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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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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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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20 20:59
조회
2,748

라스트 불렛(LAST BULLET)

-부제 : 피 묻은 도끼와 녹슨 사슬 개목걸이

#1

두 남녀가 검게 죽은 나무들이 묘비처럼 늘어선 숲을 걷고 있었다.

둘은 실로 대조적인 일행이었다.

남자는 제대로 손질 안 해 너저분한 수염을 길게 기른 몸무게가 100kg은 넘을 듯 한 거구의 사내다. 양 허리에는 권총과 검은 피가 말라붙어 있는 도끼를 차고 있었다.

흉흉한 느낌의 남자와는 달리 여자 쪽은 남자의 키의 반에도 못 미치는 어린 계집아이였다. 블론드 헤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이야기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예쁜 아이였다.

허나 그런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아이의 목에는 짐승에게나 어울린 개목걸이가 채워져 있었다. 목걸이에 연결된 녹슨 사슬은 남자의 손에 칭칭 감겨 있었다.  

부녀라고 여기기엔 둘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남자가 뭔가에 쫓기듯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살피며 길을 재촉했다. 특히나 나무들이 빽빽이 늘어서 있는 곳을 지날 때는 뭔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에 아이는 그저 멍한 눈으로 남자의 뒤를 쫓고 있었다.

해가 뉘역뉘역 저물려 할 때 남자는 바위 틈 사이에 있는 작은 동굴을 발견했다. 입구가 좁다고 투덜거리며 남자가 허리를 잔뜩 숙인 채 안으로 들어갔다. 말라비틀어진 배설물의 흔적과 작은 동물의 뼈가 곳곳에 보였다. 오랜 세월 비운 흔적이 느껴졌다.  

남자가 바닥에 말뚝을 박고는 거기에 계집아이와 연결된 사슬을 묶었다. 아이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아무 저항 없이 그저 멍한 눈으로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동굴 주위를 돌며 땔감을 모았다.

이런 숲에는 ‘그것’들이 나타날 확률은 적지만 매사에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동굴에 다시 돌아온 건 대략 10여분 정도 흐른 후였다.

남자가 품에 한 아름 안은 나뭇가지를 땅에 내려놓았다. 계집아이는 남자가 나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남자가 낮게 혀를 차며 불을 피웠다.

불길이 일자 남자가 배낭에서 양철 냄비를 꺼내 물과 말린 옥수수 가루를 부으며 국자로 저었다. 고소한 냄새가 동굴을 메우며 식욕을 자극했다. 남자가 품에서 소금 통을 꺼내 냄비를 향해 살짝 흔들었다. 소금은 귀하디 귀했다. 아껴야 했다.

밥 먹어라.

남자가 아이를 불렀지만 아이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남자가 사슬을 잡아당겼다. 아이가 남자의 옆으로 죽 끌려왔다. 남자가 아이의 앞에 옥수수 죽이 담긴 그릇을 놓았다.

남자는 후루룩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냄비채 죽을 먹었다. 너저분한 수염에 누런 옥수수 죽이 들러붙었다. 그는 그것을 손으로 슥슥 훑더니 손에 묻은 죽까지 게걸스럽게 핥아먹었다. 약간 짭짤한 맛이 나는게 나쁘지 않았다.

식사를 끝낸 남자가 길게 트림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의 덩치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한 식사다.

남자가 아이를 흘깃 보았다. 그녀 앞에 놓은 죽그릇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남자가 낮게 한숨을 쉬며 죽을 스푼으로 떠서 아이의 입에 밀어 넣었다. 그러자 아주 잠시 아이의 눈에 희미한 생기가 돈다.

꿀꺽. 꿀꺽.

아이의 목울대가 움직이며 남자가 건넨 죽을 본능적으로 삼켰다.

아이의 죽그릇이 비워졌다.

남자가 천으로 냄비와 죽그릇을 대충 닦아 옆으로 치우고 배낭에서 담요 몇 장을 꺼내 바닥에 깔아 계집아이를 눕혔다. 아이는 아무 저항 없이 그의 행동에 따른다. 밥을 먹어 졸린 것인지 모닥불이 따뜻해서인지 아이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남자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건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다.  담배가 당겼지만 그건 떨어진지 오래다. 담배에 대한 유혹을 애써 밀어내며 남자가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잡고는 눈을 감았다.

남자의 오른 손에는 날에 검은 피가 흉하게 말라붙은 도끼가 꽉 움켜져 있었다.

남자는 꿈을 꾸었다.

수백 번은 꾼 꿈이지만 꿈을 꿀 때는 멍청하게도 이것이 꿈이라는 걸 잊는다. 그러기에 남자는 매번 공포와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반복한다.

끼익 끼익.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비명 같은 쇳소리가 주저앉은 남자의 귀를 찔렀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를 향해 애타게 손을 뻗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그 여자는 바로 남자의  아내였었다.

여자도 남자처럼 그를 보았다.  

허나 그녀의 눈은 남자와는 달랐다.

남자가 사랑했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흐물흐물하게 녹아 사라진지 오래다. 남자가 여자의 텅 빈 눈두덩 안에 자리한 암흑을 응시하며 멍하니 물었다.

왜… 그랬어?

아내는 대답 대신 뜨거운 피로 붉게 젖은 입을 벌리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아내의 뒤에는 내장이 몽땅 파 먹혀 텅 빈 인형처럼 쓰러져 있는 아이의 주검이 있었다.

바로 남자와 여자의 아이였다.

살아있을 때 아이는 남자에게 물었다.

아빠, 왜 엄마가 있는 지하실은 자물쇠로 꼭 잠가놔?

엄마는 병에 걸렸어. 아주, 아주 나쁜 병에. 아빠는 어른이라 괜찮지만 너 같은 어린애한테는 아주 위험해. 그래서 병이 옮지 않도록 문을 꼭 잠가두는 거야.

힝, 나도 엄마 보고 싶은데.

곧 볼 수 있을 거야. 엄마 병이 나으면.

엄마는 언제 낫는데?

남자가 잠시 침묵하며 말했다.

곧. 이제 곧.

그것은 남자의 희망이기도 했다. 아내는 단지 나쁜 병에 걸렸을 뿐이라고 곧 그 병을 치료할 백신이 나오면 그 단란했던 가족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며 여태까지 버텨왔다.

크르릉!

남자의 곁에 있던 래시가 털을 잔뜩 곤두 세운 채 여자를 향해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그 와중에도 아내는 남자를 향해 간절하게 손을 뻗으며 피로 젖은 이빨을 딱딱 부딪졌다.

그녀는 남자를 원했다. 하지만 원하는 건 그의 사랑이, 영혼이 아니라  뜨거운 피와 내장이다.

남자가 울부짖으며 밖으로 뛰쳐 나갔다.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벌목용 도끼가 움켜져 있었다.

남자가 도끼를 힘껏 위로 들어올렸다. 도끼날이 여자의 머리를 노렸다.  남자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내리쳐! 내리쳐야해!

난 못해. 아이를 잃었어. 아내까지 잃을 순 없어.

