나를 향해 슬픈 얼굴로 작게 미소 지으며 돌아섰다.

-그럼 잘 지내. 안녕.

그리고 그녀는 미국으로 가버렸다. 그녀는 왜 그렇게 아픈 표정을 지었을까?

그러니까,

…….

모르겠다.

-2-

나는 번화가에서 좀 떨어진 어느 골목 구석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실내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목향, 그리고 올드한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장식품이 향수를 자극하게끔 만드는 그런 카페이다. 하지만 내가 이 카페에서 제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바로 피아노다. 피아노도 이 카페와 닮아있어서 묵직한 세월의 향취가 난다. 그리고 직접 조율을 하는 주인아저씨의 세심함 덕분에 제법 좋은 소리로 노래한다. 내가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결심을 하게 된 것도 이 피아노 덕분이었다. 주인아저씨는 음악 공부하는 대학생이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왔다며 매우 기뻐했고 결과적으로 내가 이 일을 얻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해가 저물 즈음. 그러니까 옅은 어둠이 거리를 물들일 즈음이면 주황색의 조명을 밝힌 카페로 하나 둘 사람들이 찾아온다. 사람들이 오기 전부터 난 이미 피아노를 치고 있긴 하지만 그건 그 뿐이다.

여전히 나의 피아노는 똑같다. 그녀의 피아노에서 뿜어져 나왔던 청량감 가득한 피아노 방울들과 행복한 기분은 마치 없었던 일이었던 것처럼 멀다. 그녀의 피아노와 함께했던 시간이 짙푸른 청록 가득한 색감이었다면 지금의 나의 세계는 우울한 회색이다.

일을 마치고 살고 있는 단칸방에 돌아온 나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누웠다. 느끼지 못하고 있던 피로감이 갑자기 몰려온다. 이불을 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무리해서 독립하겠다고 고집한 것은 나였으므로 대학 등록금은 지원받았지만 생활비는 예외였다. 그래도 쉽게 아르바이트를 구했으니 운은 좋은 걸지도.

-모르겠어.

나는 멍한 얼굴로 천장을 응시했다. 마지막 보았던 그녀의 슬픈 얼굴과 피아노 방울, 그리고 회색의 거리와 카페의 풍경이 마구 뒤엉키면서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몇 번인가 그녀에게서 메일이 왔다. 일상에 대한 얘기와 안부를 묻는 그런 평범한 메일이었다.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달리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탓도 있었고 막연한 고집 같은 것이 답장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습관과 같이 메일을 확인하고 학교를 나섰다. 오늘은 식료품을 구입하러 마트에 들러야 했기에 평소에 가던 길에서 벗어나 번화가로 들어섰다. 비트가 빠른 음악소리가 들렸다. 리듬감 있는 드럼의 소리와 뻗어나가는 일렉트릭 기타의 소리. 그리고 어딘가 나른하면서도 힘 있는 보컬의 시원한 목소리와…….

그리고

경쾌하고 매혹적인 피아노의 소리.

나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향했다. 길거리의 작은 무대 위에서 이름 모르는 밴드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 중 붉은 머리의 도도한 미인이 날렵한 솜씨로 키보드를 연주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손끝이 스치고 간 키보드에서 빛의 기둥처럼 보이는 것이 빠르게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아…….

붉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시작으로 회색이었던 나의 시계가 급격히 색을 되찾았다. 나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지금껏 죽은 것 같았던 일상이 두근거리는 생동감을 되찾았다. 그녀의 키보드에서 생기는 빛의 기둥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어느새 핑 돈 눈물이 볼을 가득 적실 정도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이 일대에서 꽤나 알려진 밴드라고 한다. 수소문 끝에 그들의 연습실을 찾은 나는 밴드의 멤버로 보이는 사람에게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당연히 거절. 내가 풀이 죽은 얼굴을 하자 그가 말했다.

-너 같은 애들이 한 둘 인줄 알아? 일일이 상대했다가는 끝이 없다고. 알겠어? 자 알았으면 어서 돌아가.

그의 말이 옳았다. 무작정 와서 만나게 해달라고 하는 것도 솔직히 말이 안 되지. 내가 스스로의 멍청함에 대해 자책하고 있던 그 때 문이 조금 열리며 틈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나왔다.

-무슨 일이야? 연습 시작할거니까 얼른 오래.

-네 팬이 와서 널 만나고 싶다고 해서 돌려보내는 중이다.

-어머, 그래?

그녀는 관심을 보이며 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난 듯 짝하고 박수를 치며 말했다.

-아! 너 알아. 전에 길거리 공연할 때 펑펑 울었던 애지?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컸다.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땅만 쳐다 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매우 재미있어했다.

-어머, 얼굴 빨개진 것 봐. 귀엽다 얘. 너 온 김에 연습 구경하고 갈래?

같은 밴드의 멤버가 그녀에게 주의를 주려고 했으나 그녀는 그를 향해 혀를 쏙 내보이며 말했다.

-뭐 어때? 상관없잖아. 얘, 빨리 들어와.

-네? 네.

나는 이 행운에 감사하며 그녀에게 이끌려 연습실로 들어갔다. 나를 보고도 밴드의 다른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키보드 앞에 자리 잡자 연습이 시작되었다. 빠른 속도로 솟구치는 빛의 기둥들. 그녀의 휘몰아치듯 매끄러운 연주. 오랜만에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대체 얼마만이지?

-쟤 너 연주하는 것만 뚫어져라 쳐다보더라.

-너한테 반한 거 아냐?

연습을 끝내고 정리를 하던 밴드동료들이 키득거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랑곳 않고 나의 목을 당겨 확 끌어안았다. 나는 당황해서 몸이 경직됐다.

-그럼 좋지? 이렇게 젊고 귀여운 애가 나 좋다는 거면?

-널 누가 말리냐? 너무 상처주지 말고 적당히 데리고 놀아라.

