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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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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너는 죽었다.

작성자
익명
작성
10.03.20 21:18
조회
2,345

그렇게, 너는 죽었다.

‘너’는 이름이 없었다. 너는 이름 가진 자였으나 이름을 잊어버린 자가 되었다.

너는 한때 나와 같은 부모를 두고 있었다. 너는 나보다 다섯 해나 일찍 태어난 자였다. 너는 아버지 없는 나에게 그보다 더한 애정을 준 사람이었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이 미상의 박테리아는 숙주의 심박이 정지하는 순간부터 활동하기 시작하며……」

「사체의 부패 속도를 급격히 둔화시키고 운동 능력도 생전의 약 70%가량 유지시키는 것으로……」

「그러나 어째서 감염자들이 인육을 탐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어……」

나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김치의 유산균 같은 거야.”

너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주었다.

“사람을 배추로 치면, 배추는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죽는 거잖아. 그런데 유산균이 붙으면서 김치가 되는 거지. 유산균은 김치를 썩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발효 시켜.”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을 죽인다. 죽은 사람은 다시 되살아난다. 그리고 다시 살아있는 사람을 죽이려 든다. 죽은 뒤에는 어떤 인지력도, 사고력도 없으며 오로지 살아있는 인간을 찾아 헤매는 망자(亡者)가 된다. 이들은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살아있는 인간의 살점을 물어뜯긴 하지만 그것을 먹지는 않는다.

“좀비라고 부르지만 저것들이랑은 좀 틀린 듯해. 학자들이 그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해도 저것들도 썩긴 썩는다더라. 요즘 사람들이 하도 방부제 든 음식을 많이 먹어서 그런 걸까?”

너는 너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너는 바쁘게 살았다. 긴급 조직된 주민 자치회의 회의에 매번 참석을 하면서, 저금을 찾고 돈 되는 물건을 팔아 비상식량과 식수를 사놓았다.

“위에서는 감염자(感染者)라 부르라고 했대. 좀비란 이름에는 저작권이 있어서 쓰기 힘들다나……. 이런 상황에서도 저작권이니 뭐니 챙기다니, 한심하지?”

진심으로 동감했다.

그 해의 한 달 동안, 자치회는 그럭저럭 제 기능을 했다. 하지만 감염자들이 대구를 넘어 창원에까지 나타나자 자치회는 먼지처럼 공중 분해되었다. 긴급 대피령이 전국에 발령되었고 곧 이어 인구 10만 이상의 대 도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군인들이 실탄이 장전된 제식 소총을 들고 순찰을 하는 와중에 오발 사건도 끊이질 않았다. 대통령도 감염자가 된 마당에 정부가 제 기능 하길 바라는 건 무리한 요구였다.

제주도로 향하는 배들이 하루에도 수백 척 부산항을 떠났고, 그런 배들의 꼬리는 제주항에서 부산항까지 길게 이어져 있어서 마치 기다란 다리를 보는 듯했다.

“과연 저 사람들 중에 감염자가 없을까?”

너는 아직까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비상 방송을 보며 혀를 찼다.

“감염자에게 물리고, 개인적인 차이가 있지만 대개 2시간에서 3시간은 멀쩡해. 그 시간이 지나면서 열이 나고 오한이 들지. 나중에 가면 열은 내리는데 의식을 잃어. 부르면 간단한 대화 정도는 하지만 이미 사고력이란 건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 오는 거지. 그러다 마침내 심장이 정지하고, 생물적으로 죽는 거야. 30분이 지나면 여전히 심장은 정지한 상태인데 몸을 움직여. 그러면 비로소 감염자가 되는 거야.”

너는 어디서 그런 지식들을 익혔던 것일까. 서울이 죽음의 도시가 되면서 대개의 방송은 중단되었고, 긴급 재난 방송의 채널만이 계속해서 녹화된 화면을 24시간 틀어주고 있었다. 간간이 생존자 피난처 안내나 소수의 군인들이 전선을 수복 중이라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들리긴 했으나 가뭄에 콩 나듯 적었다.

“트위터는 아직 무사하거든.”

휴대폰도 안 터지는 판국에, 스마트폰으로 무선 인터넷 접속은 가능하다는 건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일부 구간이긴 하지만 전기가 들어오는 곳이 있었고, 다행스럽게도 너와 내가 살던 곳은 거기에 속해 있었다. 너는 스마트폰의 배터리 여분을 사다놓고 하루도 빠짐없이 바깥세상과 소통하였다. 가까스로 감염자들로부터 수복된 대전의 이야기와 최후의 보루였던 대구 전선의 처참한 현장 상황 등이 시도 때도 없이 업데이트 되었다. 어쩌면 그것이, 앞으로 들이닥칠 감염자들로부터 살아남는 정보를 최대한 긁어모으려는 너의 노력이었는지 모르겠다.

너는 때때로 다른 루트로 들어온 감염자들을 찾아다 죽이곤 했다. 자치회에서 나눠준 손도끼가 너의 무기였다.

“그 사람들, 몰래 트럭 짐칸 같은데 숨어서 들어와 있었던 거야. 나중에 트럭을 열었을 때는, 들어있던 그 사람들이 아니었던 거지.”

나는 딱 한 번, 네가 감염자를 상대하는 것을 보았다. 너는 원래 운동을 잘 하는 편이 아니었다. 운동에 취미도 없었다. 그런 너는 감염자를 앞에 두고 아무 망설임 없이 손도끼를 어깨 위로 들어올려, 그들의 정수리로 찍어 내렸다. 그 일련의 동작은 너무도 깔끔하고 한 마디의 군더더기도 없어 마치 베테랑 무용수의 동작을 보는 듯했다.

저 사람이 정말 내 오빠가 맞을까? 나는 너를 보기가 점점 두려워졌다.

감염자들의 이동 속도는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감염자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기에 휴식이 없었고 험난한 산과 강을 가로지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철조망에 선두가 걸리면 그 선두를 밟고 지나갔다. 해자가 있으면 차례대로 떨어지면서 그 해자를 메웠고, 메워진 위를 뒤쪽 감염자들이 지나갔다. 감염된 지 얼마 안 되는 감염자는 달릴 수도 있었다. 양산을 통해 감염자들은 부산으로 입성했다.

사람들은 그 날을 종말이라 불렀다. 아마겟돈과 라그나뢰크라 칭했고 휴거(休居)라 일렀다.