죽여야 해. 이건 더 이상 아내가 아냐. 내 자식을 잡아먹은 괴물이야.

못해. 난 못해.

죽여! 당장 죽여!

도끼를 든 몇 분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도끼의 무게와 남자의 고뇌가 그의 팔을 천근처럼 짓눌렀다.

날 죽여줘요. 여보.

남자가 놀라며 아내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내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를 향해 손을 뻗은 채 게걸스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오, 신이시여. 전 어찌해야 합니까.

남자가 울먹이며 신을 불렀다.

하지만 신은 남자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신은 자애롭게도 언제나 인간을 지켜보기만 하신다.

꺄악! 꺄악!

꿈속에서 갈등하는 남자를 현실로 황급히 끄집어낸 것은 게집 아이의 새된 비명이었다.

남자의 눈꺼풀이 부릅 열렸다.

다 타버린 모닥불은 희미한 불씨만 남아 있었다.

주변이 너무 어둡다. 크게 커진 그의 눈동자에 옅은 공포가 깃들었다.

어디냐, 어디 있냐!

남자가 아이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는 오들오들 떨며 남자의 바로 오른 편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황급히 배낭에서 랜턴을 꺼내 아이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비쳤다. 그곳엔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소리 없이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오고 있던 좀비가 있었다. 텅 빈 새까만 눈두덩과 반쯤 썩어 들어간 뺨에서 구더기들이 요란하게 꿈틀거렸다. 빛이 거슬리는 지 좀비가 입을 벌리며 꺼억꺼억 울어댔다.

남자가 도끼를 들었다.

꿈에서와는 달리 그 손길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동이 트자 남자는 서둘러 짐을 챙겨 동굴을 떠날 차비를 했다. 하나가 나타났다는 건 다른 놈들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니까. 계집아이는 동굴 입구에 있는 머리가 박살난 좀비의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지난밤과 같은 공포는 없었다.

아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썩어가는 고깃덩어리일 뿐이라는 걸.

무서운 건 움직이는 것, 인간 혹은 좀비뿐이다.

남자가 배낭에서 지도를 꺼냈다.

누런 빛깔의 낡디 낡은 지도였다.

남자가 보물 다루듯 조심조심 지도를 펼쳤다. 북쪽 방향으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세널이란 이름의 작은 도시가 있었다. 도시는 숲보다 좀비를 만날 확률이 훨씬 높은 곳이지만 별 수 없었다. 슬슬 식량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남자가 하늘을 보았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면 해가 지기 전에 필요한 식량을 구하고 좀비들을 피해 쉴 은신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자.

남자가 계집 아이를 묶은 사슬을 잡아 당겼다.  

#2

도시는 고요한 무덤 같았다.

묘비처럼 서있는 건물들엔 약탈과 방화의 상흔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남자는 주위를 주의 깊게 살폈다. 가로수에 쳐박혀 있는 자동차가 보였다. 앞 유리가 깨져 있는 것만 제외하고는 놀랄 만큼 상태가 좋았다. 남자가 차문을 열었다. 운 좋게 의자 바닥에 차 키가 떨어져 있었다.

남자가 간절한 바램을 담아 차의 시동을 걸었다. 허나 먹통이었다.

EMP에 영향을 받지 않은 기계를 찾는 건 하늘에서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남자가 차키를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지곤 기름을 확인했다. 기름은 절반가량 남아있었다. 남자가 배낭에서 빈패트병과 호스를 꺼냈다. 차의 주입구에 호스를 끼운 후 그것을 힘껏 빨았다. 누런 빛깔의 가솔린이 호스에서 뿜어지자 황급히 패트병에 호스를 꽂았다.

계집아이는 남자가 하는 양을 예의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패트병 두 개를 가득 채운 남자가 그것을 배낭에 넣고는 주변을 탐색했다.  잠시 길을 해맨 끝에 반쯤 간판이 떨어져 나간 마트 건물을 발견했다.

남자가 조심스레 입구에 선채 계집아이의 반응을 살폈다.

아이가 코를 벌름 거리며 안의 냄새를 맡았다. 남자가 긴장하며 도끼를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한참을 지나도 아이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남자가 안도하며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고요했다. 그리고 어두웠다.

남자가 랜턴을 켰다.

먼지로 뒤덮인 무너진 진열대와 텅빈 과자 봉지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그 옆으론 군데군데 쥐똥이 흉하게 쌓여 있었다.

남자가 인내심을 가지고 안을 뒤졌다.

두 시간 정도를 뒤적거려 남자가 손에 넣은 전리품은 붉은 녹이 살짝 슬어있는 건전지 한 쌍, 쥐 이빨 자국이 곳곳에 새겨져 있는 통조림 세 개, 그리고 담배꽁초 다섯 개였다.

남자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담배 꽁초였다. 꽁초들에 남은 담배 잎을 잘 추려내서 모으면 담배 한 개피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남자가 계집아이를 데리고 마트에서 나왔다.

마트 같은 곳은 제일 먼저 피난민의 표적이 되는 곳이다. 차라리 가정집을 뒤져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쩌면 급하게 감염을 피해 달아난 사람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식량 같은 게 남아있을 지 모른다.

남자가 상태가 괜찮은 건물 몇을 골랐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계집아이를 입구에 데리고 반응을 살폈다. 멍하니 서있는 곳이 절반, 그리고 겁먹은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벌벌 떠는 곳이 절반이었다.

남자는 계집아이가 벌벌 떠는 건물 안으로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남자의 생각보다 몇 시간이나 빨리 하늘이 어두워졌다.

해가 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 예고 없이 밀려온 비구름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구름이 아니다. 그 몸집이 수십 킬로에 이르는 비대한 죽음의 악마였다. 악마가 토해낸 빗물은 오싹할 만치 검다. 이건 휴대용 정수기로 수백 번을 정수해도 절대 마실 수 없는 비다.

이런 끔찍한 비가 내려 남자의 발목이 묶인 것도 쓸만한 자동차 하나 구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것도 좀비들의 확산을 핵으로 막자고 주장한 국방부의 미친놈들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남자와 계집아이는 식량을 찾으러 돌아다녔던 건물 중 제일 높은 층의 방에 있었다. 본의 아니지만 비가 그칠 동안 이곳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마트에서 구한 통조림 하나로 배를 채운 계집아이는 남자가 덮어준 담요를 꼭 쥔 채 잠들어 있었다. 남자가 베란다로 갔다. 커튼을 흘깃 걷어 조심스레 창밖을 내다보았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좀비들이 거리 곳곳에 멍하니 선 채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밤눈이 좋지 않았더라면 가로수나 표지판 같은 걸로 착각했을 정도로 놈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좀비들은 비를 좋아했다.

사막을 해맬 때 오징어처럼 말라비틀어져 있던 시체가 이 비를 맞은 후 기운을 차리더니 갑자기 남자를 잡아먹으려고 하던 때가 있었다. 공기가 반쯤 빠져나가 흐물거리는 튜브처럼 생긴 시체의 기억을 떠올리자 속이 메스꺼워졌다.