당시의 나는 그녀의 행동에 너무 놀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할 틈이 없었다.

-집에 피아노 있어요?

-디지털 피아노라면 있어. 시간 상 밤에 연습할 때가 많은데 어쿠스틱 피아노는 곤란하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빙긋 웃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의 연습을 보러 갔고 덕분에 그녀와 금방 친해졌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녀가 나를 집에 초대했다.

-여기야.

그녀의 집에 들어서자 집안 곳곳에 스며들어 있던 그녀의 향기가 났다. 잘 정리정돈 되어있는 거실. 개성 있는 모양의 장식품들과 화분들, 조금 요란한 무늬의 커텐.

그리고 피아노. 내가 그녀의 디지털 피아노를 쳐다보고 있자 그녀가 말했다.

-피아노에 관심이 많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내 머리를 가볍게 휘정거렸다. 그녀의 손길은 장난스러우면서도 부드러웠다. 나는 조금 뜸을 들이다 그녀에게 말했다.

-보고 싶어요.

-뭘?

-피아노 치는 거.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빙긋 미소 지었다.

-특이하다 너. 여자 집에 놀러 와서 처음 한다는 소리가 피아노 쳐달라는 거라니.

-안…… 될까요?

-쳐줄게. 대신 밴드에서 연습하던 곡 말고 쇼팽 칠거야. 요즘 연습하고 있거든.

그녀는 기분 좋은 듯 그렇게 말했다. 나의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쇼팽. 그녀는 디지털 피아노 앞에 앉더니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쇼팽은 힘이 있었으며 빠르게 휘몰아치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손이 스치고 간 건반에서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어디선가 조금 차갑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왠지 눈물이 났으니까. 곧 피아노 소리가 멈췄고 그녀가 피아노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서 팔로 나의 등을 감싸며 말했다.

-또 울고 있네.

그녀는 천천히 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연주를 듣고 우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미안해요.

-미안하라고 말한 거 아냐. 그냥 궁금해졌어. 왜 내 연주를 듣고 우는 걸까. 뭐 그런 거?

그녀는 나를 안고 있던 손을 풀고 나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매우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그녀의 숨조각이 내 얼굴을 스쳤다. 신기한 느낌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연주를 듣고 그제야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지금까지 죽어있는 것 같았던 세상이 갑자기 움직이는 것 같은.

그녀는 작게 웃었다. 잔잔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던 그녀는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다.

-너 나랑 같이 살래?

-네.

나도 느닷없이 대답했다.

-3-

그녀와 함께 살게 되면서 나는 그녀의 밴드 멤버들에게 기둥서방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솔직히 그 호칭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와 그녀는 같은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물론 내가 그녀에게 종종 피아노 연주를 부탁하면 그녀가 나에게 피아노를 쳐주긴 하지만 그 외의 특별한 점은 없다.

오늘은 비가 왔다. 나는 수업이 없는 날이었고 그녀는 밴드연습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다. 흐르듯 유려한 그녀의 쇼팽이 내리는 빗소리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하모니를 자아냈다. 비는 싫어하지만 밖에 나갈 일이 없다면 오히려 좋을 때도 있다. 특히나 오늘 같은 날이라면.

딩동.

경망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작게 ‘또 야?’라고 투덜거렸다. 그녀는 피아노연주를 멈추고는 얼른 문을 열러 나갔다. 멎은 피아노소리와 함께 나의 행복한 시간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초인종의 주인공은 그녀와 시시덕거리며 안으로 들어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다른 남자가 있었어?

-괜찮아. 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웃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엔 저번의 남자와 또 다른 남자다. 그리고 저 저번에 왔던 남자와도 다르고, 또 저저저번의 남자와도…….

-미안. 나중에 계속 쳐줄게.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눈을 찡긋 해보이고는 그 남자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방안에서 그 남자와 무엇을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별로 알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혼자 거실에 남은 나는 창에 기대어 앉았다. 내리는 빗소리에 정신이 아득한 곳까지 묻혀버리는 기분이다. 이래서 비오는 날은 싫다. 온통 회색의 거리. 그리고 불쾌한 축축함. 참을 수 없이 우울해진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있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처음으로 피아노실의 꿈을 꾸었다. 상냥한 바람. 흔들리는 느티나무. 가볍게 튕기듯 건반 위를 누비는 그녀의 하얀 손. 환상처럼 솟아오르는 피아노 방울들…….

-와아. 꿈이지만 굉장하다.

내가 이렇게 말했고.

-그렇지? 꿈이지만.

피아노를 치며 그녀가 말했다. 뒤돌아 있어서 보이진 않지만 그녀는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작게 웃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곡은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쇼팽. 그리고 그녀도 좋아하는 쇼팽. 비 오던 하늘이 청명하게 개인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맑은 날씨가 좋아. 아까는 비가 와서 우울했었나봐.

-바보. 꿈속은 계속 맑았었는걸.

-그런가? 뭐 어때? 어차피 꿈인걸.

-맞아. 꿈인걸.

나도 그녀도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연주가 조금 흐트러졌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그녀는 연주를 마치고는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한 곡 칠래?

-그럴까?

나는 웬일로 흔쾌히 대답했다. 아마도 꿈이었으니까.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꽤나 오랫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다. 아르바이트 하면서 날마다 쳤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건반을 누르려다가 멈칫 했다.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왜 그래?

-역시. 관둘래.

-그래?

그녀는 담담하게 웃었다. 나는 얼른 피아노에서 일어났다.

꿈에서 치는 건 의미가 없잖아.

-그렇지 않아?

앞의 말을 생략하고 뒤의 말만 말했지만 그녀는 용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의미 없지.

피식 웃은 우리는 입을 모아 합창하듯 똑같이 말했다.

-어차피 꿈이니까!

