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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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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작성자
익명
작성
10.03.20 20:45
조회
2,587

침이 꼴깍 넘어갔다. 가슴이 쿵쾅거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자꾸만 주위를 돌아보며 혹시라도 듣는 사람이 없는지 재차 확인했다. 다행히 학교 뒤뜰이라 아무도 없다. 다시 침을 삼켰다. 후하, 준비 완료.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꼭 감은 채 말했다.

“좋아해! 나랑 사귀자!”

“싫어.”

“뭐어어어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미안이 아닌 싫어 라는 말로. 조금도 고민하지 않은 그녀의 냉정함에 넋이 나가버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붕어처럼 입만 뻥긋 거렸다. 나 같은 남자는 1초의 망설임도 필요 없다는 거냐! 속으로 하소연했지만 무슨 소용 있겠는가. 어쨌든 나는 차였는걸.

『‘싫어’란 두 글자보다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는 것이 더한 충격. -지훈』

“하아.”

종이위에 짤막한 글을 적으니 더 우울해졌다. 자꾸만 머릿속에서 1초, 1초, 1초란 말이 휘돌았다. 3초 만이라도 고민해줬다면 이렇게 속 쓰리진 않았을 거야!

더 비굴해져가는 내 자신을 털어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문득 저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는 한지혜가 보였다.

주로 잡지 모델로서 활동하다 이번에 NEC엔터테이먼트 기획사에 들어가 연예인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천재 아이돌 한지혜. 학교에서도 학급회장을 맡고 있으며 모든 이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는 완벽한 여자였다. 하지만…….

“그럼 이 문제는 한지혜 네가 풀어볼래?”

“네? 아, 죄송해요. 요즘 일이 바쁘다 보니 복습을 못해서 잘 모르겠어요.”

“그래? 그럼 이 문제는 나기찬 네가 풀어라.”

“풋!”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입을 틀어막았다. 내 앞자리에 있는 주환 녀석이 실성한 사람 보듯 나를 잠깐 보다 다시 앞을 보았다. 흠흠, 일단 진정해야겠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킥킥!

수학 울렁증. 그걸 아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뿐인 줄 아나?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서 오줌지린 것하며 중학교 때 반항 끼 좀 들었는지 일진회에 들어가 깻잎머리 했던 것까지 알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가장 안 좋은 추억까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건…….

“결국 실패냐?”

“응?”

앞에 주환 녀석이 은근슬쩍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 의미를 몰라 반문하다 아차 하는 심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알고 있었냐?”

“킥킥, 네가 지혜 데리고 나간 걸 봤지. 그래서 성공이야, 실패야?”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답변이었다.”

“응? 그게 무슨…어이, 야! 이지훈!”

어느새 수업이 끝났는지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기에 나 역시 일어나 버렸다. 밖에라도 나가 기분전환이라도 해야지 원.

“엇!”

“앗!”

나는 정말 건전하게 뒷문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하필 들어오려는 그녀하고 문 앞에서 마주칠게 뭐람. 피할 공간도 없어 나는 완전히 돌처럼 굳어버렸다. 눈까지 마주친 이상 뭐라 말이라도 해야…….

“비켜.”

“헐…….”

심각하게 고민하다 결국 내 입에서 나온 말은 허탈한 탄식이었다. 비키라니. 내가 무슨 개똥같은 놈인 줄 알아!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없이 나는 비켜섰다. 이걸 뭐라 표현해야 하나. 그래, 나는 약자다. 사랑에 금이 간 약자.

“지혜야, 빨리 와! 오늘 어떻게 할 건지 상의하기로 했잖아.”

“어머, 미안! 헤헤, 깜빡하고 있었네?”

혀를 살짝 빼물고 자신의 머리를 톡 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식덩어리! 란 말이 목 언저리까지 욱하고 올라왔다.

『사랑에 가식은 필요하다지만 그게 전부인 건 좀……. -지훈』

노트에 글을 끼적이고 하늘을 보았다. 민망할 정도로 구름한 점 없는 하늘. 새하얀 입김이 잠시 하늘을 가려 그나마 봐줄 만…내가 대체 무슨 감상을 하고 있는 거람.

“으, 춥다.”

마이만 딸랑 입고 밖에 나왔으니 추울 수밖에. 그녀 때문에 패닉상태가 돼서 코트를 입는 것조차 잊어먹은 채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코트를 가지러 다시 들어가기도 뭐해서 이렇게 뻐기고 있었지만 이젠 그것도 한계인 것 같았다.