남자가 창밖으로 보이는 좀비들의 숫자를 세었다. 하지만 그 숫자가 50을 넘어가자 세는 걸 포기했다. 방도가 없었다. 비구름이 떠나고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하지만 언제 이 비구름이 떠날지는 몰랐다.

운이 좋으면 내일, 운이 그럭저럭 이면 사흘 후, 재수가 없으면 일주일 후일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일 때는 한 달을 넘길 수도 있다.

마치 지금 세상처럼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제멋대로다.

어쨌든 지금은 남는 게 시간이었다.

남자가 낮에 주웠던 꽁초들을 꺼냈다.

그리고 품에 있는 수첩의 종이 한 장을 찢어 그 위에 꽁초를 해체한 담배 잎 가루를 털었다. 작은 모래성처럼 쌓인 잎가루를 골고루 평평하게 깔고 종이를 조심조심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침을 묻혀 종이를 붙였다.

남자가 종이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켰다.

불이 붙으며 종이와 담배 잎이 바스락 타들어갔다.

남자가 종이 담배를 깊게 한 모금 폐로 빨아들였다.

필터 없이 그것도 이것저것 종류가 다른 담배꽁초를 섞어 만든 거라 그런지 맵디 매웠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하늘 위에서도 찾을 수 없을 천국 같은 맛이었다.

#3

남자는 아무래도 재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비는 일주일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남자는 부디 자신의 운이 최악이지 않기만을 빌었다. 최대한 아껴보았지만 가지고 있던 식량이 이틀 전에 모두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날.

마침내 물도 떨어졌다.

휴대용 정수기로 소변까지 걸러 마셨지만 그것도 한계인지 이제는 오줌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텅 빈 위장이 쓰린 걸 넘어서 칼로 찢는 듯 아려왔다.

남자가 핏발이 선 눈으로 창밖을 노려보았다.

좀비들은 열흘 전과 같이 미동도 하지 않고 선 채 비를 맞고 있었다. 남자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더러운 시체 놈들.

남자가 계집아이를 돌아보았다. 담요에 누워 있는 계집아이의 얼굴은 밀랍 같았고 입술은 가뭄의 논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자신은 아직 이삼일 정도는 더 버틸 수 있겠지만 아이는 이미 한계다.

남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고뇌하던 남자가 결심을 굳혔다.

남자가 배낭에서 검은색의 우비를 꺼내 몸에 걸치곤 문을 나섰다.

남자가 향한 곳은 좀비가 우글거리는 밖이 아니라 건물의 옥상이었다. 남자는 용기와 만용을 헷갈릴 만큼 미치진 않았다. 그의 품에는 건물을 돌며 모은 잡동사니들이 한아름 안겨 있었다.

남자가 난간으로 갔다. 조심조심 바닥에 잡동사니들을 내려놓고 그 중 주둥아리가 부러진 꽃병을 손에 쥐었다. 팔을 힘껏 뒤로 젖히고 꽃병을 서쪽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황급히 난간 아래로 바짝 엎드렸다.  

남자에게 꽃병이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확하게 몇 초 후 고목처럼 비를 맞던 좀비들이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듯 서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남자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좀비들은 후각과 청각이 예민하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놈들은 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는 인간들을 쫓아 잡아먹을 정도로 좋았다. 터져 나오려는 거친 호흡을 가누며 남자가 유리컵을 움켜쥐었다. 남자의 손이 긴장으로 떨렸다. 하나라도 실수로 떨어뜨렸다간 끝장이다.

남자가 잡동사니를 집어던지길 몇 번 반복했다.

그리고 한참 후 조심스레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좀비들이 사라졌다.

남자가 서둘러 계집아이를 눕혀 놓은 방으로 돌아왔다. 시들거리는 계집아이를 품에 안고는 끈으로 떨어지지 않게 꽉 고정시켰다. 그리고 배낭에서 노란 색깔의 알람시계를 꺼내 건전지를 넣었다.

그러자 멈춰 있던 시계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30분, 아니 20분.

남자는 건물 입구에 살짝 튀어나온 벽 위로 타이머를 누른 시계를 놓았다. 장신인 남자가 발돋움을 해 겨우 닿을 높이였다. 여기라면 쉽사리 좀비들의 손이 닿지 않을 것이다. 떠날 준비를 끝낸 남자가 양손에 도끼를 꽉 쥔 채 갓 걸음을 뗀 아기처럼 조심조심 움직였다. 소리가 나지 않게 물이 조금이라도 고인 땅은 일부러 피해가며 걸었다.  

남자가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그가 후미진 골목에 있는 쓰레기 더미 속에 몸을 숨겼다.

몇 십 초 정도 지났을까.

빗소리만이 머물던 거리에 기이한 신음소리와 함께 철벅철벅 물을 튀기며 걷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에서 들려왔다. 남자가 더 깊숙이 쓰레기 더미 속에 몸을 묻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계집아이의 입도 틀어막았다.

소리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남자가 일어섰다.

주어진 시간은 몇 분뿐이다. 남자가 알람시계를 놓은 반대 방향을 향해 달렸다.

그의 뺨에 식은땀이 맺혔다.

거칠게 내뱉는 입김이 새하얗다.  

오랜 굶주림과 배낭과 아이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현기증이 났다. 더 가고 싶지만 한계였다. 남자가 주위의 건물 중 상태가 깨끗한 건물로 움직였다. 남자가 품에 있는 계집아이를 흔들었다. 초점 없는 흐릿한 눈동자를 감춘 눈꺼풀이 반개했다.

남자가 물었다.

이 안에 좀비가 있어?

계집아이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의 침묵과는 조금 달랐다. 아직 의식이 완전히 돌아온 게 아니었다.

내 말이 안 들려? 이 안에 좀비가 있냐고!

남자가 계집아이의 멱살을 꽉 쥐었다.

고통 때문일까. 계집아이의 눈꺼풀이 조금 더 열렸다. 에메랄드 눈동자가 남자가 가리킨 건물을 담았다. 아이의 코가 움직이며 힘겹게 숨을 몇 번 들이마셨다.

남자가 초조하게 물었다.

좀비가 안에 있어?

아이가 침묵했다. 그리고 곧 기력이 다한 듯 의식을 잃었다.

남자가 황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맨 처음 한건 입구 손잡이에 와이어를 걸어 문이 열리지 않게 한 것이었다. 작업을 끝낸 후 남자가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제일 꼭대기 층인 5층까지 계단을 밟았다. 녹이 슨 철제문이 보였다. 남자가 손잡이를 돌렸다. 잠겨 있었다. 남자가 욕지기를 뱉으며 만능열쇠와 가는 철사를 꺼냈다. 손에 힘이 없어서인지 쇳소리만 울릴 뿐 쉽게 문이 열리지 않았다. 5분 정도가 지났다. 찰칵거리며 뭔가 걸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끼익 열렸다.

남자가 도끼를 들었다.  

랜턴으로 방안을 이리저리 비췄다. 몇몇 사무 기계와 테이블이 높인 거실, 그리고 트윈 베드가 있는 침실과 주방이 보였다.

사무실과 가정집을 겸한 오피스텔이었다.