너는 사람들이 신과 종교 사이의 틈바구니에서 미쳐갈 때, 몇 안 되는 이성의 소유자였다. 너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나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이건 종말이 아냐. 신이 있다 해도 이건 종말이 아냐. 이건 생물적 재해에 지나지 않아. 이건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대 사건에 지나지 않는 거야. 몇 년 후, 교과서에는 이렇게 나와 있겠지. ‘그때는 혼란의 시기였으나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결국 극복하게 되었다.’라고 말이야.”

나는 너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나의 어머니가 그러했다. 어디선가 종교 설명회에 끌려간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처녀의 피를 뿌려야 해!”

어머니는 나의 손목을 잡고 식칼을 들어올렸다.

“처녀의 피를 대문에 뿌려야 해! 그래야만 저 악마들이 우리를 해치지 않아!”

어머니의 눈은, 한때 너와 나를 사랑하던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감염자들에 대한 공포로 현실을 도피하려는 눈이었다. 다가오는 종말을 맹신하여 스스로 광기에 뛰어든 된 사람의 눈이었다.

너는 종말에 미친 어머니를 죽이고 땅에 묻었다.

거리 곳곳에서 약탈과 방화가 일어났다. 여자들은 제 일의 사냥감이었다.

너는 나를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식량을 구하러 갈 때도, 폭도들이 집 앞에 불을 질러도, 너는 나를 지하실에 숨겨두고 절대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힘들고 괴로워도 참아야 해.”

폭도들이 급조한 몰로토프 칵테일이 지붕에서 펑펑 터지고 불씨가 날아들 때, 너는 물에 적신 담요를 더욱 강하게 조이며 말했다.

“이제 금방 끝날 거야.”

너는 말했다.

“이제 끝날 거야.”

“바리게이트의 높이만 3m입니다! 감염자들은 공간 인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높낮이의 차이를 알 수 없습니다! 시민 여러분, 부산은 감염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절대 안전합니다!”

시장은 비상 방송에서 연일 목청 높여 외쳤다. 감염자들이 서울을 공격할 무렵, 수도 방위 사령부가 괴멸될 무렵, 부산 시장은 양산 시장의 동의도 없이 부산과 양산 사이의 경계선에 높다란 콘크리트 벽을 세웠다. 억지로 넘어오려는 양산 시민들은 강제로 되돌려 보냈다. 애초에 문이란 것을 만들어 놓지 않아서, 사람들을 모두 벽 위로 던져 보냈다고 들었다. 잘못 던져진 건지, 잘못 착지한 건지, 죽어가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이나 되었다. 양산시도 양산시 나름대로 바리게이트를 쌓아올렸지만 위치가 좋지 않았다.

같은 인간이면서 그들을 죽게 내버려뒀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런 이들 중 누구도 자신의 집 한 칸을 피난민들에게 내어주지 않았다. 시에서 강제로 합방 정책을 시행하고 나서야 간신히 길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은 따뜻한 방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서로의 집을 빼앗기 위한 폭력이 끊이질 않았다. 우리가 살던 집에도 두 가족이 새로 들어왔다. 그들은 세 명, 네 명이었고 너와 나는 단 둘이었다. 그런데 방은 우리가 가장 컸다. 처음에는 아무런 기류를 읽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네 명 가족의 가장 되는 아저씨가 너에게 대놓고 쓴 소리를 했다.

“씨발 누구는 새우 잠 자야 되는데 누구는 팔다리 쭉 뻗고 자는구만.”

너는 굳이 그 불평에 대응하지 않았다. 그게 가장 현명한 것을 알아서다.

어느 날 배급소에서 건빵을 받아왔을 때, 나는 종전의 가족들이 사라진 것을 알았다. 너는 그때 욕실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어디선가 감염자라도 나타난 것일까. 너의 손도끼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나는 그 두 가족들이 어디에 갔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나쁜 소식이 있어. 들어볼래?”

너는 새파래진 얼굴로 내 의사를 물었다.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현실이 지옥이라도 똑바로 쳐다보아야만 하니까.

“먼저 첫 번째로, 호주에 도피 중이던 임시 정부 수반들, 그러니까 총리와 몇몇 장관들, 국회의장, 대법원장들이 모두 사망했대.”

너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들이 죽었다는 것에 분노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죽을 거면서 국민들을 버리고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간 그 작태가 심히 역겨워서 그랬으리라.

“그리고 그나마 감염자들로부터 안전지대라 불리던 호주도 이제는…… 감염자들 천국이야.”

사람들은 섬이라면 무조건 안전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섬이야 말로, 감염자가 나타났을 때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감옥이란 건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 이 세상에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있기는 한 걸까?

“마지막으로.”

너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더니 어렵게 입을 뗐다.

“대피령이 내려졌어.”

너는 답지 않게 말을 계속 끊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이 근방에다 폭탄을 떨어뜨릴 거야.”

“최신예 무장 전투기가 목표지점을 정확히 폭격할 겁니다! 현재 바리게이트에 몰려있는 감염자들은 단 하나도 남김없이 처리됩니다! 국민 여러분, 부산은 감염자들로부터 절대 안전합니다!”

임시 국가 수장이 된 부산 시장은 이제 시민들이라 하지 않고 국민들이라 불렀다. 그는 최선을 다해 그의 국민들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대피령은 유효했다. 너와 내가 살던 구역은 양산과 인접해 있어서 최우선 대피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병력은 최후 방어선은 서면과 동래에 집중되어 있어서 우리를 이송해 줄 군인 따윈 없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안전 구역까지 이동해야 했다. 폭도들도 이미 도망친 마당에 걱정되는 건 바리게이트를 넘어 온 소수의 감염자들 무리와 마주치는 일이었다. 이들은 이미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좀처럼 쉽게 죽지 않는다. 고통도 모르고 공포도 없다. 무조건 살아있는 사람을 향해 돌진할 뿐.

“머리를 노려야 해. 무조건 머리야. 절대 그것들이 살아생전 인간이었다는 걸 떠올려선 안 돼. 저들은 병 든 짐승이야.”

손도끼를 숫돌로 갈면서 스스로를 세뇌시키듯 말하는 너의 모습에서 나는 더할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그러나 모든 준비를 마친 너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가자.”

남아있는 식수와 비상식량, 기초 상비약, 갈아입을 속옷 등 필요한 것들을 모두 한 짐에 싸서 짊어진 뒤,

너와 나는 집을 나왔다.

어디로 가느냐는 나의 물음에 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군사 기지.”

그리고 덧붙였다.

“자유는 줄어들겠지만, 이 세상 어디보다 안전한 곳이 바로 군대야. 거기는 항상 전쟁을 대비해서 물과 음식이 늘 충분히 마련되어 있거든.”

