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단편제

설명



그녀는 죽음을 염원한다

작성자
익명
작성
10.03.20 22:20
조회
3,003

그녀는 죽음을 염원한다

눈앞에는 그녀가 있었다. 낡은 의자에 붉은 드레스를 걸쳐 입은 채로 비스듬히 그녀는 앉아 있었다. 의자 아래로 늘어뜨린 가느다란 손은 애처로울 만큼 창백하게 빛났다.

시간은 멈춘 것처럼 느릿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시간 안에는 삶도 죽음도 무의미하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지그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안은 채로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낙심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녀는 이미 죽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비유도 무엇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녀는 죽은 것이다. 아니, 내가 죽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살아나기를.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던가? 막연한 시간의 흐름에서 그 찰나를 짚기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막연한 망각 속에서 눈부신 눈으로 세상이 뒤덮여 있던 때라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시기의 나는 젊고 야심만만한 전사로서 세계를 구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도울 동료를 모으기 위해 세계 각지를 전전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러던 도중에 나의 아버지의 오랜 벗이었던 고명한 마도사를 만나기 위해 황량한 산에 자리잡고 있는 탑을 방문했다. 아직 실험이 끝나지 않았다며 기다려 달라는 마도사의 요청으로 지루하게 탑을 걷던 중에 우연히 들린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진지한 얼굴로 독서에 몰두하던 그녀를 처음 만났다.

차분한 은발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아름다운 그녀는 너무나도 어울리는 은빛 눈동자로 조용히 책에 잠겨 있었다.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미친 듯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헛기침을 하고 서재를 두드리고 반응이 없는 그녀의 시선을 빼앗기 위해 나는 그녀가 읽고 있던 책을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 열중하던 책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마침내 나를 알아본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바뀌는 것을 보며 그때의 나는 빙긋 웃으며 그때의 나는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와 함께 세계를 구하지 않겠어?"

억지로 잡아당기는 내 손에 이끌려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별안간 숨이 멎은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러나 그 표정은 아주 잠시였다. 그녀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고는 스스로 고개를 가로 저은 다음에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누구시지요?"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쓴웃음을 흘리며 두 손을 책상에 얹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 급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트렌시아 렌더, …라면 알려나?"

덧붙이는 그 한마디에 비로소 그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래 바뀌었다.

내 이름은 렌더. 정확하게는 최초로 제국을 하나로 묶은, 그러나 지금은 마왕에게 멸망당하여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트렌시아 제국의 황제인 렌더의 단 하나뿐인 자식인 트렌시아 렌더 2세다.

"여기에 있다면 너도 흑마술사겠지?"

내 말에 그녀는 머뭇거리면서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를 도와줘. 함께 세계를 구하자. 아니! 그것보다 함께 여행을 가자!"

세계를 구하기 위해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나기 위해 세계를 구한다.

앞뒤가 뒤바뀐 것은 알았다.

"뭐가 하고 싶은 거예요? 여행인가요, 세계를 구하는 건가요?"

엉망진창으로 말하는 나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인 채로 그녀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나는 그 말에 별안간 얼굴이 뜨거워져서 마구잡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고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그녀를 향해 검지를 세워 보였다.

"당신이 필요해."

내 말에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처음으로 가늘게 닫혀졌다. 그리고 입술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비로소 그녀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이름은……."

그리고 우리는 함께 여행을 시작했다.

망국의 왕자인 나와 함께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여행길이 아니었다. 노숙은 흔한 일이었고 자객이 목숨을 노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나와 그 고된 길을 함께 걸어가 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포를 함께 끌어안은 채로 잠이 드는 사이가 되었다. 같이 밤을 지새고 나는 그녀에게 과거에 연인이 있었음을 어렴풋이 나마 눈치챌 수 있었다. 질투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녀 또한 내 과거에 대해 묻지 않았고 나 또한 지나간 일에 연연할 생각은 없었다.