좀비는 없었다. 시체 썩는 악취도 풍기지 않았다. 남자가 아이를 침실에 내려놓고 주방으로 갔다. 식량은 역시 남아 있지 않았다. 허나 성과는 있었다. 전원이 꺼져 있는 정수기 옆에 밀봉돼 있는 생수통이 있었다. 그리고 작은 바구니에 있는 조미료 통들도 찾았다. 남자가 생수통의 뚜껑을 뜯고는 냄새를 맡아보았다. 악취는 풍기지 않았다. 남자가 생수통채로 들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을 마시자 온몸에 짜르르 생기가 돌았다.

남자가 바구니에 있는 조미료통중에 설탕이 든 통을 골라내고는 대접에 설탕을 반쯤 쏟았다. 그리고 물을 부어 손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남자가 그것을 들고 계집아이를 눕혀 놓은 침실로 갔다. 비몽사몽인 아이를 일으키곤 조심스레 조금씩 설탕물을 입에 흘려 넣었다. 아이가 본능적으로 물을 받아 마셨다.

남자는 한시름 놓았다. 운이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때였다. 긴장이 풀린 남자는 어느 순간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비린내가 풍겼다. 그것도 피비린내였다.

랜턴을 이리저리 비추며 냄새의 근원을 찾던 남자는 계집아이의 바지에 묻은 붉은 얼룩을 발견했다.

아닐 거야. 설마.

계집아이는 이제 갓 열 살을 넘긴 어린애인데다가 발육 상태도 좋지 않다. 남자가 계집아이의 바지를 벗겼다.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계집아이의 팬티가 피로 붉게 젖어 있었다.

맙소사. 하필이면 왜 이때에…….

신이 있다면 침을 뱉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자가 랜턴으로 바닥을 비쳤다. 붉은 핏자국이 한 방울씩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었다.

밖엔 비가 오고 있어. 괜찮아. 이 정도쯤은 비에 씻겨 갔을 거야.

남자가 애써 자위하며 창밖을 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땅바닥에 코를 바짝 붙인 채 기어오고 있는 좀비들이 보였다. 느리지만 확실히 그들이 있는 건물을 향해 오고 있었다. 마치 원을 그리듯 건물 주위를 포위하며.

남자가 절망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었다. 자신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남자가 주방의 선방에 있는 식기와 집기류를 닥치는 대로 쓸어 모아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발악하듯 그것을 사방으로 집어 던졌다.

꺼져! 다른 쪽으로 꺼지란 말이야!

하지만 좀비들은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잠깐잠깐 고개를 돌릴 뿐 그곳을 향해 가지는 않았다. 좀비들은 후각보다는 청각이 좋지만 한 가지 냄새에는 청각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것은 피. 방금 흘린 따끈따끈한 생피다. 그런 피냄새에 놈들은 마치 상어처럼 몰려든다.

그물처럼 건물을 에워싸며 오는 좀비 떼를 보던 남자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가 배낭에서 가솔린을 담은 병들을 모두 꺼냈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둔 심지를 꽂고는 라이터를 당겼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좀비 다섯 마리의 몸이 불꽃에 휩싸였다. 불에 던져진 오징어처럼 좀비들이 몸을 뒤틀며 신음했다.

다른 좀비들이 갑작스런 빛에 놀라 놈들답지 않은 기민한 속도로 불이 붙은 좀비에게서 물러났다.

남자가 다른 방향으로 다시 화염병을 던졌다.

폭발음이 천둥처럼 울리며 화염이 다시 좀비들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좀비들의 숫자는 화염병 몇 개로 막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빗발이 거셌다. 더군다나 화염병의 폭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좀비까지 불러들이고 있었다.

남자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헛된 발악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남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과거에 묻어둔 광경이 머릿속을 채웠다.

아냐, 이렇게 포기할 순 없어.

남자가 도끼를 꽉 움켜쥐었다.

자신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절대로 아직은 죽을 수 없었다.

남자는 각오를 다졌다.

입구를 가구 같은 바리케이드로 막고 최대한 버티자. 그리고 한 놈씩 한 놈씩 놈들의 머리통을 박살내자.

좀비들의 숫자도 남자 자신의 체력도 계산에 들어가 있지 않은 무모한 계획이었다.

남자가 셔츠의 단추를 끌렀다. 셔츠로 가려진 그의 가슴에 검지 한마디 크기의 탄환을 매단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남자가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희미하지만 용기가 솟았다.

남자가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

허나 그 순간 옥상 입구에 서있는 누군가가 남자를 막았다. 개목걸이를 한 계집아이였다. 그녀는 남자가 벗겨낸 바지도 입지 않은 채였다. 붉은 핏줄기가 허벅지와 종아리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이가 뭔가 말하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남자가 아이의 입에 귀를 바짝 가져다댔다. 지금의 상황보다 아이가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 더 놀라웠다.

아이가  말하는 것은 1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조옹….

종?  

계집아이가 한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땡. 땡. 땡.

남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기적의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화염병의 폭발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랗고 맑은 종소리였다. 성당에서나 들었던 신성한 종소리는 도시 전체를 정화하듯 감싸며 한참동안이나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그들을 향해 오던 좀비들이 모두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남자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옥상 바닥에 주저앉았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기쁨보다는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적이 일어난 건가? 정말로? 아냐, 그럴 리 없어. 신이 있을 리가 없어. 신이 있다면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리 없어. 일어나서는 안됐어.

남자는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얼마 동안 있었을까. 차분한 발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60대 정도로 보이는 반백의 노인이 있었다.

낡아 빛이 바랜 신부복을 입은 노인의 목에는 황금빛의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그가 남자와 계집아이를 향해 자애롭게 말했다.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구원 받았습니다.

남자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4  

노인이 그들을 안내한 곳은 하수구와 연결된 지하 갱도였다. 자체 발전기가 있는지 갱도 천장에는 노란 불빛의 전구가 환한 빛을 뿜고 있었다. 이런 작은 도시의 지하에 이런 곳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노인이 놀라하는 남자에게 지나가듯 말했다. 이곳은 원래 고위 간부들이 피난할 목적으로 만든 지하 방공호 중 하나였다고. 정작 그들은 그것들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죽어버렸다는 말도 덧붙였다.  

여깁니다.  

노인이 대포도 뚫지 못할 것 같은 두께의 커다란 철문 앞에 멈췄다. 그가 문에 붙어 있는 핸들을 옆으로 돌렸다.

노인이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여러분, 에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방공호는 놀랄 만큼 깨끗했고 공기 또한 지하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상쾌했다. 게다가 지금은 구하고 싶어도 구하기 힘든 물건들이 가득했다.

침대에 있는 계집아이가 맞고 있는 포도당 링거가 그 중 하나였다. 저런 걸 본지 몇 년이나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걸 다 맞으면 몸이 좀 괜찮을 게다. 배고프면 우선 이걸로 요기라도 하렴.

노인이 계집아이의 손에 초코바를 건넸다.

그녀가 그것을 물었다. 오물거리는 계집아이의 모습을 보며 노인이 귀엽다는 듯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자의 목울대가 반사적으로 꿈틀거렸다.