그리고 한참을 키득거리며 웃었다. 왠지 속이 후련해졌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나는 잠에 반쯤 취한 몽롱한 얼굴로 밖을 보고 있다가 그녀의 방문이 아직 닫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방으로 돌아왔다. 꿈에서 본 그녀는 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여전히 그녀의 피아노에선 피아노 방울들이 솟아나고 있을까? 나는 갑자기 집안이 답답해져서 충동적으로 밖으로 나갔다. 비오는 거리보다 답답한 집안이 싫을 때도 있다는 것은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저녁때가 거의 다 되어서 어둑해질 무렵에서야 집에 들어갔다. 현관의 신발을 보니 그 남자는 돌아간 모양이다. 내가 방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어두운 거실에서 그녀가 불쑥 튀어나와 나를 확 껴안았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그녀와 함께 엎어졌다. 그녀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별로 안 놀라네?

그녀에게서 달콤한 향수냄새와 함께 진득한 술 냄새가 풍겼다. 나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술 마셨어요?

-응. 마셨어. 아주 많이.

-역시.

내가 웃자 그녀도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웃고 있지만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휘청거리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무슨 일 있었죠?

-어? 어떻게 알았을까?

-무슨 일이예요?

-싸웠어. 그 자식이랑.

그 자식이라면 아까 집에 왔던 그 남자로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점점 감정이 복받치는지 씩씩대다가 결국 훌쩍거렸다.

-나쁜 자식. 필요 없어 그런 자식. 가버리라 그래. 흑.

술 취한 어른은 어린애가 된다고 하더니 딱 이런 경우에 해당하나보다. 나는 그녀를 달래서 그녀의 방에 뉘였다. 그녀는 이불을 덮어주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갑자기 확 끌어안았다.

-넌 계속 내 곁에 있어 줄 거지?

나는 그녀의 팔 안에 갇혀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들었던 질문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언제나 같다.

-모르겠어요.

그렇게 작게 말하고는 그녀의 팔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다행히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눈가에 고여 있던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그녀의 방을 나왔다.

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그녀가 남자와 사귀고 헤어질 때마다 매번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나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고 그녀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외관상으로 별 탈 없이 지냈다.

-기둥서방! 오늘도 연습구경이야?

-네. 안녕하세요.

그녀의 밴드동료가 반갑게 인사했다. 얼굴은 아는데 이름은 모르는 그. 이후로도 밴드동료 몇 명과 인사를 나눈 나는 그녀의 피아노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자, 오늘도 힘내 보자. 기둥서방도 보고 있으니 더 멋진 연주 해보자고 다들!

누군가 그렇게 외치자 다들 웃으며 크게 환호성을 올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냥 피식 웃었다. 나도 처음에는 기둥서방이라는 호칭을 바꿔 보려고 애써봤지만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해 버렸다. 아무렇게나 부르라지.

그들의 연주는 점점 화려하고 멋있어졌다. 처음엔 그녀의 피아노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나지만 요즘은 전체적인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힘이 넘치는 비트가 강한 그들의 음악. 격정적인 연주에 따라 그녀의 키보드에서 빛기둥이 솟아오르는 속도가 빨라졌다. 나는 감탄하면서 그녀의 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시선을 눈치 챈 그녀가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나도 그녀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한 번 쳐볼래?

-네?

그녀의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연습이 끝나고 나에게 다가온 그녀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녀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피아노에 관심 많은 것 같은데 너도 한 번 쳐보면 어때?

초보자에게 피아노를 권하는 것 같은 말투에 나는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내가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다는 것도, 아르바이트로 카페에서 피아노를 친다는 것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 앞에서 피아노를 친 적이 없었으니까.

-난 됐어요.

내가 고개를 젓자 그녀는 입을 앙 다물더니 내 팔을 잡아끌어 자신의 키보드로 향했다. 다른 멤버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나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쳐봐.

그러자 모두들 쳐보라고 소리를 쳤다.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하는 수 없이 건반에 손을 댔다. 키보드와 피아노는 터치감은 좀 다르지만 그래도 같은 건반. 좀 어색하긴 하지만 나쁠 것은 없다. 작게 심호흡을 한 나는 그들의 음악을 클래식 풍으로 바꿔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드럼과 기타 보컬 등의 감칠맛 나는 조미료가 빠졌기 때문에 역동적인 그들의 음악을 표현하려면 좀 더 빠르고 강한 연주가 필요했다. 빨려 들어갈 듯 흐르는 선율. 그리고 음악. 언제나 멋진 연주를 들려준 보답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담은 연주.

-…….

연주를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자 다들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한 것 같은데……. 의아해진 내가 그녀를 돌아보려는 순간.

짝!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볼에 확 열이 올랐다.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나는 붉게 달아올라 점점 부어오르고 있는 볼을 한 손으로 감싸 쥐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 화난 얼굴로. 그녀는 나를 노려보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넌 날 업신여겼어!

뭐야? 무슨 소리야? 무슨 뜻이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뭐라고 하려고 하는 순간 그녀가 더 크게 소리 지르며 나를 마구 떠밀었다.

-나가! 나가버려! 너 같은 거 꼴도 보기 싫어!

심장을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뒤돌아 그곳을 뛰쳐나왔다.

-4-

갈 곳이 없다. 당연한 일이다. 더 이상 그녀를 마주할 수는 없으니 이제 그 집에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정처 없이 거리를 걷고 있는데 하늘의 끝이 검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뿌리듯 내리던 비는 어느새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양 쏟아 졌다. 하지만 나의 정지된 사고는 좀처럼 다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멍하니 비를 맞았다. 몇 명의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긴 했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이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온몸이 비에 젖어서 비가 나인지 내가 비인지 모르게 된 것 같다. 내리는 빗줄기가 온몸을 때리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차라리 그냥 녹아 없어졌으면 좋겠어.