"그때는 아무 것도 몰랐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안타까운 미소를 지은 채로 나를 두 팔로 꼬옥 껴안았다.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내 팔에 안긴 그녀에게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때의 나는 그녀의 그 감정을 조금도 알지 못했으며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었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여행이 끝난 것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발걸음이 멈춰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내 눈앞에는 평생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마왕이 서 있었다. 나와 그녀는, 그리고 긴 여행길에서 우리가 찾은 동료들은 마침내 그 지긋지긋한 숙명을 쓰러뜨릴 수가 있었다.

우리는 마침내 해냈고 드디어 기나긴 종지부에 끝을 맺었다. 그러나 기뻤던 것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마왕을 쓰러뜨리고 그녀도 쓰러졌던 것이다.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힘없이 쓰러진 그녀를 껴안고 하늘을 향해 오열했다. 그것은 공정한 거래가 아니었다. 세상의 무엇을 준다고 해도 그녀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동료의 힘을 빌어 그녀의 몸 안에 시간의 흐름을 가두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래시계는 이미 망가져 있었다. 부서진 틈바구니로 메울 수 없는 생명의 모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금씩 생명의 불이 꺼져가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아름다웠고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에 그저 웃기만 했다.

"나, 죽어 가는 데도?"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트렌시아 렌더다. 너 하나쯤 살리는 건 아무 것도 아니야."

허세를 부리는 내게서 시선을 돌린 채로 그녀는 쓸쓸히 미소지었다.

"당신은 나에 대해 몰라요. …나는 더러운 여자예요. 사실은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

"당신이 어떤 과거를 갖고 있어도 상관없어. 내가 사랑하는 것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당신이니까. …아니, 어떤 과거라도 좋아.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겠어."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래,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랬다.

"그렇네요."

내 말에 그녀는 알겠다는 듯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입가에 담긴 미소는 너무나도 쓸쓸한 것이었다. 그 슬픈 미소를 옆에 두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기분은 아플 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등을 떠밀 수밖에 없었다. 나는 뒤늦게 첫사랑이 온 소년처럼 열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사랑이 아니고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목마름이었다.

"일부러 숨길 생각은 아니었어요."

붉은 저녁놀이 어슴푸레 차 오를 무렵에 그녀는 돌연 자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말에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마음을 새겨 잡았다. 그러니까 그건 그녀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견뎌내고 이해하고 포용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서번트."

"서번트?"

"들은 적이 있나요? 저는 서번트라는 혈족이에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말없이 기울였다. 그녀가 묻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그와 같은 혈족은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모두 저처럼 은빛 눈동자에 은빛 머리칼을 하고 있어요. 그 외에는 겉으로 드러난 특징은 아무 것도 없어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보통 사람들과 구분되는 남다른 능력이 있어요. 그건, 우리에게는 잊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는 한번 본 것을 잊지 못해요. 그래서 10년 전에 본 것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해요. 하지만 그뿐이 아니에요. 정말 두려운 것은 우리의 기억이 계승된다는 거예요. 어머니의 기억이 자식에게 이어져요. 그러니까 아시겠나요? 내 기억 속에는 어머니의 기억이, 그리고 할머니의 기억이, 그리고 증조 할머니의 기억이, 그리고, 그리고, …그렇게 셀 수도 없는 기억이 쌓여 있어요. 그러니 나는 하나이면서 모두예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녀가 어째서 그렇게 젊은 나이에 그처럼 강한 마술사일 수 있는지에 대해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의 마도는 아득한 과거의 조상으로부터 계속되어 전승되어 온 것일 터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자연히 그녀가 죽어 가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나약한 몸이 그 무거운 기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것임을.

나는 그녀가 자신이 어째서 죽어가고 있는지에 대해 나에게 설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과 달랐다. 그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내 몸은 죽어가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태어났으니까요. 그래서 어릴 적에는 이런 숙명을 이해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어요. 그때의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던 거예요."

그녀는 돌연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안았다. 그렇게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로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서번트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필요해요. 그건 바로 부모 모두 서번트여야 한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어요. 그때는 그래도 혈족이 적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문제가 생겼죠. 닫혀진 세계의 우리는 점차 줄어들 뿐이니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덧 변해 있었다. 흐느끼는 것인지 오열하는 것인지, 탁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점차 정신이 아득해져만 갔다.