공기를 타고 퍼지는 초콜릿의 향기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노인이 남자에게도 초코바를 건넸다.

남자가 손바닥을 들었다.

난 됐소.

노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못했군요. 전 요셉 골드스톤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남자는 침묵했다. 노인이 화제를 돌렸다.

이 아이는 당신 딸입니까?

아니오.

그럼…….

주웠소.

아, 가엾은 이 아이를 보살펴 주시고 계셨던 거군요. 훌륭하십니다.

그냥 쓸모 있어서 데리고 다니는 것뿐이오.

쓸모요?

이 얘는 냄새를 잘 맡소. 특히 좀비 몸에서 나는 살썪는 냄새는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귀신같이 맡지. 웬만한 개보다 낫소.

노인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농담이 심하군요. 게다가 아이의 목에 이런걸. 채워놓다니.

묶어 놓지 않으면 도망치니까. 이 아이가 도망치면 나도 이 아이도 금방 죽겠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오.

노인의 이마에 주름이 더 깊게 패였다.

이곳은 안전하니 그럼 이건 풀어주겠습니다.

노인이 아이의 목에 채운 개목걸이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남자의 억센 팔에 가로막혔다.

왜?

건드리지 마시오. 이걸 푸는 건 나뿐이오. 함부로 손을 댔다가는 아무리 우리를 구해줬다고 해도 용서하지 않겠소.

알고 있습니까? 당신이 하는 짓은 아동 학대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아이한테 이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오.

남자의 손이 허리에 찬 권총을 매만졌다.

노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겁먹은 얼굴로 노인이 한걸음 물러섰다.

이 문제는 다시 이야기 합시다. 반드시 아이의 목에서 저 흉물스런 물건을 벗기겠습니다.

내 생각은 바뀌지 않소.

이곳에서 지내다보면 바뀌게 될 겁니다. 여기는 주님의 가호가 깃든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안정을 취하면 당신의 병든 마음도 반드시 치유가 될 겁니다.

노인이 방을 나갔다.

남자는 노인이 나간 문에 와이어를 감아두었다.  이렇게 해두면 밖에서는 들어올 수 없었다. 남자는 옆으로 몸을 웅크린 자세로 계집아이가 있는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좀비들과의 사투의 피로가 밀려왔는지 코까지 골고 있었다.

계집아이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멍한 눈동자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몇 분 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남자를 관찰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남자의 허리에 채워져 있는 권총을 향해 오른 손을 뻗었다. 권총이 계집아이의 손에 뽑혔다. 권총의 무게가 버거운 듯 아이의 오른 손이 살짝 떨렸다.

아이가 양손으로 그것을 꽉 쥐었다.

그리고 총구를 남자의 뒤통수를 향해 겨눴다.

남자의 코고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잠시 후 아이가 권총을 내렸다. 권총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아이가 얼굴을 시트로 가리곤 남자처럼 옆으로 몸을 웅크린 자세로 침대에 누웠다.

코를 골며 자고 있던 남자의 눈꺼풀이 스륵 열렸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있던 아이를 돌아보진 않았다. 같은 침대였지만 남자와 계집아이는 등을 돌린 채 절대 서로를 보지 않았다.

#5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진짜로 잠들었었던 남자의 눈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번쩍 열렸다. 남자가 문으로 다가갔다.

노크소리가 다시 들렸다.

남자가 와이어를 풀고 문을 살짝 열었다.

남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놀랍게도 문 밖에 있는 건 노인이 아니라 계집아이보다 한두 살 어려보이는 주근깨투성이인 사내애였다.

데리고 다니는 계집 아이 말고 이렇게 어린 아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런 세상이 된 후 가장 먼저 죽은 건 아이, 그리고 여자와 노인이었다.

넌 누구냐?

저, 전 베드로에요.

이름을 물은 게 아니다. 무슨 일이냐?

신부님께서 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아저씨하고 새로운 친구를 식당까지 안내해주라고 하셔서…….

베드로가 남자와 그의 손에 들린 도끼를 올려다보았다. 갈색 눈동자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남자가 도끼를 내렸다.

알았다. 앞장서라.

남자가 잠이 들깬 계집아이를 등에 걸쳐 매고는 주춤 거리며 걷는 베드로의 뒤를 따랐다.

아이는 하나 만이 아니었다. 베드로가 안내한 식당에는 그 또래의 아이들이 열 명이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앞치마를 멘 노인이 남자와 계집아이의 자리를 내주었다.

여기 앉으시죠.

남자가 당황을 감추며 의자에 앉았다. 노인이 식탁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슥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손님들이 오신 기념으로 특별한 음식을 준비했단다. 기대해도 좋단다.

노인이 맨 처음 요리 접시를 둘에게 건넸다.

메뉴는 인스턴트 스프와 미트볼, 그리고 비스킷이었다. 이런 시대에선 성대한 만찬 같은 식사였다. 남자의 입에서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아이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먼저 놓인 남자의 음식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요리 접시를 다른 아이들에게 모두 돌린 노인이 식탁의 상석에 앉았다.

그럼 오늘도 일용한 양식을 주신 주님을 위해 기도하자구나. 오늘은 누가 기도문을 외울 차례지?

흥분하던 아이들의 반응이 썰물처럼 가라앉았다.

다들 왜 그러느냐?

남자를 안내했던 베드로란 아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요한 차례였어요, 신부님.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음, 그렇구나. 그럼 오늘은 내가 대신 하마.

노인이 기도문을 외웠다. 아이들이 양손을 쥔 채 고개를 숙였다. 남자와 계집아이는 뻣뻣이 고개를 든 채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기도가 끝났다. 노인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 이제 먹자구나.

수저와 포크를 움직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남자와 계집아이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남자가 뚫어져라 요리 접시를 노려보았다.

노인이 물었다.

혹시 요리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대답 대신 남자가 허리에 찬 권총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총구는 노인을 향한 채였다. 남자가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미트볼을 씹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남자와 옆의 계집아이를 흘깃흘깃 보았다.  낯선 남자에 대한 두려움과 계집아이에 대한 호기심 섞인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본능적인 감각은 그 안에 미미하게 뒤섞인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를 감지했다.

식사를 끝마친 아이들이 식당을 나갔다. 의도적으로 남자와 계집아이를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식당에는 노인과 남자, 그리고 계집아이만이 남았다.

노인이 식기를 치우며 남자에게 물었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리운 단어였다.

아니오.  

그럼 홍차는 어떤가요?

물은 충분하오?

노인이 싱크대의 수도꼭지를 돌렸다. 맑은 물이 콸콸 쏟아졌다.

수천 미터 아래서 끌어올린 지하수입니다. 끓이지 않고 마셔도 괜찮은 깨끗한 물이지요.

정말 살기 좋은 곳이군.

그렇습니다. 천사 같은 아이들도 있고, 정말 천국 같은 곳이지요.

이곳에 어른은 당신뿐이오?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전 당신을 만난 것은 주님의 계시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함께 아이들을 위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남자가 노인을, 그리고 그의 목에 걸린 십자가를 보았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뭐든지요.