나는 주변에 아무렇게나 기대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순간 귓가를 때리는 비의 소리가 멀어졌고, 몸을 적시던 비의 집요한 손길이 잦아들었다.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보니 누군가가 우산으로 비를 막아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아! 역시 너였구나.

그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몇 번 지나갈 때 인사했던 같은 과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나에게 와서 아는 척을 한다는 것은 조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다.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리고 이런 엉망진창인 몰골의 나에게 말을 걸만한…….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 같은 아득함을 느낌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푸른 초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코끝을 스치는 애수가 담긴 풋풋한 풀의 향. 귓가를 간질이는 바람에는 피아노 선율이 섞여있다. 이것은 이별의 곡이라고 불리는 쇼팽의 에튀드.

쏴아아.

조금 강한 바람이 온몸을 스치자 피아노음이 강렬하게 격동하다 이내 바람과 함께 아득하게 잦아들었다. 따뜻하다. 이별의 곡이지만 참 따뜻하다.

“…….”

포근한 이불에서 눈을 떴다. 조금 더 잘까 생각했지만 피아노소리가 들리자 생각을 바꾸었다. 꿈에서 들었던 그 곡이다. 나는 피아노를 치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눈을 깜빡 거리며 쳐다보았다. 모든 것이 의아하긴 하지만 피아노소리가 좋으니까 그냥 잠자코 듣고 있기로 했다.

곧 연주를 마친 그가 내가 깨어난 것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깨어났네? 몸은 좀 괜찮아? 갑자기 쓰러져서 깜짝 놀랐어.

그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다행히 열은 좀 떨어졌다.

나는 그제야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갔다. 아마 빗속에서 정신을 잃은 나를 그가 주워 온 모양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 그러니까…… 고마워.

내가 어눌한 말투로 인사하자 그는 피식 웃었다.

-별 말씀을.

-그럼 이만 가볼게. 본이 아니게 번거롭게 해서 정말 미안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일어섰지만 순간 천장이 휘청하고 움직였다. 쓰러질 뻔한 나를 그가 얼른 붙잡아 주며 말했다.

-위험하잖아.

나는 얼떨떨해져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몸이 나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상당히 생소한 경험이었다.

-아직은 일어나지 않는 게 좋겠다.

-아냐. 이제 괜찮아. 그러니까…….

그는 갑자기 내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세게 튕겼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따끔한 아픔이 느껴졌다. 내가 이마를 문지르며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가 씨익 웃었다.

-때로는 남한테 신세질 때도 있는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자, 알아들었으면 얼른 누워.

그는 강제로 나를 이불속에 밀어 넣었다. 솔직히 그의 남다른 친절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다. 나는 만족스러울 정도로 포근하고 따스한 이불속에서 금세 잠이 들었다.

나는 죽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그가 만든 죽은 맛있었다. 나는 죽을 입에 떠 넣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나 죽 먹을 정도로 속이 안 좋은 건 아닌데?

-무슨 소리냐? 환자가 죽을 먹는 것은 세간의 상식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죽을 한 숟갈 떠 자신의 입에 넣으며 웃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그럼 너도 환자라서 죽을 먹는 거야?

-물론 그건 아냐. 참, 그런데 너 집 나온 거야?

-뭐?

갑자기 그가 말을 돌리자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살피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냄새가 난단 말이지. 가출 청소년의 냄새가.

-청소년도 아닐뿐더러 가출도 아닙니다만?

-그럼 뭐야?

-쫓겨났어.

내말에 그는 풍선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더니 크게 웃었다.

-정말? 왜?

나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녀가 화를 낸 이유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몰랐으므로 그냥 싸웠다고 둘러댔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고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럼 너 여자랑 동거했던 거야?

-그냥 같이 산거야.

-그게 그거지.

-무슨 상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같이 산 것 뿐이야.

-그래? 그건 그런 셈 치자. 그럼 너 갈 곳 없겠네?

그런 셈 친다는 말이 걸렸지만 갈 곳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여기서 지낼래?

의외의 제안에 눈이 번쩍 띄었다.

-그래도 돼?

-응. 실은 얼마 전에 같이 살던 룸메이트가 나갔거든. 그렇지 않아도 새로 룸메이트 구할 생각이었어.

-집세 반반씩 내면 되는 거지?

-응. 혹시 형편이 어려우면 천천히 내도 괜찮으니까 부담가지지 않아도 돼.

-아냐. 낼 수 있어.

그는 피식 웃더니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룸메이트.

-나야 말로.

나도 그의 손을 맞잡으며 빙긋 웃었다.

-5-

난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사교성도 당연히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혼자였다. 하지만 그와 함께 살게 되면서 대학교에서의 생활이 조금 바뀌었다. 전공이 같은 그와 함께 어울려 다니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그는 밝고 사교성 있는 성격이라 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와 함께 다니는 나도 자연히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 것이다. 덕분에 조금은 나의 인간관계가 넓어진 것 같다.

-얘들아, 영화 보러 안 갈래? 여자애들 몇 명도 같이 간다고 했어.

수업이 끝나고 기지개를 피고 있을 때 누군가가 제안했다. 물론 다들 찬성하고 나섰다. 어지간히 힘이 남아도는 녀석들이다. 내가 가만히 있자 말을 꺼낸 남학생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도 괜찮지?

-미안하지만 난 아르바이트 가야 해.

-아르바이트? 무슨 아르바이트 하는데?

-카페에서 일해.

그러자 누군가가 기세 좋게 외쳤다.

-그럼 영화 보러가기 전에 그 카페 들르자.

-그래그래. 아르바이트 하는 거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일하는 카페로 다들 몰려올 분위기가 되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왜? 매상도 올려주고 좋잖아.

-안된다면 안 돼. 그럼 나 먼저 가본다. 다들 내일 보자.

-앗, 도망간다.

-치사해!

내가 얼른 자리를 피하자 뒤에서 다들 야유하면서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룸메이트. 이따 봐.