기지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대부분의 도로는 폐쇄되었고, 그나마도 바리게이트로 인해 이동이 힘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너에게 2인승 스쿠터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연료가 떨어지면 보충할 장소가 없기 때문에 불안하다고, 너는 말했다. 길거리에 버려진 자동차에서 빼면 되지 않느냐, 고 내가 말하자 너는 기특하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슬픈 얼굴로 그건 힘들다고 했다.

“요즘 자동차들은 다 연료 주입구에서 휘발유를 빼가는 걸 방지하는 장치가 있어. 조금 오래된 차면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래.”

네 걱정과 달리, 너와 나는 기지로 가는 도중 두 번 정도 오래 된 티코와 스텔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는 거기서 약간의 휘발유를 얻었다. 그것도 잠시. 배터리가 방전되어, 너의 스쿠터는 쓸모없는 쇳덩이가 되었다. 결국 이렇게 되리란 걸 알았던 걸까. 너는 커다란 등산 가방에다 짐들을 우겨넣고 걷기 시작했다.

낮에는 이동을 하고, 밤에는 야영을 했다. 버려진 폐허 속 건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근방에는 깡통에다 실을 연결하여 조잡한 경보 장치를 만들었다. 콘크리트의 시체 속에서 잠이 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나마 따뜻한 방바닥에서 잠을 청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감내해야 했다. 운 좋게 방수포를 찾은 날은 평소보다 더 편하게 잠이 들었다. 대체로 밤은 평온했다. 어쩌다가 감염자와 마주치는 날이면, 너는 손도끼만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새벽이 되어서도 돌아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잠도 자지 않고 벌벌 떨었다. 혹시 너는 나를 버린 것이 아닐까. 귀찮아서? 아니면 내가 지겨워서? 나는 너에게 그리 좋은 가족이지 못했다. 그래서 너는 내게 복수하는 것일까? 이런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 안에 나를 버려둔 채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손톱을 물어뜯다 보니 피가 나왔고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여명의 동이 트고 아침 해가 종말 이전과 전혀 다를 바 없이 떴을 때, 너는 돌아왔다. 두 손 가득 식량과 물을 들고서.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집을 떠난 지 5일쯤 되었을까. 여느 때와 달리, 근방에 머무를 만한 건물이 없었다. 아니, 있긴 했어도 거기에는 이미 다른 무리들이 자리를 친 뒤였다. 너는 그들과 합류하는 건 감염자들과 함께 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판단했다. 사실이 그랬다. 종말의 날 이후로 감염자들로부터 격리된 구역은 안의 사람들 간의 분열로 괴멸되었다.

어쩔 수 없이 대로변에 버려진 자동차 창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잤다. 배터리는 방전되어 있었고, 연료도 당연히 없었다. 너는 네 몫의 모포를 내게 씌워주며 말했다.

“미안해.”

나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너의 머리 뒤쪽으로 번뜩이는 섬광을 본 것이다.

그것은 곧 이어 엄청난 굉음(轟音)을 몰고 왔다. 눈부신 빛 다음에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것은 어두운 북극 밤하늘의 오로라처럼 붉은 색의 띠를 펼치며 지평선을 뒤덮었다.

전투기 편대가 머리 위를 지나면 그들로부터 붉은 빛이 날아가 저 멀리서 폭발했다. 그곳은 너와 내가 떠나온 방향이었다.

우리가 살던 집, 우리가 머물던 동네는 밤하늘의 붉은 불꽃과 함께 영원히 사라졌다.

너는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나는 너의 등에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 걷고 또 걸어, 너와 나는 마침내 미군 기지에 도착했다. 이미 그곳은 너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헌병들이 기지 정문을 걸어 잠그고 출입과 보호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가로막았다. 얼마나 사람이 많았던지, 여기로 오면서 보았던 그 적막의 원인은 이 기지가 아닐까 싶었다. 어처구니없던 것은, 기지 인근에는 이미 사람들이 텐트촌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거기에는 시장과 음식점, 심지어 술집도 마련되어 있었다. 미군 기지에 연줄이 있는 사람은 미군 비상식량(너는 그걸 C-레이션이라 불렀다)이나 따뜻한 온수, 사제 속옷을 받아다 시장에 팔기도 했다. 종말이 다가와도, 결국 사람 사는 건 변하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희열도 느꼈는데, 그건 저 감염자 무리가 전 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아도 결국 우리 살아있는 사람은 어디서든 다시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고, 또 살아간다는 자긍심 때문인지 몰랐다.

“기지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 건가.”

너는 그런 것에 일절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거대한 철책 너머의 기지를 바라보았다.

피난민 등록을 하는 부처가 마련되어 있어(그래봤자 A형 텐트 안에서 군인 두 사람이 작은

테이블 위에다 손으로 작성하는 게 다였다) 너와 나는 H구역을 배정받았다.

“H라니, 무슨 지옥(Hell)도 아니고.”

너는 농담이라면서 던졌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머쓱해진 너는 서둘러 인솔자를 따라갔다. 피곤에 지친 인솔자는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백인 여성이었다. 입고 있는 군복의 완장에 군의관 마크가 붙어있었다.

“B형 텐트 한 개에 8명이 들어가서 생활하는 걸 원칙으로 합니다.”

놀라울 정도로 매끄러운 한국어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각 구역마다 공용 화장실은 2개가 있습니다. 매일 8시와 16시, 22시에 청소를 하는데 이때는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식사는 6시와 12시, 17시 세 번 제공이 되며 배식 담당은 일주일 단위로 바뀝니다. 몸이 아프면 각 텐트의 조장에게 전달해서 적절한 조치를 받도록 하고…….”

상황은 예상보다 열악했다. 시스템은 잘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에 대한 인프라는 난민촌에 비할 바 없었다. 아니, 이곳이 바로 난민촌인가? 침울해져 있는 내게, 너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가나 초콜릿 바를 내밀었다.

“시장에서 팔아.”

너는 몇 가지 간식거리를 더 꺼내보였다. 이미, 종말의 날 이전에는 시시한 군것질거리였던 것이 이제는 엄연한 주식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한국 돈은 안 받더라고. 달러나 아니면 패물만 받던데…….”

나는 너에게 더 이상의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다는 걸 안다. 오직 단 한 가지. 트위터로 소식을 주고받던 스마트폰을 제외하면.

“아껴서 먹어. 듣자하니 배식되는 건 멀건 수프랑 양배추가 다라더라.”

너는 그래도 웃었다.