요한이란 아이는 누구요.

노인이 손끝이 잘게 떨렸다.

이곳에 있는 아이 중 하나입니다. 엊그제 주의를 무시하고 바깥에 나갔다가 횡액을 당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노인이 성호를 그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남자가 그런 노인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남자의 눈빛은 짐승의 것처럼 거칠고 동시에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강바닥처럼 깊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비가 그치면 떠나겠소.

남자가 계집아이의 목에 연결된 사슬 끈을 움켜쥐었다.

#6  

남자는 낯선 도시에 있었다. 남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앞에는 래시라고 새겨진 개목걸이를 한 품종 좋은 새퍼트 한 마리가 걷고 있었다.

새퍼트가 갑자기 멈췄다.

래시, 왜 그러냐?

새퍼트가 귀를 쫑긋 움직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어딘가로 쏜살같이 달려가 버렸다.

멈춰! 멈춰 래시!

남자가 목이 터져라 불렀지만 래시는 멈추지 않았다. 멀리서 래시가 반쯤 무너진 건물의 지하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의 다리가 순간 움찔 멈췄다.

하지만 곧 결심한 듯 황급히 래시의 뒤를 쫓았다.

지하는 어두웠다. 남자의 등줄기에 땀이 배었다.

낮이지만 이런 어둠속에 있는 건 위험하다.

남자가 한손에는 권총을 다른 손으로는 랜턴을 움켜쥔 채 조심조심 주위를 비쳤다.

래시, 래시.

남자가 애타는 마음으로 개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그러자 멀리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남자가 그 소리를 쫓았다.

래시는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는 커다란 냉장고를 발톱으로 긁고 있었다. 남자가 주변을 이리저리 비쳤다. 그곳에 있는 건 그와 개 둘뿐이었다. 남자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래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녀석, 놀랐잖아. 왜 그래? 이 안에 네가 좋아하는 개껌이라도 있는 거냐?

순간 그의 표정이 굳었다.

냉장고 안에서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냉장고의 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복잡하게 얽힌 사슬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사슬에 매달렸다. 래시는 그런 남자의 하는 양을 충성스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움찔.

래시의 털이 갑자기 곤두섰다. 래시가 흉포하게 몸을 날리며 은밀히 남자를 덮치려던 인영의 목을 물어뜯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남자가 황급히 랜턴과 권총을 집었다. 둔탁한 충격이 남자의 가슴을 후려쳤다.

손에 쥐고 있었던 랜턴이 바닥에 빙글빙글 돌았다. 남자의 겁에 질린 눈동자에 그를 깔아뭉개고 물어뜯으려 하는 여자 좀비의 얼굴이 비쳤다.

깨갱거리는 래시의 비명이 옆에서 들려왔다.

안 돼!

공포보다 더한 분노가 남자를 사로잡았다. 남자가 고함을 지르며 좀비의 아가리에 권총을 처박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소리와 함께 소름끼치도록 차디찬 피가 남자의 얼굴에 튀었다.

남자가 바닥에 구르는 랜턴을 집어 옆을 비쳤다.

서로의 목을 물어뜯고 있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 좀비와 래시의 모습이 보였다.

래시!

남자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건 래시가 아니라 좀비였다. 아무것도 없는 시커먼 눈두덩이 남자에게 향했다. 그의 아가리에 물린 래시의 목이 떨어질 듯 덜렁거렸다.

으아아!

남자가 울부짖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머리통이 꿰뚫린 좀비의 몸이 무너졌다. 남자가 쓰러진 래시를 품에 안았다. 피 묻은 래시의 털에 얼굴을 처박으며 남자가 울었다.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냉장고에 묶인 사슬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철컥 빈 방아쇠를 때리는 소리가 나서야 요란하던 총성이 멈췄다.

쇠사슬을 뜯어낸 남자가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랜턴을 비쳤다. 순간 눈물로 젖은 남자의 눈이 크게 커졌다.

그 안에 있던 건 깡마른 금발의 여자 아이였다.

냉장고 안은 엄지 손가락만한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 있었다.  핏발이 선 아이의  눈이 남자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건 뭐지? 인간? 아니면 좀비?

그가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아이가 랜턴을 든 남자의 손을 물어뜯었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권총을 쥔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내리쳤다.

빠각. 방금 전 좀비의 차가운 피와는 다른 뜨거운 핏방울이 남자의 얼굴에 튀었다.

허억! 허억!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남자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남자가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는 계집아이를 바라보았다. 이마에 흉한 상처 자국이 보였다. 남자가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 상처를 가렸다.

남자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지독하게 내리던 비는 그 후 일주일이 더 지나고 나서야 겨우 그쳤다.

남자와 계집아이는 식당에서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남자는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오랫동안 햇빛을 받지 않고 지하에만 있었던 탓일까.

남자의 얼굴은 처음과는 달리 무척 창백했다. 남자는 포크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입맛이 없었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계집아이는 남자의 옆이 아니라  베드로란 이름의 아이에게서 음식을 받아먹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흘끔흘끔 부러운 얼굴로 베드로를 보았다.

아이들이 남자에게 가지고 있는 공포와 거부감은 여전했다.

하지만 계집아이에게는 그 감정이 대부분 호감으로 변해 있었다. 이곳에서 펑펑 쏟아지는 물로 깨끗하게 씻긴 계집아이는 예전에 딸에게 사주었던 마론 인형처럼 예뻤다.

식사 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계집아이도 베드로와 다른 사내아이의 손에 이끌려 같이 어울려 나갔다.

식당에 노인과 남자 둘만이 남았다.

노인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정말 내일 떠나실 겁니까?

그렇소.  

아무래도 당신의 마음의 병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모양이군요.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오. 난 정리해야 할 일이 있소.

정 떠나시겠다면 더 이상 잡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당신이 데리고 온 저 아이만은 이곳에 남겨주지 않겠습니까?

남자가 침묵했다.

바깥세상은 저런 어린애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가혹한 곳입니다. 지금까진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결국은 굶어죽거나 좀비에게 잡아먹히겠죠. 하지만 이곳에서라면 다릅니다. 이곳엔 몇 십 년은 버틸 충분한 식량과 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제게 아이를 맡겨주십시오.

고개를 숙이는 노인을 외면하며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들은 이 절망적인 세상에서 다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희망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노인이 멀어져 가는 남자를 향해 외쳤다.

남자는 방에서 떠날 차비를 했다.

계집아이는 저녁 식사 후 몇 시간이나 지나서야 베드로의 손에 이끌려 방에 돌아왔다. 계집아이의 머리엔 붉은 리본이 묶여 있었다.

남자가 베드로에게 물었다.

이건 누가 준거지?

베드로가 살짝 뺨을 붉혔다.

제가 만들어줬어요. 이브도 마음에 드는지 제 손을 꼭 잡아줬어요.

이브? 누가 이브지?

우리끼리 부르는 이 애 이름이에요. 혹시 다른 이름이 있어요?

아니.  

베드로가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럼 계속 이브라고 불러도 되요?

그래.  

베드로가 방긋 웃었다. 그가 계집아이의 뺨에 입술을 살짝 맞췄다.