라고 말하며 예의 그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금 연주하는 곡은 낭만을 사랑하는 주인아저씨의 신청곡 ‘저녁별의 노래’다. 저녁별의 노래는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에 나오는 곡으로 부드러운 바리톤의 목소리로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피아노로 쳐도 매우 아름다운 곡이기 때문에 나도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쇼팽만큼은 아니지만.

주인아저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저녁별의 노래를 처음부터 한 번 더 연주하고 나서야 오늘의 일을 마쳤다.

-그럼 내일 봬요.

주인아저씨께 인사하고 나오려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꽤 오랜 시간 앉아 있었는지 여러 개의 컵이 그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내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룸메이트, 이제 일 끝났어?

-어떻게 여기 있어?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그가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나 여기 단골인데? 그동안 열심히 드나들었었다. 넌 전혀 몰랐지?

-……그랬어?

나는 괜히 멋쩍어져서 뒤통수만 매만졌다. 나야 당연히 사람에는 관심이 없었고 더군다나 피아노만 치고 있었기 때문에 단골이라도 얼굴을 기억하는 경우는 전무했다. 내가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같이 돌아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끝났으면 가자.

-응.

나는 그와 함께 카페를 나서다가 조금 궁금해져서 그에게 물었다.

-단골이었으면 예전부터 내가 여기서 아르바이트 하는 거 알고 있었겠네?

-그렇지. 실은 카페에서 먼저 알게 되었어. 피아노 들으러 종종 왔었으니까. 나중에 보니 같은 과 학생이라서 깜짝 놀랐어.

-그랬구나.

-어? 그러고 보니 난 집에서 네 연주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네?

그가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나는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함께 웃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즐겁게 웃어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 룸메이트?

-응. 어떤 사람이었어?

저녁을 먹다가 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상한 태도에 더 궁금해진 나는 내 눈을 피하려고 애쓰는 그의 노력을 일부러 모른 척했다. 결국 그는 나의 집요함에 두 손을 들어야 했다.

-……좋은 녀석이었어, 평소에는.

-평소에는? 그럼 평소가 아닐 때는 어땠는데?

그는 더 이상 말하기 싫은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바탕이 상냥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화를 내거나 중간에 말을 관두거나 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런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성실한 그의 성격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진 않는다.

-술만 마시면 아주 사나워졌어.

-사나워져?

-왜 텔레비전 같은데 자주 나오잖아.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두르는 구제불능 알코올중독 남편 같은 거. 거의 그런 식이었어.

나는 의외의 사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의 경우 힘없는 부인이나 어린 자식 같은 게 아니라 같은 혈기왕성한 남자라는 점이 달랐지. 함께 치고 박고 싸워댔거든.

솔직히 지금 눈앞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가 누군가와 싸우는 장면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좋은 사람이었던 거네?

-그래. 술을 마시지 않은 온전한 정신일 때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그의 신랄한 표현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순간 벌집을 쑤신 것 같은 아찔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멀쩡한 정신일 때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는 거야.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정말 미안하다면서. 다 큰 사내 녀석이 납작 엎드려서 비는 꼴을 상상해 봐.

-섬뜩하군.

느낀 그대로의 표현이었다. 그의 성격으로 가끔 제정신으로 돌아와 불쌍하게 애원하는 사람을 냉정하게 내치긴 어려웠을 테니까. 그건 마치 반복되는 재앙처럼 끔찍한 일이다.

-계속 그런 일이 계속되자 나도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몸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점점 부서지는 기분이 들더라고.

-그래서 그 사람은 순순히 납득했어?

-결국에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그의 ‘결국’이라는 말에 담긴 무게를 알 수 있었기에 쓰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젠 상관없어. 다 지난 일이니까.

그가 손에 묻은 것을 털어내는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순간 그가 내 무거운 마음을 눈치 채고 배려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위로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위로하는 보기 드물 정도의 상냥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집요하게 물어본 것이 더욱 미안해졌다. 나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밥 다 먹고 피아노나 칠까? 뭐 듣고 싶은 거 있어?

-음…… 그럼 페트루슈카 러시아의 춤곡.

-좋아.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미안한 마음을 피아노 연주로 조금이나마 갚아줘야지.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 페트루슈카는 인형이 주인공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밝고 아름다운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광대인형 페트루슈카는 결국 무어인에게 살해당해서 유령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싫어하는 찝찝한 결말의 이야기라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거라며 머리를 쥐어뜯었던 아련한 기억이 있다.

어쨌거나 내가 지금 연주하고 있는 러시아의 춤곡은 톡톡 튀는 발랄함과 신선하고 감각적인 음의 빠른 곡이다. 그래서 그가 이 곡을 고른 걸까? 우울할 때 이런 밝은 곡을 들어서 어두운 기분을 중화시킬 수 있으니까?

-우아하게 커피라도 마시면서 들을 걸 그랬나?

내가 연주를 마치고 그를 돌아보자 그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그럼 이제부터 내가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들어줄 테니까 네가 연주해.

-뭐?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야?

-러시아의 춤곡은 지친단 말이야. 힘들다고.

-그러지 말고 한 곡만 더 쳐 줘.

나는 재빨리 커피를 타러 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졌다는 표정을 짓고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하는 수 없지. 그럼 신청곡은?

-쇼팽.

-역시.

-역시?

내가 의아하다는 듯 말하자 그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너 쇼팽 좋아하잖아.

-말한 적 없는데?

-부정은 안하네?

-응. 좋아하는 거 맞거든. 하지만 말한 적 없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당연하잖아.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쇼팽밖에 치지 않으면서.

나는 납득했다. 그래서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얼른 커피를 타와 쇼파에 앉았다.

-그럼 녹턴 칠게.

-응.