그 날, 나는 열병이 나 자리에 눕고 말았다.

“군의관이 말했다니까요. 아프면 조장한테 말해서 진찰을 받게 하라고.”

“태평한 소리하고 있구만. 누군 아픈 사람이 없는 줄 아나? 말만 하면 가 의사한테 보일 수 있는 줄 알아? 세상 바뀐 걸 모르고 있군!”

너와 조장이 다투는 소리가, 어지럽고 몽롱한 의식 가운데서도 또렷이 들려왔다.

“그럼 약이라도 받게 해 주시던가요.”

“약도 없어! 있어도 기지 안에 사람들한테나 먼저 가지, 여기 텐트촌 사람들한테는 그 찌꺼기나 올까 말까야.”

잠시 후, 너는 조용히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텐트 안에는 나 혼자였다. 다들 일과 작업을 하러 나간 것이다.

“조장이 나아질 때까지는 푹 쉬래.”

열 때문에 기억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너는 그때 일과 작업 중이었다. 머리에 공사용 안전모를 쓰고 있었으니까.

“나는 텐트촌 앞에서 도로를 복구하고 있어. 일이 조금 힘들긴 한데 수당이 세서 할 만해.”

그러더니 앞주머니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냈다.

“이거 식권인데, 배식되는 음식 말고 다른 것도 이걸로 살 수 있어. 먹고 싶은 거 없어?”

나는 대답할 힘도 없었다.

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다른 사람 중에, 널 돌봐 줄 사람이 없나 알아볼게.”

가지 말라 말하고 싶었다. 조금만 더 있어 달라고. 이 세상에 이제 너와 나 둘 뿐인데.

하지만 너는 떠났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저녁 배급 시간이 조금 지나, 한 여자가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당신 오빠가 날 샀어.”

그 여자에게선 오래 빨지 않은 걸레 냄새가 났다.

“당신 오빠 말인데, 고자야? 왜 여자를 샀는데 이런 허드렛일이나 시키는 거지?”

나는 너의 말을 떠올렸다. 돌봐줄 사람을 보낸 것이다.

“아 미안, 내가 너무 내 말만 했지? 나는 텐트촌 술집에서 일하고 있어. 설이라고 해.”

그 여자, 설은 참으로 말이 많았다.

“술이라 해봐야 군인한테 납품되는 맥주가 고작이야. 그런데도 인기 무지 많다 이거? 그런데 가격이 너무 비싼 거 있지. 술집에서 하루 10시간 일해도 식권 세 장밖에 못 받아. 그런데 한 번만 몸을 팔면 맥주 두 병은 받을 수 있어. 이거 수지맞는 얘기지?”

나는 직감적으로 설이 나에게 매춘을 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너도 잘 생각해 봐. 여기가 세상의 끝이라 해도 여자랑 하고 싶어 하는 남자들은 끊이질 않아. 운 좋아서 기지 내 장교라도 낚잖아? 그럼 그 날로 좁은 텐트촌 생활은 끝, 24시간 따뜻한 물에 샤워도 하고 식사는 매끼 소고기 스테이크에 한 달에 한 번씩 댄스파티까지……. 완전 천국이 따로 없다니까. 나 아는 언니도 기지 병사랑 결혼해서 지금 애들 낳고 잘 살고 있어. 여기서 출세하려면 이게 가장 빠른 길이야.”

나는 더 이상 그 더러운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모포를 뒤집어쓰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설이 말했다.

“그리고 너 오빠도 더 이상 고생 안 해도 돼.”

귀가 쫑긋, 선다는 건 그런 뜻일 거다. 멍하기만 하던 의식이 순간 맑아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너 모르고 있었어? 너 오빠, 낮에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경계 근무서고 그러잖아. 꽤 유명해. 하루에 잠을 3시간도 못 자는 사람이라고 다들 그러던데. 그러면서 술도 안 마시고, 식권으로 자기 먹을 것도 안 먹고 다닌다고.”

설은 그것도 몰랐냐는 식으로 말했다. 몸을 파는 여자에게 이보다 더 한 수치심을 느낀 적 없었다. 생면부지의 남이 오히려 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잘 생각해 봐. 너도 오빠한테 계속 의지하면 안 되잖아, 그렇지?”

설이 나가자 다소 숨 쉬기가 편해졌다. 그러나 머릿속은 전보다 더 아팠다.

나는 도대체 너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너는 나에게 왜 이리 잘해 주는 것인가. 단지 피가 섞인 가족이라? 너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은 열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너에게 따지듯 물었다. 왜 나한테 잘하는 거야. 사실은 귀찮잖아. 죽여 버려. 엄마한테 그랬던 것처럼.

너는 아무 대답도 없이, 펄펄 끓는 나의 이마에 차가운 수건을 얹었다.

이제와 아무 소용없지만, 그래도 너에게 고백한다. 그때 그 말, 진심이 아니었다.

하루가 지나고 또 지나 이틀이 지나도 내 몸은 나아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날도 너의 식권으로 설이 바꿔온 빵은 한 조각 간신히 넘겼다. 일이 끝나고 우리 텐트 여자들이 돌아오기 전, 너는 왔다. 평소보다 다소 상기된 얼굴로.

“실험 지원자를 받는대.”

너는 무척 기쁘게 말했다.

“감염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백신을 만든다는 거야. 거기 실험 지원자로 참가하면 방 두개에 전용 화장실까지 있는 룸을 평생 제공해 준다는 거야.”

너의 기쁨이 나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건 종말 이전, 너도 해 본 적 있는 병원에서의 모르모트 실험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틀려, 조금 틀려. 시약품 시험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한 거였거든. 하지만 이번 건, 인류를 위해서 하는 거야.”

하지만 너도 말했다. 안정된 주거지를 대가로 얻는다며. 너는 그 대가에 넘어간 것인가. 단지 나를 위하여?

“걱정 하지 마. 위험한 건 아니니까.”

그 다음 날, 군의관이 직접 내가 머무는 텐트로 와 진찰을 하고 주사를 놔주었다. 열은 거짓말처럼 씻은 듯 나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너처럼 실험체가 되길 자원한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건이 무척 까다로워 그들 중 대부분은 탈락하고 말았다. 흡연을 하는지, 간염을 앓은 적이 있는지, 피부를 10cm이상 절개하는 수술을 받은 적 있는지, 호흡기성 질환이 있는지, 달걀 알레르기가 있는지, 정신과 상담을 한 번이라도 받은 적 있는지……. 몇 십 가지의 조건에 적합한 사람만 지원할 수 있었다. 너는 그 중 하나였다. 그 날, 군의관이 와서 너와 나의 이주 일정을 일러주었다. 군의관은 그러면서 너의 피를 조금 뽑아갔다.