"언제부터인지 몰라요. 어느덧 우리 혈족은 한 쌍의 남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우리는 남매가 아니면 아무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기억은 전승되어야 했어요. 그러니 내 몸에는 근친의 피가, 그리고 나 또한 근친의 피를 섞었다는 거예요."

나는 그제야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질투하던 상대의 정체도 깨달았다. 그러나 그녀의 답변은 내 상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였어요. 내가 태어나고 어머니는 돌아 가셨으니까요. 하지만 괜찮았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있었으니까요.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으니까요.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내가 사리를 판단할 무렵이 되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녀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빌어 말했다.

"정말로 너는 네 어머니를 닮았어. 그래, 우리는 전승되는 일족이니까. 그러니 네 기억 속에는 그녀의 기억이 있을 거야. 그래, 그러니 너는 틀림없이 그녀인 거야. 그러니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너는 나의 것이야."

그녀의 턱을 타고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무서웠어요. 그토록 사랑했던 아버지의 품에서 나는 도망치려고 했어요.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어요. 도망치다 붙잡혀 매를 맞고 쇠사슬로 목이 묶여 가두어졌어요. 그리고 나는 깨달았어요. 아버지가 살아 있는 이상, 나는 이 운명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를 죽였답니다."

마지막에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그러진 입가는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도 사랑할 수 있나요? 이런 귀신같은 여자를?"

그녀의 눈동자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괜찮아. 그래도 사랑해, 영원히."

나는 답변을 망설이지 않았다. 찰나의 시간이라고 기다리게 하는 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고통이 될 것인가 명확했으니까.

"영원히?"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보석 같은 두 눈동자가 나를 빤히 보았다. 이윽고 침묵이 시간을 지배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미소보다도 환한 미소가 조용히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은 쓸쓸한 결혼식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사신 또한 바로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나날이 초췌해져 가는 그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나는 무력한 자신에 견딜 수 없을만큼 화가 났다. 하지만 그것보다 참을 수 없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병세가 깊어질수록 그녀가 조금씩 자신이 아닌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신, 누구?"

어느 날 문득 그녀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은 말투였다. 심장의 언저리가 베인 듯이 아파 왔다.

"당신? …당신이 누구인데? …당신이라면 렌더에요. …렌더가 누구? …렌더는 나의 남편, …남편이 누구지? …누가 남편이지? …당신이, …구해 줘. …구해 줘요!"

아름다운 은발을 마구 흩뜨리며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울부짖었다. 창백한 얼굴로 울부짖으며 부르르 몸을 떠는 그녀를 나는 정신 없이 껴안은 채로 울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내가 구해줄게!"

기억이 혼선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 안에 기억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며 그녀를 엉망진창으로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점차 자신이 아닌 무언가로 미쳐 가는 그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껴안고 위로해 주는 일 뿐이었다.

한번 나빠지기 시작한 증상은 가파른 능선을 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매일 자신 안에 전승된 기억들과 소리내어 싸워갔다. 이겨서 자신을 되찾을 때도 있었지만 지고 자신을 잃을 때가 더 많았다.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 안에서 나는 작아져만 갔다. 우리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나를 죽여줘요!"

우연히 정신이라도 드는 날이면 그녀는 나를 붙들고 애원했다. 이렇게 죽어갈 바에는 지금 당장 죽고 싶다고 매달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내 자신의 무력함에 울었다.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서로를 안고 있었다. 자신을 갉아먹는 병도 잊은 것처럼 그녀는 정신 없이 나를 껴안았다. 그리고 마침내 종말이 찾아왔다.

"……."

내 등에 손톱을 세운 채로 그녀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 이름을 듣고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지금? …당신, 뭐라고 했어?"

메마른 어조로 묻는 나를 보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기억해요, 당신? 내가 처음 당신을 보고 놀랐던 일을? 그건 왜라고 생각해요? 첫눈에 사랑에 빠져서? …아니에요, 그건 당신이 너무나도 그 사람과 닮았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당신을 따라가기로 결심했던 거예요."