그는 음울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음을 손끝에서 피워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피아노는 연주하는 사람과 닮은 음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피아노는 여전히 따뜻했다. 처음 들었던 그의 이별의 노래도 그리고 지금 연주하는 녹턴 21번도.

-피아노 방울은 없지만 왠지 따뜻하네.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용케 들은 그가 연주를 마치고 나에게 물었다.

-아까 뭐라고 말했어?

-네 피아노 따듯하다고.

-어? 고마워.

그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말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 전에 뭔가 더 말하지 않았어? 피아노 방울이었나?

-쓸데없는 것만 잘 듣고.

-뭐어?

그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 얼굴이 재미있어서 나는 피식 웃었다. 남들에겐 바보취급 당할 만한 이야기지만 그라면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을까?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해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비웃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말해줄게.

-안 비웃어.

그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했기에 나도 고민하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피아 색의 일상. 고요하고 평온하지만 단조롭고 지루하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예약되어진 내일. 하지만 조금만 충격을 주면 금세 허물어질 것처럼 불안정하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조용히. 없는 것처럼…….

그런데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이끌리듯 다가선 피아노실에서 싱그러운 오후의 햇살같이 빛나던 그녀가 있었다. 날아가는 피아노의 방울들과 아름다운 쇼팽.

째깍. 째깍. 째깍.

멈춰있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지했던 나의 세상이 생명을 되찾았다.

그렇게 불현듯.

갑작스럽게 깨어났다.

이야기를 끝내고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따뜻하지만 어딘가 낯간지러운 미소다.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뭐야? 그 표정은?

그는 다시 한 번 작게 미소 짓더니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 어리구나.

-무슨 뜻이야? 비웃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비웃지 않았어.

-그럼 뭐야?

-자, 정리해보자.

그가 뜬금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그의 행동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마 지금의 나는 상당히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네 표현에 따르자면 내 피아노는 따뜻하지. 하지만 피아노 방울도, 빛의 기둥도 보이지 않아. 그렇지?

-으……응.

-하지만 그녀들의 피아노에는 있어. 내게는 없지만 그녀들에게는 있지. 이유가 뭘까?

-모르겠어.

-그러니까 어리다는 거야.

그가 어른의 얼굴로 으쓱거리며 말했기 때문에 나는 약이 올랐다. 그래서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서 이유가 뭔데?

-사랑이지.

바보, 멍청이, 말미잘, 해삼, 멍게……. 어느 말을 먼저 해줄까. 아니 차라리 다 해버릴까? 내 표정에서 싸늘한 냉기가 흐르는 것을 감지한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내저어 보였다.

-잡아먹을 듯 노려보지 말고 일단 말을 들어.

장난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무의식 적으로 꾹 쥐었던 주먹을 내려놓았다. 그제야 그는 피식 웃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알기 쉽게 말하자면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 좋아한다는 표현을 ‘싫지는 않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야. 너는 그녀를 좋아했어.

-내가 좋아했던 건 그녀의 피아노야.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쑥스러웠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너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피아노를 좋아할 뿐이라고 스스로 납득하려고 했던 거야.

속에서 반발감이 일어났다. 내가 그녀를 좋아했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미국으로 떠날 때도 무덤덤했어.

-그랬겠지. 너는 그녀에게 화가 났으니까.

-화가 나다니?

나는 짜증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빙긋 미소 지었다.

-그녀는 너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혼자 유학 간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으니까.

-…….

-너는 그녀의 피아노만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가지 말라고 말 할 수 없었어. 끼어들 수 없는 상황 그리고 혼자 훌쩍 떠날 것을 각오한 그녀. 둘 다에게 화가 났을 거야. 그리고 그녀에게 약간의 배신감도 느꼈을 테고.

확실히 나는 화가 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떠나는 그녀에게도 퉁명스럽게 대했다. 그녀의 메일에도 답하지 않았다. 멋대로 떠난 그녀에게 화가 나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내가 생각을 정리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녀가 떠나서 황폐해진 너에게 두 번째 그녀가 들어왔어. 연상이고, 미인이고 어딘가 화려하면서도 매혹적인 분위기가 있는 사람이지.

-잘 아네?

내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실은 그 밴드 공연 지나가다 본 적 있거든. 그녀는 워낙 강렬해서 잘 잊히지 않는 타입이지. 하지만 너는 그녀를 좋아한 것은 아냐.

-응?

이전과는 상반되는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네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네가 무의식 적으로 선택한 차선책이야. 그녀도 아마 그런 사실을 어렴풋 눈치 채고 있었을 거야.

-그래서 마지막에 화를 냈던 걸까?

나는 내 뺨을 때리고 무서운 얼굴로 화를 내며 울던 그녀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틀려. 그래서 화를 낸 건 아냐.

-그럼?

-그녀는 너를 좋아했어.

-뭐어?

아까보다 더 황당했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 리 없어. 그녀는 내가 있어도 곧잘 다른 남자들을 집에 데려 왔다고.

-네가 질투해 주길 바랐으니까.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피아노를 칠 때면 너는 항상 그녀를 봐주었지. 그래서 그녀는 피아노만이 너의 시선을 자신에게 잡아둘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하지만?

-유일한 수단이었던 피아노였는데 네가 그녀보다 피아노를 훨씬 잘 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단 하나였던 프라이드가 와르르 무너지게 된 거랄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녀에게 상당히 잔인한 일을 한 것이다. 나는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부여잡고 말했다.

-……모르겠어.

-그래. 그럴 거야.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고민해 봐.

그가 차분하게 말하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주변의 공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그를 바라보자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편안한 미소로 답했다.

그러자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

-6-

그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같은 과에 아는 사람도 많이 생겼고, 나의 피아노도 조금은 발전한 것 같다. 아르바이트는 여전히 그 카페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 꾸준히 한 덕분에 시급이 전보다 조금 높아졌다. 나는 충실한 매일 매일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몇 달 전부터 그녀에게서 메일이 오지 않았다. 답장이 오지 않는 메일을 보내다가 지친 모양이다. 하지만 스스로의 마음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나는 그녀에게 선뜻 메일을 보낼 수 없었다.