“어머? 너도 가는 구나?”

설은, 그녀의 소원대로 기지 내 사람과 접촉한 듯했다. 내가 기지로 들어가는 군용 트럭에 타던 날, 그녀는 내 옆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기지 내 생활이 천국 같은 건 아니었다. 한때 연병장이었던 곳은 텃밭으로 가꾸었는데 땅이 좋지 않아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기지에 비축해 놓은 건조 식량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고, 식단표의 고기반찬은 한 달에 두 번 나올까 말까였다.

“있지, 오늘부터 당분간 연구실에서 지내야 해.”

기지 내 생활 일주일 되던 날, 너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한 달 정도 집중 치료실에서 연구를 계속한다고 그래. 나 말고도 지원한 사람이 열 명 있었는데 그 사람들 다 탈락했어. 설이 씨한테 나 없는 동안 돌보아 달라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한 달 뒤에 다시 만나자.”

이곳의 병사들은 텐트촌의 난민들처럼 얼굴에 생기란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 텐트촌의 술집에서 여자를 사고 오는 날이면 묘하게 기운이 나는 듯했지만, 잠깐이었다. 무엇보다 공식적으로 기지 사령관은 민간인의 매춘을 금지하고 있었으며, 그건 병사들에게도 해당되었다. 즉 여자는 사는 것도 군법 위반이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텐트촌의 몸 파는 여자를 기지 안으로 불러들여다 위안부로 삼았다. 기지에 있는 텐트촌의 여자들의 대부분은 그런 여자들이었다. 몇몇 병사들은 지나가는 나를 보며 이렇게 묻기도 했다.

“Hey, how much are you?”

짧은 영어 실력이었지만, 그게 나를 사고 싶다는 뜻이란 건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더욱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건, 우리가 배정받은 숙소는 병사들의 막사를 개조한 것이 아니라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마치 연구소 같은 건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설도 나와 같은 곳에 있었다.

“뭐 어때. 더 잘 됐지. 원래 막사로 쓰던 데는 쥐도 나온다고 하던데.”

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도대체 너는 무슨 실험을 받고 있는 걸까. 나는 고집을 부려 실험실 견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 설은 그냥 호기심 강한 계집아이의 변덕이라 여기고 내 말을 들어주었다.

“기지 사람한테 물어볼게.”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은 텐트촌에서 우리를 인솔했던 군의관 마크를 단 여군이었다.

“난 실비아라고 해. 지위는 중위.”

실비아 중위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지친 눈동자였지만 애써 나를 위해 웃어주었다.

“우리는 감염자들의 뇌수에서 미상의 박테리아를 발견했어. 우리는 그 박테리아를 의도대로 배양하는 데 성공했고, 몇 가지 동물 실험을 통해 그 박테리아가 감염자들을 감염시킨 원인이란 걸 알아냈지.”

실비아 중위는 일반인 출입 금지 구역으로 나를 데려갔다. 벽과 천정, 조명까지 모두 새하얀 곳. 중간 중간 영어로 표기된 실험실이 있었고, 방탄유리가 실험실과 복도 사이에 설치되어 있어 나도 실험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대개의 실험실 안에는 흰색 쥐와 토끼, 비글 같은 실험용 동물들이 우리에 갇혀 있었다.

“백신 만드는 법을 아니?”

고개를 저었다.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인 항원을 약한 상태로 배양시켜, 그걸 건강한 실험체에 주입시켜 실험체 스스로 그 항원에 면역이 생기도록 하는 거야. 그렇게 생긴 항체가 백신의 원료가 되는 거란다.”

복도의 끝까지 왔을 때 나타난 건 또 다른 금지 구역이었다. 방역 마스크를 쓰고 실탄이 장전된 소총을 든 헌병들이 방호 셀터 앞을 지키고 있었다. 실비아 중위가 ID카드를 보여주자 헌병들은 박사와 나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안에는 우주복처럼 생긴 방호복이 마련되어 있었다. 박사는 내가 입는 것을 도와주고 본인도 착용을 했다. 기다란 산소 호스를 연결한 다음 안쪽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기서 50평 규모의 연구실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다 방호복 차림이었고 듣도 보도 못한 실험 기구들이 즐비했다. 연구실 안쪽 입구에 역시 무장한 상태의 군인이 살기등등한 채 근무 중이었다. 연구실 한쪽에는 실험용 컨테이너가 있었는데, 커다란 튜브가 거기 연결되어 있는데다 따로 잠금 장치까지 되어 있어서 한눈에 보아도 그 컨테이너 안에 굉장히 중요한 게 들어있는 걸 알았다.

“중위, 곤란해요. 민간인을 섹터B까지 데려오다니.”

한 남자가 실비아 중위에게 다가오며 항의했다. 나를 힐끔거렸는데 영 못마땅하단 표정이 방호복 바이저 너머로도 아주 잘 보였다.

“게다가 마테리얼B는 실험 단계입니다. 외부로 공개될 만한 사항이 아니에요.”

“염려마세요 닥터 조. 이 아이는 B의 친족입니다.”

“그렇다면……?”

“B의 친족이라면, 이 아이도 가능성이 있는 거지요.”

실비아 중위가 의미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닥터 조라 불린 남자도 따라 웃었다.

“잘 되었군요. 안 그래도 반응 실험 때문에 꼭 필요했었는데.”

“B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직접 보시겠습니까?”

닥터 조는 실비아 중위와 나를 컨테이너로 안내했다. 컨테이너에는 사람 눈높이만한 곳에 작은 가리개가 씌어져 있었다. 거기에만 강화 유리가 있는 듯.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몰라도 무척 조용했다. 실비아 중위는 내가 보기 쉽도록 낮은 의자를 받쳐다 주었다. 나는 한 점의 의심도 없이 가리개 앞에서 컨테이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실비아 중위가 닥터 조를 향해 고개를 끄덕했다.

닥터 조가 가리개를 걷었다. 안쪽에는 어둠뿐이었다. 아니, 무언가 있었다. 그건 무시무시한 속도로 강화 유리를 향해 달려왔다. 쿵, 부딪혔다. 핏발 선 두 눈. 눈두덩의 핏자국, 검은 진액이 흐르는 치아, 새파란 입술.

거기에 감염자가 있었다.

너였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실험은 감염자를 다시 정상으로 고치는 프로젝트가 아니야. 감염자에게 지능을 부여하는 게 목적이지.”