“아우, 왜 그런 녀석을 좋아하게 된 거야!”

나도 내 자신을 알 수가 없었다. 어릴 때는 전혀 감정이 들지 않아 그녀가 내게 고백해도 거절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역전이 되었단 말인가. 예뻐져서? 잘나가는 아이돌이 돼서? 으음, 그것도 부정하진 못하겠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단지, 그래, 단지 이제야 눈을 뜬 것이겠지.

“문제는 이제 마주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는 거겠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고백하지 말걸. 하고 무진장 후회하는 나였다.

“안녕?”

“……….”

이른 아침, 몽롱한 정신 상태에서 학교에 가던 나는 아무생각 없이 옆을 보았다. 그곳엔 같은 반 여자애들과 함께 한지혜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의미는 뭐냐. 상처받은 날 골리기 위해 하는 짓은 아니겠지?

“어, 어.”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던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목도리에 고개를 파묻은 채 발걸음을 빨리했다. 내가 생각했던 의도가 정답이라면 제대로 성공이다, 젠장.

“이지훈 쟤 왜 저래?”

“왜 저렇게 어색해하지?”

“하, 하하. 글쎄. 졸린 게 아닐까?”

내 뒤에서 여자애들이 쑥덕거리는 게 들렸다. 아우, 아침부터 이게 웬 날벼락이람.

교실에 들어온 나는 시선을 창밖에 아주 고정시켰다. 조금 시간이 지나 아까 만났던 여자무리가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귓가로 들리는 재잘거리는 말소리. 몸이 경직될 정도로 긴장됐다.

“뭐하냐? 아까부터 창밖만 보고. 실연의 아픔 때문에 고독씹냐?” 갑자기 들려온 말에 몸이 심하게 움찔했다.

“아씨, 깜짝 놀랐잖아!”

“왜 나한테 성질이냐.”

“하아, 아니다.”

한손으로 턱을 괴고 손을 힘없이 휘저었다. 하아, 지쳐버렸다. 이런 가시밭길 언제까지 이어지려나.

“야, 이지훈.”

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등골이 무진장 시렸다. 서, 서, 설마.

“지, 지혜……!”

“잠깐 나 좀 보자.”

그렇게 말하며 휙 나가는 한지혜. 주환 녀석이 음흉한 눈빛으로 내 등을 툭 쳤다.

“호오, 실패인줄 알았더니 성공이었냐? 짜식, 잘 해봐라!”

“…하아.”

요즘 따라 자꾸 한숨만 늘어가는 것 같다.

한지혜를 따라가 도착한 곳은 학교 옥상. 펜스에 등을 기댄 채 팔짱끼고 서있는 한지혜의 표정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뭐, 뭐야? 내가 꼭 죄지은 사람 같잖아?

…그런데 자꾸만 고개가 숙여진다.

“무, 무슨 일이야?”

“민폐야.”

“………?”

다짜고짜 말하는 저 말투는 여전하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한지혜는 멍한 내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표정을 찌푸린 채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지금 네 행동, 나한테 민폐거든?”

뭐, 어렴풋이 그럴 거 같긴 했다마는. 직설적으로 말하니 할 말이 없네.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라 비밀 한 두 개쯤 알고 있다고 다르다 생각하면 큰 착각이야.”

일진회 일원이었고 네가 날 좋아했던 중학교 비밀이라면 나도 착각으로 치부하고 싶다.

“그러니까 나한테 관심주지 마. 외면하는 짓도 하지 마. 알았어?”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머리만 긁적였다. 여기서 뭐라 말해봐야 긁어 부스럼이겠지. 조용히 있는 게 걸맞은 행동일 것이다.

“아 정말! 넌 항상 그래! 남자가 배알도 없냐! 뭐라 말 좀 해봐!”

그런데 그건 여자한테 통용되는 게 아니었나보다. 하아, 자꾸만 한숨이 나오네.

“그래, 너 좋아했던 거 잊을게. 모른 척 하면 되는 거지? 알았으니까 그만 내려가도 될까?”

“어? 어, 그, 그래.”

애가 왜 어울리지 않게 당황하는 거람? 나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문으로 걸어갔다. 정말 오늘은 지치는 날이구나.

“야, 이지훈!”