그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말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진심인지 아닌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열에 들떠, 고통에 지친 머리가 엉켜서 멋대로 떠들어대는 말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괜찮다고,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나일 거라고, 미쳐버릴 것만 같은 자신을 억지로 짓누르려고 했다. 그러나 문득, 예전에 그녀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는 아무 것도 몰랐어요.'

그때의 자신은 아무 것도 몰랐다고, 내 품에 안긴 채로 흐느껴 울며 그녀는 말했었다. 그때의 그녀가 몰랐던 것은 무엇일까? 그건 일그러진 사랑을 하는 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연민이 아니라 그녀 또한 사랑이었음을, 그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며 뒤늦게 깨달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내 자신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내 안에 그녀에 대한 따스한 감정이 그것보다 격하고 무시무시한 무언가로 바뀌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그녀가 소름끼치는 괴물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텅 빈 껍질을 껴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나란 존재는 그저 아버지의 대신에 불과했던 것이다.

"알고 있나요?"

그녀는 내 귓가에 입술을 갖다댄 채로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한번도 사랑한 적이 없어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절망이 나락이 되어 나를 끌어 당겼다. 어둠이 내 발끝을 잡아당기며 나를 비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누구를 사랑해 온 걸까?

"…거짓말이지?"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 손을 붙잡고 물으면,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 손이 붙잡은 것은 그녀의 가녀린 목이었다.

"……."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눈앞에는 숨이 끊어진 그녀가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던 두 손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

"……."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힘없이 허리를 떨어뜨린 채로 주저앉았다. 시간이 영겁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나는 웃었다.

도망칠 길은 없었다. 내 안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그대로 쓰러져 눈을 감았다. 이대로 죽자고 생각했다. 이대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죽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악마가 내 귀에 대고 속삭여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내 머릿속의 악마는 달콤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녀를 살릴 수 있어, 라고.

나는 숨이 끊어진 그녀를 껴안고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잊혀진 폐허의 도시였다. 그곳에는 신의 이름으로 출입이 금지된 하나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강의 이름은 감론. 그것은 죽은 자도 되살린다는 물이었다.

죽은 자도 되살린다는 감론. 그러나 그것은 오랜 전설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선택의 길이 없었다. 나는 그 어떤 인간의 출입도 금지된 이곳에 내 이름을 걸고 들어왔다. 오랜 전설처럼 이곳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물을 입에 머금고 그녀의 입에 흘려주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낡은 오두막의 의자에 앉힌 채로 그녀의 부활을 기다렸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것인지 나는 몰랐다. 정신 없이 밤과 낮이 지나갔다

"당신."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두 손을 모은 채로 얼굴을 묻었다. 그녀를 향한 감정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흘렀다. 그때였다. 별안간 그녀의 몸이 움찔 떨렸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바라보는 내 앞에서 그녀의 몸이 번개에 맞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나는 허겁지겁 그녀를 두 팔로 껴안았다.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떨던 그녀의 두 눈이 별안간 나를 향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온몸이 열에 들뜬 것처럼 뜨거웠다. 그녀가 되살아난 것이다.

"아, 아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던 많은 말들이 눈 녹듯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멈춰진 시간이 다시 흐른 것이다. 나는 울음 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돌연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온몸을 비틀며 두 팔과 다리를 있어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 비틀며 오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 없이 울부짖으며 고함을 지르는 그녀를 보며 나는 뒤늦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달았다.

감론이 되살린 것은 그녀의 생명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죽음의 고통도, 기억의 고통도, 전승의 고통도, 하나도 빠짐없이 감론이 되살린 것이다.

공포와 고통, 그리고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그녀는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수족이 다른 생명체 마냥 퍼덕거렸다. 나는 그녀의 사지를 구속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부르는 그 이름에 반응하여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 부른 것은 내 이름이 아니었다. 그녀는 웃으며 그의 이름을 먼저 불렀고 그리고 울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했던 그 얼굴로 그녀는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그 한마디에는 그녀의 모든 감정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슬펐다.

기뻤다.

싫어했다.

좋아했다.

무서웠다.