실비아 중위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최소한 감염자가 약간의 지능만 지니게 되면 그걸로 성공이야. 덤으로 같은 감염자를 공격하도록 훈련시킬 수 있다면 금상첨화고.”

매캐한 연기가 코와 입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가슴에는 이미 그보다 더 독하고 무거운 납덩어리가 가득 차있었다.

“지난 이틀 간 지능 테스트 결과 이제야 돌고래 수준의 IQ를 기록했어. 이건 정말 대단한 결과야. 이제 남은 테스트는 하나 뿐이야. 감염자와 감염자가 아닌 사람을 인식하는가.”

실비아 중위의 피곤해하지만 다정했던 얼굴은 벗어버린 가면처럼 사라졌다.

방호복 차림의 군인들이 강제로 나를 탈의실로 데려갔다. 그들은 내 옷을 벗기고 옆이 터진 환자복을 입혔다. 그리고 이마에다 초록색 물감을 칠했다. 반항하려 해도 내 연약한 팔다리는 그들에게 어린아이의 것이나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밀폐 공간에 혼자 내버려두었다. 방 하나의 중앙이 투명한 벽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나는 구석에서 무릎을 가슴에 붙이며 떨고 있는데,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나와 같은 차림의 여자가 들어왔다. 설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설의 이마에는 붉은 물감을 칠했다는 것. 설은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으며 내보내달라 사정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하나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설은 나와 다른 칸 구석에서 등을 돌린 채 계속 흐느꼈다.

“난 잘못한 거 없어. 남자들이 하고 싶어 해서 대 준 거 밖에 없단 말이야…….”

밀폐된 방에 공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 건 그 직후였다. 방 전체가 움직였다. 설이 비명을 질렀다. 갑작스런 변화보다 설의 비명이 더 짜증났다. 움직임이 멈추자, 뒤이어 방의 한쪽 벽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무슨 영문인지 그제야 알았다.

내가 있던 방은 너의 컨테이너와 합쳐진 것이다. 그리고 컨테이너 안에는 너와 또 다른 감염자가 있었다. 오랫동안 살아있는 인간의 살점을 맛보지 않았던 탓일까. 감염자, 그리고 너의 눈에는 푸른 안광마저 비치는 듯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와 다른 감염자는 설을 향해 달려들었다. 컨테이너의 창을 통해 실비아 중위와 닥터 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설의 비명은 너의 손이 그녀의 혀를 뜯어내면서 끊어졌다. 설의 눈물은 감염자의 손톱이 그녀의 눈알을 긁어내면서 멈췄다. 설의 신음은 너의 이빨이 그녀의 목을 찢으면서 사라졌다. 설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났다. 나도 이제 곧 저렇게 되겠지, 체념으로 공포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타인에게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군.”

닥터 조가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저들이 다음에 무슨 짓을 할지, 본능이 알려주었다. 너와 감염자, 그리고 나 사이를 가로막던 투명한 벽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감염자는 아직도 피가 모자라는 듯 괴성을 지르며 다 올라가지도 않은 벽을 긁어댔다. 그리고 빠져나올 공간이 만들어지자, 맹수처럼 나를 덮쳤다. 그래, 이대로 죽어도 좋다. 너에게 죽을 바에야 차라리 안식의 세계로…….

그러나 안식은 오지 않았다. 대신 눈가로 한 방울 피가 튀었다. 무엇이었을까. 눈을 뜬 광경 앞에는, 나를 향해 덤벼들던 감염자를 옆으로 밀쳐내는 너의 모습이 있었다. 감염자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에게 다시 뛰어들었다. 너는 온 몸으로 감염자를 밀쳐냈다. 감염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너는 설에게 그랬듯 감염자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너의 손이 감염자의 입을 뚫고 머리 뒤쪽으로 나왔다. 감염자는 아직도 두 눈에 광폭한 눈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아아, 너는 나를 혼자 독차지 하려는 구나. 너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심장이 떨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차라리 행복했다. 너의 손이 내 얼굴에 닿았다. 끝내버려라. 단 한 번에.

그러나 너의 손끝은 나의 목 줄기를 뜯는 것 대신, 얼굴에 묻은 감염자의 피를 닦아주었다.

깜짝 놀란 눈으로 너를 보았다. 너의 눈에는 더 이상 광기가 들어있지 않았다.

오랫동안 보아온 나의 가족. 너는 변한 게 없었다.

너는 죽지 않았다.

“성공이야!”

실비아 중위의 환호성.

“마테리얼B는 친족에게 반응했어요!”

“이제 이 지옥도 끝이로군!”

닥터 조의 박수소리. 연구원들은 일제히 소리 높여 웃음을 터트렸다.

누구도 고기조각이 된 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같은 감염자에게 보여준 그 폭력성은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더구나 감염자는 같은 감염자를 공격하지 않아요. 마테리얼B는 예상대로 감염자를 공격하는 감염자가 된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 조건이 있어요. 우리는 아직 우리의 명령대로 따르게 할 정도의 지능은 회복시키지 못했단 거죠. 보시다시피, 혈육을 이용한다는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만 마테리얼B는 반응을 하지 않았나요?”

“그럼 이런 건 어떻습니까. 저 아이를 높은 곳에다 매달아 놓고 감염자 사이로 무인 차량을 지나가게 하는 겁니다. 감염자는 매달린 아이를 물려할 테고, 그럼 마테리얼B는 거기에 반응해서 차량에 접근하는 감염자를 공격하게 될 거고요.”

“좋은 방법이지만 혼자서 그렇게 많은 전과를 이룰 거라 여겨지진 않아요.”

“마테리얼B는 어차피 초기 타입이 아닙니까. 앞으로도 계속 같은 시리즈를 양산하고 개량할 수만 있다면…….”

너의 말을 떠올렸다.

가장 무서운 건 사람이다.

너와 나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커다란 지게차가 컨테이너 채 우리를 싣고 움직였다.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 두려워하는 내게 너는 가까이 다가왔다. 안심하란 뜻이었을까. 너의 눈은 어느 때보다 슬퍼보였다. 너의 손은 내 머리를 만지려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서서히 썩어가는 청자색의 피부를 염려해서일까. 나는 너의 손목을 잡아다 너의 손을 내 머리로 올렸다.

닥터 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너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을 알고 있던 걸까. 너는 뛰어들었다. 닥터 조 옆에 있던 군인이 기다란 막대기로 너를 밀어냈다. 너는 벽이 등과 맞닿은 채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휴, 성질하곤.”