-방학에 무슨 계획 있어?

모처럼 주말이라 방에서 뒹굴 거리고 있는 나에게 그가 물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는데 왜?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우리 과 애들은 외국에 많이 가잖아.

-아아, 그렇긴 하지. ‘본고장의 음악을 체험하고 오겠어요.’라던가? 하지만 난 그럴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걸. 생활비 벌어야 하니까 아르바이트도 쉴 수 없고.

-하긴.

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누워있는 자세에서 한 바퀴 빙글 몸을 굴린 다음 그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는?

-나도 없어.

-그래? 그럼 방학 동안에도 잘 부탁해. 룸메이트.

-나야말로.

그렇게 나는 방학 동안에도 그와 함께 보냈다.

보통은 둘 이상의 사람이 붙어있으면 싸우게 되는 것이 순리다. 다른 사람과 완벽하게 마음이 맞아 지내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도 왕왕 충돌이 일어날 정도인데 하물며 남일까? 하지만 그와는 신기하게도 별 탈이 없었다. 아마도 그가 ‘남과 다툴만한 일을 만들지 않는 드물게 상냥한 사람’ 이라서 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와 함께 한 방학이 일주일 정도 남았던 어느 날 그녀에게서 메일이 왔다. 한동안 오지 않았던 그녀의 메일에 나는 가슴이 크게 뛰었다. 무슨 말이 써있을까? 이젠 답이 오지 않는 메일을 보내는 것은 질렸다던가? 그래서 이게 마지막 메일이라던가?

어째서인지 최악의 경우만 생각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나? 나 갑자기 왜이래?

내가 모니터 앞에서 끙끙거리고 있는 것을 본 그가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 그게…….

-응?

-메일이…… 왔어.

-아아!

누구에게서 어떤 메일이 왔다는 얘기까지 하지 않아도 그는 나의 표정과 반응만으로도 눈치를 챘다.

-그럼 어서 읽어 봐. 뭘 망설여?

그가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리더니 자리를 피해줬다. 상냥한 만큼 세심하게 남을 배려한다. 나였다면 저렇게 살다가 아마 소화불량에 걸렸을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심호흡을 두어 번 한 후에 비장하게 메일을 클릭했다.

-잘 지내고 있어?

평범하게 시작한 그녀의 메일의 내용은 나의 예상과는 달리 짧고 간결했다.

-일이 있어서 잠시 한국에 돌아가.

그리고 비행기 날짜와 시간.

-혹시 시간이 되면 잠시 볼 수 있을까?

여운. 그리고 망설임.

-연락해줘.

나는 그만 헛웃음을 웃고 말았다. 연락이라니? 어디로? 미국으로 간다고 핸드폰 없애지 않았어? 방법은 유일하게 구체적으로 적혀있는 비행기 날짜와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가는 수  밖에 없는 거잖아. 그녀 역시 혼란스러웠던 걸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단호한 결말을 유도하는 걸까.

-다녀와.

그에게 말하자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보던 책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쉽게 말해버린 그가 얄미워서 옆에 있던 쿠션을 집어던졌다. 하지만 이마에도 눈이 달렸는지 그는 너무나 쉽게 나의 쿠션을 잡아버렸다.

-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네 진짜 마음이 뭔지. 그러니까 가서 확인 해 보는 것이 좋을 거야.

쿠션을 던진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화도 내지 않은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정형화된 고지식함의 표본 같으니라고.

-알았어.

그는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나에겐 누군가 뒤에서 떠밀어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다녀와’라고…….

-고마워.

내가 나직하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별 말씀을. 어? 그럼 나 신청곡 말해도 돼?

-뭔데?

느닷없이 피아노를 쳐달라고 하는 그의 말에 난 피식거리며 대꾸했다. 그러자 그가 고민하더니 말했다.

-으음. 흑건?

-좋아.

쇼팽이니까 흔쾌히 수락한다. 흑건은 오른 손으로 검은 건반만 눌러야 하는 쇼팽의 에뛰드. 물방울이 튀기는 듯 밝고 명랑한 곡이라 나도 매우 좋아하는 곡이다. 그리고 그녀도 매우 좋아했던 곡. 흑건은 빠르게 쳐야 제 맛이지. 나의 의지에 따라 손이 피아노의 건반 위를 튕기듯 날아다닌다. 조금 더 조금 더, 하지만 아직 이 이상은 한계. 한도를 넘어서 폭주했다간 손가락이 꼬여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하기에 아슬아슬하게 한계점을 유지한다.

뒤에서 그가 감탄하는 소리가 들린다. ‘빠르네.’라면서…….

-그럼 이번에는 네가 쳐.

연주가 끝나고 뒤에서 박수를 치고 있던 그를 끌어다 피아노 앞에 앉혔다. 처음엔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자 그의 얼굴에 작게 미소가 어렸다.

그 뒤로 그와 내가 번갈아 피아노를 연주하는 난데없는 피아노 콘서트가 시작 되었다. 그날 우리는 아파트의 에티켓이 허락하는 한도 내의 시간까지 줄곧 피아노를 쳐댔다. 오랜만에 원 없이 피아노를 쳐댄 것 같은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도 오늘처럼 햇살이 반짝이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했던 날들에 대한 기억도 모두 맑은 날이다. 어째서인지 그녀와의 기억에 흐린 날에 대한 것은 없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좀 일찍 도착했네.

헛웃음을 삼키고 실없는 혼잣말을 뱉어냈다. 원래 먼 곳에 올 때는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서 오차시간을 고려해 일찍 나오다 보니 도착시작이 빨라진다. 그러니까 내가 공항에 두 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것도 공항이 집에서 너무 멀기 때문이다.