행복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곁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당신이 미웠다.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다.

"사랑해."

나는 다시 그녀의 목을 졸랐다. 처음에는 나를 떼어내려고 거세게 발버둥치던 손과 발이 점차 힘을 잃고 늘어졌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울었다. 그러나 동시에 가슴 한구석에 어딘지 모를 희열도 차 올랐다. 경련이 멎자 뜨거워졌던 그녀의 체온도 빠르게 다시 식어갔다.

나는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로 널브러진 그녀의 시신을 두 팔로 껴안았다. 차가운 그녀의 몸이 열에 들뜬 내 몸의 체온을 빠르게 앗아갔다.

"사랑해, 영원히."

나는 울면서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다시 감론을 흘렸다. 이것으로 그녀는 다시 되살아 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죽음과 기억 속에 괴로워 몸부림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다시 그녀를 죽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돌연 그녀의 대한 감정으로 온몸이 떨려왔다. 나는 그것이 사랑인지 무엇인지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Comment ' 6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22:36
    No. 1

    잔인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군요. 질투에 눈이 먼 남자는 그녀를 죽이고 또 살리고. 그렇게 계속 반복하면서 과연 남자는 그것이 사랑보다 집착에 가까운 애증이란 걸 언제쯤 눈치를 챌까 궁금합니다. 잘 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15:30
    No. 2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5 15:25
    No. 3

    잘 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6 21:22
    No. 4

    음 볼만하네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0 00:25
    No. 5

    너무 잔인해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1 16:50
    No. 6

    ???
    뭘 말하려는거지...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단편제 게시판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제2회 단편제, 응모요강 및 기간 심사방법 등... +20 익명 10.03.08 7,638
83 단편 --- 이 구분선 위가 본선 진출작들입니다. +6 익명 10.04.03 9,414
82 단편 점수 주기 및 기타 테스트용 +33 익명 10.03.21 8,025
81 단편 묵혈귀마대(墨血鬼馬隊) +22 익명 10.03.20 8,730
80 단편 수중몽(水中夢) +14 익명 10.03.20 7,804
79 콩트 그곳에 이계인들이 있었다. +42 익명 10.03.20 8,793
78 단편 나는 '저거'였다 +37 익명 10.03.20 8,315
77 단편 아롱지는 피아노 소리 +12 익명 10.03.20 2,736
76 단편 (가제) 단편제 참가작 # 88 +12 익명 10.03.20 2,795
75 단편 두 개의 샬레 +9 익명 10.03.20 2,754
74 단편 블러디 에이스 +10 익명 10.03.20 2,691
73 단편 대지에 내리는 비 +7 익명 10.03.20 3,091
72 단편 Play The Game +9 익명 10.03.20 2,646
71 단편 인류를 찌르는 창. +9 익명 10.03.20 2,807
» 단편 그녀는 죽음을 염원한다 +6 익명 10.03.20 3,003
69 콩트 이곳은 대체 어디냐? +9 익명 10.03.20 3,140
68 단편 그렇게, 너는 죽었다. +9 익명 10.03.20 3,224
67 단편 라스트 불렛(Last Bullet) - 장르 좀비 아포칼립스 +11 익명 10.03.20 2,749
66 단편 +8 익명 10.03.20 2,417
65 단편 혁명 +5 익명 10.03.20 3,285
64 단편 불면증insomnia +7 익명 10.03.20 2,771
63 단편 노트 +5 익명 10.03.20 2,770
62 단편 피의 강을 오르는 연어 떼 +6 익명 10.03.20 2,827
61 단편 (가제) 단편제 참가작 # 70 +6 익명 10.03.20 2,630
60 단편 (가제) 단편제 참가작 # 45 +7 익명 10.03.20 2,480
59 단편 - 환상 가족 - +7 익명 10.03.20 2,993
58 콩트 세상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32 익명 10.03.20 4,214
57 단편 바이의 추억 +11 익명 10.03.20 2,616
56 단편 결전전야 +5 익명 10.03.20 2,596
55 콩트 무림천서 +7 익명 10.03.20 2,573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genre @title
> @subjec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