닥터 조는 십년감수했다는 듯 넥타이를 풀었다. 이곳은 이미 멸균실이 아니었다.

“꼬마야, 너도 간만에 바깥 공기 좀 쐬어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닥터 조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강제로 내 손목을 채어다 밖으로 끌어냈다. 너는 뭉개진 성대로 바람소리를 내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도 있는 힘껏 박사를 밀치고 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닿지 못했다.

닥터 조에게 끌려가던 중, 나는 그의 주의가 소홀해진 틈을 타 아무 곳으로나 달렸다. 어차피 곳곳에 설치된 CCTV에 들키겠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저 남자 주변의 공기를 마시기 싫었다. 어디까지 도망쳤던 걸까. 생전 처음 와보는 장소에 있었다. 커다란 창고 같았다. 여기저기 건설 자재나 드럼통이 널려있었다. 안쪽으로 계속 걸었다. 생각보다 넓었다. 그러다 마침내 창고의 끝에 도달했다.

거기에는 마치 버스 같이 생긴 헬리콥터가 있었다. 커다란 프로펠러가 앞쪽에 하나, 뒤쪽에 하나 있었는데 그 크기는 어지간한 탱크도 들어갈 수 있을 듯했다. 그렇지만 이곳에 왜 이런 것이? 내 고개를 자연스레 위로 향했다. 천정은 마치 돔의 해치처럼 닫혀 있었다. 하지만 헬리콥터가 필요하면 언제든 열리겠지. 나는 아무 바닥에나 엉덩이를 붙였다. 미군은 이 헬기를 타고 도망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예상일뿐이지만, 저 커다란 헬기는 이미 연료가 가득 채워져 있을 것이다. 저 정도 크기면 여기서 미국이나 다른 어디든 중간에 기름을 채우지 않아도 갈 수 있을지도.

그러면 나는, 너는 어떻게 되는 걸까. 다시 버려지는 걸까?

청승맞게, 죽은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나를 죽이려 했다. 너는 나를 살리기 위해 엄마를 죽였다.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야 그 생각이 난 게 슬퍼졌다. 왜냐면, 이제 이 세상에는 나 혼자만 남았기 때문…….

발소리가 들렸다.

“너희 남매는 미국에 갈 거야.”

언제 온 걸까. 실비아 중위가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이 기지는 오래 못 가. 위성사진으로, 대규모의 감염자들이 이곳을 향해 몰려오고 있는 게 밝혀졌어.”

실비아 중위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심드렁히 말했다. 그렇다면, 기지 밖의 사람들은?

“그곳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부가 제 기능을 하고 있어. 거긴 감염자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곳이지. 마테리얼B와 너는 그곳에 가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실비아 중위는 내 눈길을 느꼈는지 말을 멈췄다. 하지만 잠시였다. 성난 강아지가 짖어봐야 시끄럽지도 않다는 듯. 그녀는 오히려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순간 온 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해서, 바로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 남은 그녀의 손은 군복 주머니로 들어갔다.

“미워해도 상관없어. 지금은 인간성이니 하는 건 다 고리타분한 세상이니까. 미워하려면 얼마든 미워해. 하지만 이런 걸 한 번 생각해 봐. 네 오빠가 죽어 마테리얼B의 원형이 되었어. 마테리얼B는 이제 곧 여러 가지로 연구가 될 테지. 그리고 조만간 우리는 감염자에 대한 완벽한 박멸법을 알게 될 거야. 인류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라고.”

실비아 중위는 눈앞의 거대한 헬리콥터로 눈길을 돌렸다.

“너희는 인류의 희망이야.”

나는 중위가 배정해 준 안전 컨테이너 감옥에서 갇혀 지냈다. 그 날 이후로 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중위가 배려해 준 덕에 식사와 위생은 불만이 없었다. 그렇겠지, 그녀에게 있어 나는 유사시 너를 대신할…….

실비아 중위가 말한 날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발단은 북서부 지역의 무차별 폭격이었다. 그 날의 폭격으로 생긴 열기와 빛, 소음이 감염자들의 감각을 자극시켜 모두 이쪽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기지의 모든 병력이 저지 라인을 형성했지만 지지부진했다. 북쪽에서부터 넘어온 대규모 감염자 군단은 그야말로 물밀 듯 몰려왔다.

감염자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은 전염병보다 더 빠르게 텐트촌 난민들 사이로 퍼졌다. 흥분한 난민들은 헌병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너도나도 철책을 넘었다. 당황한 헌병이 실탄을 발사하였다. 피를 본 난민들은 폭도로 변했다.

헌병들을 밟아죽이고 강제로 철책 문을 열었다. 그건 정말 잘못한 짓이었다. 그들이 열어놓은 문으로 감염자들이 그대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군인들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기지 방어에 들어갔지만 폭도들은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감염자들에게 밀려들어오는 난민 앞을 가로막는 군인의 사격에 쓰러지던가 아니면 감염자에게 물리던가, 둘 중 한 가지를 택해야 했다. 어차피 죽는 것이라면 앞으로 향하는 길을 택해야 했을까. 너나 할 것 없이 군인들에게 돌격했다. 명령 체계는 절대적이었다. 상관의 명령도 필요 없었다. 군인들도 저희들이 살기 위해, 감염자가 아닌 난민들을 죽였다. 그에 광분한 난민들은 총 쏘는 군인들을 죽이고, 그러다 뒤에서 몰려드는 감염자에게 물려 감염자가 되고…… 웃지 못 할 아이러니가 펼쳐졌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저곳이다.

“이리 와! 어서!”

닥터 조가 내 손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밖으로 나갔는데 그곳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기지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지고 감염자에게 쫓기는 난민, 뒤로 후퇴를 거듭하면서 난사하는 군인. 그들을 덮치는 감염자 무리.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리로!”

비교적 안전하다 판단되는 곳으로 그는 나를 이끌었다. 도망치는 난민들이 이리저리 와 부딪혔다. 그런데 그 지나치는 사람 중 누군가 닥터 조의 어깨를 물었다. 감염자였다. 닥터 조는 급한 데로 호신용 권총을 마구 갈겼다. 운 좋게 그 중 한 발이 감염자의 턱 밑에서 위로 정수리를 관통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많은 피를 흘렸다. 어깨 죽지가 벌겋게 물들었다.

“되는 거 하나 없네…….”

그는 자기 꼴을 보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권총을 겨눴다. 온 몸의 털이 비죽 섰다.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쓰러진 건 그였다. 뒤를 보니, 권총을 든 실비아 중위가 있었다.