남은 시간을 뭐하면서 때울까 고민하다가 가장 만만한 커피샵으로 들어갔다. 지인들과 수다를 떠는 사람들, 읽지도 못하는 영자신문을 펴놓고 고상한 척 하는 사람들 그리고 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들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앉아 있다. 나도 그들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은은하게 감도는 커피향이 초조함을 달랜다. 응? 나 초조해 하고 있었던 거야? 뒷머리를 매만지며 어이없는 쓴 웃음을 흘렸다.

커피샵엔 고풍스러운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다. 정돈된 분위기의 실내와 어울리는 곡이다. 그러니까 이 곡이 뭐더라? 아, 그거다. 로시니의 탄크레디 중 아리아 ‘이렇게 가슴 설레임이’를 파가니니가 변주로 편곡한 곡.

-괴물 파가니니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녀석 중에 하나가 존경과 감탄을 담아서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향기로운 커피향와 어우러지는 좋은 선곡이다. 덕분에 차분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공항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어딘가 점잖으면서 정돈된 분위기와 살짝 들뜬 감각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맑은 휴일의 분위기와도 조금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여행에 대한 설렘과 기대를 안은 사람들,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풋풋한 그리움을 머금은 사람들이 주위를 스쳐 지나간다. 그들의 기분이 폐에 닿을 듯 가까워지면서 언젠가 떠났던 여행의 냄새가 기억 속에서 선명히 되살아났다.

시계를 보니 슬슬 가서 기다려도 될 것 같다. 나는 출발지와 비행기 시간을 맞춰 보고 그녀가 나올 곳으로 향했다.

그녀를 만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걸까? 어떻게? 무엇으로? 당연히 확신은 서지 않는다. 예전처럼 또 갈피 잡지 못하고 흔들린 채 헤매면 어쩌나하는 걱정만 한 가득.

그녀가 올 시간이 분 단위로 좁혀지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기다려 본 일도 거의 없지만, 설령 있다 쳐도 긴장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건 무슨 추태야? 아아. 아마도 오랫동안 그녀를 만나지 않았기에,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 그런 것이 틀림없다.

곧 그녀가 탄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안내가 나왔다. 나는 괜히 게이트 앞에서 서성이다가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나오면 뭐라고 말하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엉킨 실타래가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처럼 혼란스럽다.

곧 출국 게이트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주저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찾기 위해 나오는 사람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으로 훑고 있었다.

-응?

갑자기 눈앞으로 동그란 방울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공기의 저항을 무시한 가벼운 무기체처럼 두둥실 떠 올라갔다.

-피아노…… 방울?

피아노도 없는데 어째서? 내가 멍한 표정으로 피아노 방울을 눈으로 쫓았다. 갑자기 퐁하고 피아노 방울이 터짐과 동시에 시선의 끝에 그녀가 보였다.

하나, 둘, 셋.

순간 들릴 리 없는 쇼팽의 에뛰드가 닿을 수 있는 모든 공간을 물들였다. 그리고 우르르 하늘로 솟아오르는 피아노 방울들. 시야가 넘실거린다. 귓가를 간질이며 피아노 방울들이 스쳐 올라간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나의 얼굴에 황당함과 함께 웃음이 묻어났다.

그녀는 용케 사람들의 무리 사이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짧은 의심이 그녀의 얼굴에 스치고 내 얼굴을 몇 번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커진다. 내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자 그녀는 눈 꼬리에 눈물방울을 매달며 환하게 웃었다

아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녀, 나. 그리고 나의 마음. 그리고 이 피아노 방울들의 의미도…….

나를 향해 달려오는 그녀의 주변에 피아노 방울들이 가속도를 달아 주기라도 하는 듯 끊임없이 모여 들었다. 곧 그녀가 가득한 피아노 방울들과 함께 나에게로 뛰어 들었다. 나는 주저 없이 그녀를 팔로 끌어안았다.

우리 주변에 머물던 피아노 방울이 빠른 속도로 솟구쳤다. 더할 수 없는 청량감에 나는 행복해졌다.

“좋아해.”

해야 할 말은 이거였어. 나는 경쾌한 박자로 진동하는 피아노 방울들을 보고 확신했다. 그녀의 눈에 동그란 눈물이 맺혔다.

“나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간 마음속에 채워지지 못하고 텅 비어 있던 공간이 경쾌한 피아노 소리로 가득 찼다. 우리를 감싸는 따스하고 상냥한 피아노 방울들…….

우리는 참을 수 없이 행복해 졌다.

*주 : 대사 표기 시 -표시와 “”의 혼용은 오타 아닙니다.


Comment ' 12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19:45
    No. 1

    피아노 방울이라.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19:46
    No. 2

    재밌게 읽었습니다. 피아노에 보이는 방울이 사랑이란 감정이었을 줄은 몰랐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20:01
    No. 3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15:27
    No. 4

    음 ㅎㅎㅎ 전 좀 더 특별한 건 줄 알았는데 단순히 피아노 방울이 '사랑'이라고 말하니까 좀 실망스러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21:52
    No. 5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5 04:22
    No. 6

    쪼끔 지루한 느낌....
    전에 보고 답글을 달까 말까 고민하다 달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6 06:11
    No. 7

    피아노 연주에 대해서 잘은 모릅니다만..좋은 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잘 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6 16:16
    No. 8

    와아 예뻐라..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9 16:13
    No. 9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9 20:56
    No. 10

    흐어어 로맨스는 역시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피아노가 나오니까 점수 이빠이 드리고 갑니다 +_+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0 16:11
    No. 11

    좋은 사람들이네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1 18:04
    No. 12

    초반에는 왠지 불안했지만..
    피아노 방울이라는 독특한 소재와 이야기, 그리고 조언자의 존재가 어우러져서 좋은 이야기로 마무리 되어진 것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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