아, 왜 또!

“그리고 언제까지 그 노트 끼적이고 다닐 거야? 음침해!”

얼씨구, 이젠 남 사생활가지고 트집 잡네? 당황했다, 화냈다. 정말 여자마음은 알 수 없다니까.

한지혜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내려가 버렸다. 나는 같이 내려갈까 생각하다 관두었다. 그 모습을 동창들이 보면 뭐라 생각하겠는가. 더 일만 꼬이지.

“노트라…….”

나는 언제부터 노트를 손에 들고 다녔던 걸까? 차가운 바람 때문에 손이 시렸다. 노트 덕분에 마이주머니에 손도 못 넣고 정말 애물단지네.

펜스에 몸을 기대앉았다. 가려주는 게 아무것도 없어 등까지 시렸다. 그래도 머리가 차갑게 식어가니 조금 차분해졌다.

내가 노트를 들고 다닌 계기는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녀가 찢어진 옷차림으로 나를 찾아와 서럽게 울던 모습을 본 직후부터였을 것이다. 그건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이었겠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이 노트에 내 생각을 적게 된 것은.

『2년 전, 그때 일은 아직까지도 나에겐 생생하다. -지훈.』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그녀와 나 사이에도 조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차인 직후처럼 어색한 관계는 없어졌지만 예전과 달리 싸우거나 말을 붙이거나하는 일이 없어졌다. 뭐랄까, 인사는 주고받지만 그리 깊은 사이는 아닌 정도? 이번 마지막 고3은 이 사이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다. 그래, 그녀가 다시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올 줄은 생각도 못했지.

“내일이야.”

“뭐?”

“내일이라고!”

갑자기 도끼눈을 뜨고 나를 째려보는 한지혜. 그래, 머리까지는 이해해줄게. 그러니 다리정도는 붙여주겠니?

“한 달 전부터 약속했었잖아. 이번 주 토요일에 마지막 여행가기로 한 거.”

여행? 아!

“그 스키장 가기로 한 거?”

“그래, 그게 내일이야.”

“그런데 그걸 왜 네가…….”

말하다 황급히 입을 막았다. 맞아, 이 얘가 학급회장이지. 한지혜는 나를 찢어죽일 것 같이 노려보다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하아, 여전하구나. 그 어리바리한건.”

그렇게 말하며 한지혜는 여자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어라? 그런데 방금 쟤 웃은 거 맞지? 내가 잘못 본건가?

“그나저나 벌써 그날이 왔구나.”

정확히 수능이 끝나고 이주일 뒤, 학급 전체로 스키장을 가자 입을 모았었다. 이제 이 겨울이 지나면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그래서 마지막 추억을 기리자는 취지였는데 벌써 그날인가?

창밖을 보니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겨울이구나. 이걸로 그녀와 내 관계도 모두 끝나겠지. 대학생이 되면 조금 더 나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펄펄 눈이옵니다. 덕분에 내 가슴이 식어듭니다. -지훈.』

다음날, 우리들은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정오쯤 돼서 스키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와! 여기는 눈 천지구만!”

오버하는 주환 녀석 때문에 다들 웃었다. 정말이네. 이곳은 사방이 눈 천지야.

“1분 1초가 아깝다! 빨리 스키타자!”

엉덩이를 들썩이며 보채는 주환 녀석. 버스기사 아저씨가 차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창문으로 뛰어나갈 기세다.    

나는 스키를 타는 건 사실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멋져 보일까 싶기도 하고 들고 다니기 편할 것 같은 스노보드를 택했다. 그런데 이놈이 결코 녹록치 않았다. 발은 움직일 수도 없지, 스키처럼 스틱도 없지, 또, 무개는 얼마나 무거운지. 처음에는 서있지도 못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으아아악!”

내가 스노보드를 이끄는 게 아니라 스노보드가 나를 이끌었다. 왼쪽이야, 왼쪽! 왜 오른쪽으로 가냔 말야!

“히이이익! 비켜, 비켜, 비켜!”

“우왁!”

“위험하잖아!”

“꺅!”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시아에 사람들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러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붕 날아가 얼굴부터 눈에 처박혔다.

“풋, 푸하하하하!”

“아놔, 진짜 개그다!”

“……….”

쪽팔려서 도저히 얼굴을 뺄 자신이 없었다.

“운동신경 잼병인 것도 여전하구나?”