그럼 잘자, 이브. 내일 또 놀자.

베드로가 방을 나갔다. 남자가 정리하던 배낭을 추스르고는 계집아이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둘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이곳이 좋으냐?

희미하게 계집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드로가 마음에 드냐?

끄덕.  

남자가 시답잖은 질문을 몇 개 했다. 이곳의 음식은 맛있느냐? 자기 전에 양치를 하고 싶냐 정도였다. 씻는 것 관련의 질문에는 계집아이는 반응하지 않았다. 싫다는 표현이었다.

남자는 준비한 마지막 질문을 했다.

아직도 날 죽이고 싶으냐?

계집아이가 잠시 남자의 눈을 빤히 보았다.

끄덕.  

남자의 얼굴에 자괴적인 미소가 깃들었다.  

이른 새벽.

남자가 하수구 구멍에서 기어 나왔다. 주위는 아직 어둑하고 공기는 차디찼다. 남자가 좁은 하수구 구멍에서 배낭을 꺼내는 데 잠시 애를 먹었다.

남자는 혼자였다.

계집 아이, 아니 이제는 이브는 그가 떠난 방공호에서 잠들어 있었다. 남자는 이 결정을 후회할지도 몰랐다. 래시의 역할을 대신하던 이브가 없는 밤은 훨씬 더 길고 위험할 것이다. 좀비와 마주치는 일도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어쩌면 고향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 지도 모른다. 허나 왜일까. 지금 이 순간만은 오래된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이런 상쾌한 새벽을 맞는 건 세상이 변하고 난 후 처음이었다.

남자가 배낭을 멨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배낭의 무게가 무척 버거웠다. 남자가 거친 숨을 씩씩 내쉬며 도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남자는 도시 외곽의 언덕에 이르렀다.

주변은 어느새 놀랄 만큼 밝아져 있었다.

남자가 해가 뜨고 있는 동쪽을 흘깃 보았다.

일출의 빛에 감싸여 눈부시게 빛나는 거대한 십자가가 보였다. 교회다. 교회의 망루 위에 있는 커다란 종이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그날 자신들을 구해준 기적의 종소리.

남자의 발걸음이 그도 모르게 교회로 향했다.

#7

남자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갱도를 달렸다. 등에 매고 있던 배낭은 어디에 내팽개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방공호의 입구 철문에 달린 핸들을 돌렸다. 문이 잠겨 있었다. 남자의 눈에 핏발이 섰다. 남자가 도끼를 위로 치켜들었다. 소름끼치는 쇳소리와 함께 그가 도끼를 내리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땀에 범벅이 된 남자가 웃옷을 집어 던졌다.

도끼질이 다시 계속됐다.

철문이 열렸다.

복도에 신부복을 입은 노인이 서있었다. 그의 목에 걸린 십자가가 일출에 휩싸인 교회처럼 황금색으로 반짝였다. 노인의 앞에는 개목걸이를 한 이브가 멍하니 서있었다. 그녀의 목에 연결된 사슬은 노인의 손에 움켜져 있었다.

떠나신다면서 왜 돌아왔습니까?

헉! 허억! 잊은 게 있다. 그 애를 내놔!

이브는 우리에게 맡긴 게 아니었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남자가 노인의 발치에 뭔가를 집어던졌다. 반쯤 뜯어 먹힌 사내아이의 머리였다. 교회 망루의 종 아래 굴러다니고 있던 것이었다.

요한을 찾았군요. 쓸데없는 짓을 하셨습니다.

그 애를 내놔!

제 말을 들으면 오해가 풀리실 겁니다. 요한은 신앙심이 깊은 아이로 당신들을 살리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요한은 당신과 이브를 위해,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인류를 위해 스스로 희생한 겁니다. 부디 철없는 행동으로 요한의 순교를  망치지 마십시오.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남자는 비로소 자신들을 바라보던 아이들의 적의를 이해했다. 그날 들었던 건 기적의 종소리가 아니었다. 좀비들에게 뜯어 먹히며 내뱉는 아이의 처참한 비명이었다. 울음이었다.

더 이상 여러 말 하지 않겠다. 그 애를 내놔. 안 그러면 죽여 버리겠어.

이브는 돌려드릴 수 없습니다. 이브는 새로운 인류의 세상을 열 희망이 될 겁니다. 그 이름 그대로 인류의 어머니인 이브처럼 말입니다. 바로 제 손으로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남자는 이곳에 있는 아이들 중 계집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떠올렸다.

남자가 도끼를 움켜쥔 채 노인에게 다가갔다. 날이 많이 뭉개졌지만 저런 노인 머리통 하나 박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남자의 걸음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

노인이 이브의 목에 식칼을 겨누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그 흉악한 사탄의 무기를 내려놓으시오. 지금 당장.

노인이 손에 힘을 주었다. 칼끝에 찢긴 피부에서 흘러나온 붉은 핏방울이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새 희망 어쩌고 떠들더니 죽일 셈이냐.

저라는 울타리 없이 이브와 다른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지금 이 아이가 아니더라도 여자 아이는 또 언젠가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숭고한 사명으로 인류의 존속을 지켜야 할 선구자인 저는 다릅니다. 저를 대신할 존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런 짓을 하는 건 실로 마음이 아픈 일입니다만 주님과 인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미쳤군.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당신 같은 살인자가 어찌 주님의 뜻을 알겠습니까. 어서 무기나 버리십시오.

남자가 도끼를 내려놨다.

허리에 찬 총도 버리시오.

남자가 시키는 대로 했다.

노인의 뒤에는 이 소동을 듣고 온 아이들이 와있었다. 노인이 베드로를 향해 손짓했다.

얘야, 저 사악한 물건들을 치우렴.

네, 네?

어서.  

하, 하지만.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냐. 베드로? 또 체벌 방에 갇히고 싶은 거냐.

베드로가 덜덜 몸을 떨었다. 그가 주저하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죄, 죄송해요.

베드로가 남자의 도끼를 잡았다. 하지만 도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베드로가 노인을 돌아보았다.

도끼는 됐다. 권총만 나한테 가져오너라.

네, 네에. 신부님.

베드로가 권총을 집었다. 노인이 흐뭇하게 웃으며 베드로가 건넨 권총을 받았다. 탄창에는 탄환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노인이 이브에게 연결된 사슬을 베드로에게 건넨 후 남자에게 총구를 겨눴다.

주님을 모시는 몸으로 살생을 하기는 싫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신의 길을 가십시오.

노인의 얼굴엔 승리자의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이 총 때문에 그동안은 이브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총은 그의 손에 있었다.

남자의 낯빛이 순간 변했다.

남자가 격하게 몸을 숙이더니 기침을 했다.  

쿨록쿨록! 커헉!

울컥. 검은 핏물이 토해졌다.

남자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비틀거리는 남자의 모습에 한껏 더 의기양양해진 노인이 한걸음 그에게 다가섰다. 한 번에 증상이 나타나지 않게 조금씩 비소를 섞은 독을 먹인 게 이제야 제 효과를 드러낸 것이다.