“다친 데는?”

무슨 대답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실비아 중위는 내 손을 잡고 달렸다. 일전에 보았던 격납고 방향이었다. 가는 와중에도, 감염자와 뒤섞인 난민들이 중위의 군복을 보고 달려들었다. 그녀는 다가오는 적들에게 권총을 발사했는데, 사실 누가 감염자고 누가 난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난민이나 감염자나 거기서 거기였다.

헬리콥터는 이미 엔진을 예열 중이었다. 그리고 너도 있었다. 입과 손, 발을 결박당한 채 들것에 묶여 있었다. 나는 상황이 상황임에도, 너를 다시 만난 게 반가워 너를 꽉 안았다. 재회의 기쁨은 거기까지였다.

“데려가요!”

감염자들은 격납고 밖까지 들이닥쳤다. 떠나야 할 때였다.

주 조종사가 뭐라고 외쳤다. 영어라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실비아 중위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저들의 대화 속에서 내가 알아들은 단어는…… 무게, 초과, 연료, 시간, 부족……. 다 알아들을 필요는 없었다.

주 조종사가 다시 뭐라 하면서 너를 가리켰다. 실비아는 강하게 안 된다고 했다. 그 사이에 셔터에는 기다란 상흔이 생겼다. 그 사이로 감염자들이 신음소릴 흘리며 몸을 들이댔다. 흡사 지옥의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오려는 망령 같았다…….

실비아 중위를 보았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너, 오빠를 진정시켜. 알겠지?”

실비아 중위는 처음으로 너를 마테리얼B가 아니라 나의 오빠라 불렀다.

“조종사를 물게 하면 안 돼.”

무슨? 그러나 그녀는 내가 이해하기도 전에 너의 구속을 모조리 풀어서 버렸다. 들것도 던졌다. 자유로워진 너는 그녀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나는 그런 너를 껴안았다. 너는 그르릉 소리를 내며 진정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이제 더 이상 화낼 필요 없어.

그런데도 헬기는 여전히 뜨질 않았다. 실비아 중위는 두 눈을 껌뻑거리다 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녀는 자기 권총을 꺼내서 내게 주었다.

“연료가 부족해서 지금 무게로는 날 수 없대. 60kg가 많다는 거야.”

그러더니 헬기에서 내렸다.

“그런데 마침 내가 60kg야.”

그녀가? 어째서?

뒷걸음치는 그녀의 군복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 아래쪽이 피에 배였다. 아까 닥터 조가 쏜……. 실비아 중위의 이마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도 그녀는 웃었다.

“미워해도 상관없단 말, 기억 나?”

기억한다.

“미안. 거짓말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거든.”

실비아 중위는 찢어진 셔터 쪽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금방 점처럼 작아졌다. 권총을 몇 방 쏘았는데 얼마 못 가 그녀의 몸은 감염자들의 파도 속에 묻혔다. 감염자들은 이제 지척까지 다가왔다. 거기에는 닥터 조처럼 보이는 얼굴도 있었다. 그런데 헬기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God damn!”

조종사가 말했다. 천정의 돔은 열리는 게 너무 느렸다. 아직 저 틈으로는 헬기가 지날 수 없었다. 섣불리 헬기를 띄웠다간 프로펠러가 격납고 어디에 부딪혀 고장 날 수도 있었다.

“We don't have much time!”

한 감염자가 헬기 안으로 들어왔다. 감염자는 나를 노렸다. 손에는 실비아 중위가 준 권총이 있었지만, 나는 그걸 사용할 생각도 못했다. 그러는 사이, 너는 그 감염자를 향해 주먹을 질렀다. 감염자의 두개골이 함몰되며 헬기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계속해서 감염자들은 기어 올라왔다. 너는 짐승처럼 소리 지르며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세 명의 감염자와 함께 너는 바닥으로 뒹굴었다. 그러더니 곧 바로 일어나, 다른 감염자들을 붙잡아 끌었다. 너는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천정의 해치가 완전히 열렸다. 헬기는 곧장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조종석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직, 너는 타지 않았다. 너를 보았다. 너는 헬기 쪽으로 다가오려 했지만 감염자들이 너무 많았다. 헬기에는 여전히 감염자들이 붙어있었다. 너는 그것들마저 모조리 떼어냈다.

그때였다. 감염자들 사이에서 이상한 기류가 생긴 것은. 너는 감염자들에게 포위당했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감염자들은 너를 적으로 인식했다. 감염자들은 너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더 이상 너를 동료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너는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너는 괴성을 지르며 한 감염자에게 주먹을 날렸다. 감염자는 뒤로 쓰러졌다. 옆에 있던 감염자가 너의 팔뚝을 물었다. 그리고 뒤에 있던 감염자가 너의 어깨를 껴안았다. 너는 덫에 걸린 야생동물처럼 발버둥 쳤다. 하지만 감염자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헬기 로터가 돌풍을 일으키고 그 소리는 귀를 찢을 듯 들려왔다. 내 눈물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인가. 짠맛이 나는 비명으로 나는 너의 이름을 불렀다. 너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의 편린 속에서, 나는 너의 마지막 의지를 들었다.

살아야 한다.

사랑한다.

감염자들의 손과 이빨이 너의 사지를 뜯었다. 헬기가 빠르게 위로 상승했다. 너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저 밑으로, 기지의 붉은 불길이 마치 연옥의 입구처럼 보였다.

그렇게, 너는 죽었다.


Comment ' 9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23:13
    No. 1

    .......Great!!!! 잘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좀비물이 많아서 무척 좋네요. 글의 내용도 탄탄하고!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감정 이입도 되면서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15:29
    No. 2

    결말이 좀 이상해요;;;;;;;;;;;;;;;;;;; 글에 엄청 몰입해서 읽다가 잉, 죽었네 그걸로 끝? 이란 기분이 들어서요. 전 그렇게, 너는 죽었다. 라는 문장 안에 좀 더 다른 내용이 있을 줄 알았어요ㅠㅠ 다른 의미라거나. 그냥 죽었다는 걸로 끝인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4 16:30
    No. 3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6 15:08
    No. 4

    잘 보았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9 22:02
    No. 5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0 00:04
    No. 6

    절절하네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0 00:08
    No. 7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1 16:46
    No. 8

    굳이 너라는 표현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고 오히려 깍아먹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점을 줄 정도로 세기말적인 분위기와 인간, 그리고 혈육이라는걸 알게 해주는 좋은 글이엇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6.12 00:31
    No. 9

    잘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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