자, 지금 여기에서 죽겠습니까? 아니면 밖에서 며칠이라도 더 살아보겠습니까?

다시 한걸음.

바닥에 엎드린 남자가 도끼 자루에 손을 뻗었다.

노인이 그 모습을 보며 조소했다.

어리석군요.  

노인이 남자의 등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총성 대신 공허한 쇳소리가 울렸다.

노인의 안색이 변했다. 그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철컥.

분명 총알이 가득 있는데? 부, 불발탄?

남자가 도끼를 지팡이 삼아 비틀비틀 일어섰다.

저 총이 발사될 리는 없었다. 가지고 있었던 탄환은 처음 이브를 만났을 때 거의 써버렸다.

노인이 들고 있는 총의 탄창에 들어 있는 것은 나무를 탄환 모양으로 깎아 페인트를 칠해 놓은 위협용일뿐이었다. 남자가 목에 걸고 있는 탄환 하나만이 진짜 탄환이었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탄환. 하지만 그의 것은 아닌 탄환.

남자가 도끼를 들었다.

오, 오지 마!

노인이 등을 돌려 이브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남자가 도끼를 내리찍었다.

권총을 든 노인의 팔이 짓뭉개지며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8

남자는 홀로 길을 걷고 있었다.

콜록거리는 남자의 얼굴은 새카맣게 죽어 있었다. 걸음도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웠다.

남자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남은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남자가 목에 걸고 있는 탄환을 꼭 움켜쥐었다.

그것은 그에게 남은 유일한 여한이었다.

낮에는 걷고, 해가 지면 동굴이나 건물속에 웅크린 채 조심히 숨을 죽였다. 때로 좀비가 나타날 때가 있었다. 남자는 피를 토하며 최후의 힘을 쥐어짜듯 그들의 머리를 도끼로 박살냈다.

남자는 시간이 날 때마다 방공호에 두고 온 이브에게 사과했다. 그곳에 있는 이브에게 그의 목소리는 닿지 않겠지만 그래도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미안해. 너의 부모를 죽여서. 미안해. 네 머리에 그런 상처를 남겨서. 제발 날 용서해줘.

하루가 흐르고, 다른 하루가 온다. 그리고 그 후에 또 다른 하루가 다시 찾아온다.  

남자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거의 소비하고 난 후에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과거 남자가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같이 살던 집이었다. 남자가 지하실로 들어갔다. 지하실의 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남자가 호주머니를 뒤적여 열쇠 하나를 꺼냈다.

찰칵, 찰칵.

녹이 슬대로 슨 자물쇠가 힘겹게 열리며 오랫동안 닫혀 있던 지하실 문이 열렸다. 끔찍한 악취가 풍겼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랜턴의 버튼을 눌렀다. 지하실 벽 너머에 박혀 있는 사슬과 그것에 묶여 있는 여자 좀비의 모습이 비쳤다.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남자의 살냄새에 반응한 듯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 여보. 너무 늦었지.

과거의 남자는 차마 그녀를 죽이지 못하고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남자가 목걸이에 묶은 탄환을 떼어냈다. 기도하듯 경건히 탄환에 입을 맞춘 후 권총에 탄환을 밀어 넣었다.

찰칵.  

남자가 자신을 잡으려고 손을 내미는 여자의 머리를 겨눴다. 사슬 때문에 그녀의 손은 남자에게 닿지 않았다.

그동안 괴로웠지. 이제 곧 편하게 해줄게.

잘게 떨리는 남자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향해 움직였다. 이걸로 하나의 악몽이 끝난다. 허나 외롭게 그녀 혼자만 보내진 않을 것이다.  

남자가 막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순간 그의 얼굴이 격통으로 일그러졌다.

남자가 자신의 발아래를 랜턴으로 비쳤다. 바닥을 기고 있는 어린애가 보였다. 아내에게 내장을 뜯어 먹혀 죽었던 그의 딸이었다. 그 딸이 지금 그의 다리를 움켜쥐고 살을 뜯어먹고 있었다.

마…리?

남자가 울음기 섞인 음성으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캬악!

넘어지는 남자의 어깨를 아내의 이빨이 파고들었다.

독으로 죽는 게 빠를까?

아니면 좀비로 변하는 게 빠를까?

스스로의 몸을 쇠사슬에 묶은 남자의 옆에는 머리가 쪼개진 여자와 아이의 시체가 있었다. 남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가족이 모였구나.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어.

남자가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집었다. 총구가 남자의 관자놀이를 겨눴다.

그때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사슬을 바닥에 끄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눈을 떴다. 열에 들뜬 눈동자가 희미하게 지하실로 내려오는 존재를 비쳤다.

이브였다.  

방공호에 있을 이브가 왜 이곳에 있을까?

남자는 이것이 죽기 직전의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그가 이곳에 오기까지 틈날 때마다 했던 사과를 반복하려 했다. 하지만 딱딱하게 돌처럼 굳은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미. 아아. 해.

간신히 한마디 내뱉은 게 한계였다.

이브는 텅 빈 듯한 에메랄드 빛 눈동자로 사슬에 묶여 있는 남자를 담았다.

알았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네 소원대로 곧 죽어줄게.

남자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총구를 관자놀이에 댔다.

응? 그런데 이브. 혼자 온 게 아니었니?

이브의 뒤로 느릿하게 다가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남자처럼 한쪽 팔이 없는 노인이었다. 검은 신부복과 목에 걸린 십자가가 남자의 눈동자에 박혔다.

방공호에서 남자에게 한쪽 팔을 잃고 달아났던 노인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눈알이 녹아내려 텅 빈 눈동자에선 좀비 특유의 어둠이 넘실거렸다. 남자는 자신의 도끼에 묻은 좀비의 피를 떠올렸다.

남자는 갈등했다.

좀비에 민감한 이브라면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쳤을 것이다. 이건 환상이다. 저런 환상을 위해 마지막 탄환을 낭비할 순 없었다.

이것은 자신이 인간으로서 죽기 위한 마지막 희망…….

노인이 이브의 머리를 향해 입을 벌렸다.

탕!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남자의 손에서 빈 권총이 힘없이 흘러내렸다.

막 녹아내리기 시작한 남자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액체가 마치 눈물처럼 보였다.

이브는 멍한 눈으로 사슬에 묶인 남자를 보


Comment ' 11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19:16
    No. 1

    죽은 건가요? 결말이 너무 애매해서 슬퍼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19:49
    No. 2

    가장 마음에 든 소설입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22:54
    No. 3

    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ㅠㅠ. 결말이 상당히 슬프군요 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22:51
    No. 4

    요즘 좀비라는 테마가 유행인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4 11:07
    No. 5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4 17:05
    No. 6

    머지 이해가잘안갔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7 02:19
    No. 7

    잘 보았습니다... 저는 조금 어렵네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8 20:28
    No. 8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9 23:43
    No. 9

    말세에는 사이비 종교가 빠질 수 없군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0 16:43
    No. 10

    상당히 뛰어난 글입니다.
    좀비라는 소재를 잘 살린 것 같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6.12 00:36
    No. 11

    잘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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