나는 머리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옆을 보았다. 내 옆에는 안정된 자세로 서있는 한지혜가 보였다. 그녀는 고글을 벗으며 비웃었다.

“그깟 실력으로 스노보드를 타겠다니, 처음에는 설마 했다.”

“그 설마를 확신으로 만들어주지. 조금만 기다려.”

“킥킥, 백년 후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물에서 유영하는 돌고래처럼 아래로 내려갔다. 젠장, 두고 봐라! 이놈을 꼭 정복해주겠어!

“우와아아아악!”

…그 전에 일단 친숙해지도록 노력할까?

가까스로 균형 잡으며 아래로 내려오자 뿌듯한 감정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아, 이래서 다들 스키 타러 오는 거였어. 좋아, 이번에는 중급…초급 한 번만 더 타자.

까마득한 중급 높이에 기가 질려 초급 쪽 리프트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때였다.

“어, 저거 한지혜 아냐?”

“이야, 정말이야!”

“언니, 저 싸인 좀요!”

사람들이 한가득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가운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지혜의 모습이 뒤늦게 보였다. 역시…….

“역시 아이돌인가? 인기가 하늘을 찌르네?”

언제 내 옆으로 온 건지 주환 녀석이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훗, 그래. 저 애는 아이돌이었지. 그 사실이 새삼 다시 느껴졌다.

“으휴, 그런 아까운 애한테 차이다니. 너도 참, 안타깝다.”

“너한테 동정 받고 싶지 않거든?”

나는 주환 녀석의 팔을 치우며 리프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미 다 끝난 얘기다. 이제 와서 다시 거론해봐야 추억일 뿐이지.

“저, 저기. 저는, 히익!”

응? 한지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걸. 나는 무심코 다시 뒤돌아보았다. 핏기조차 가셔서 새하얗게 탈색된 얼굴, 남자들이 조금씩 다가오자 자꾸 움찔거리는 몸. 풋, 아이돌이 돼서 긴장도…탈 리가 없잖아!

나는 얼굴을 굳히고 사람들을 헤쳐 앞으로 나갔다. 내가 그곳으로 가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 아주 견고한 돌 성을 헤치는 것 같았다. 으윽, 좀 비켜 봐요!

“꺅!”

내가 덥석 손을 잡자 사무치게 놀라는 그녀. 나는 팔을 끌어당겨 내 등 뒤에 세웠다.

“죄송합니다. 동기끼리 볼일이 있어서요. 그럼 이만.”

짧게 고개 숙이고 그녀를 무리에서 빼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그녀도 당황했는지 나와 사람들을 번갈아보다 이끌려 왔다.

“아파…놔.”

“……….”

“아프다구!”

어느 정도 사람들 시아에서 벗어나자 내 손을 뿌리친 그녀. 표독스런 표정이었지만 아직도 당황한 기색이 남아있었다.

“자꾸 뭐야! 아무 말 없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가장 민감한 부분이니.

“너, 아직 벗어나지 못했던 거야?”

“그만!”

내가 말하기 무섭게 귀를 막는 지혜. 역시 내가 생각했던 게 맞았다. 그녀는 아직까지 남성기피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왜 아이돌 같은 걸 하고 있는 거야!”

“그만하라구!”

한지혜가 꽥 소리 질렀다. 그녀의 눈가에 살짝 물기가 맺혔다. 아차, 이러려고 말한 게 아닌데.

“걱정하는 척하지마! 나는 잊고 싶어! 그런데 왜 들먹이는 건데! 나 좀 내버려둬, 차라리 내 비밀을 아는 너 같은 애 없었으면 좋겠어!”

가슴에서 무언가 쿵 내려가는 것 같았다. 지금 뭐라고?

“아, 아니 지금 말한 건…….”

“그래…그런 거였구나.”

몰랐었다. 내가 부담스러웠던 거였어. 하, 하하. 생각해보니 그렇다. 치욕적인 일을 남인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 싫었겠지. 나라면 얼굴도 마주보지 못했을 테니까.

“미안…하다.”

나도 나름 생각해 준답시고 그 얘기를 그동안 꺼내지 않았는데 그것조차 지혜에겐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무작정 사귀려했던 내 자신이 싫어졌다.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사랑이냐! 도저히 이대로 서있을 수 없어 몸을 돌려 뛰었다. 차마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망각의 물이 존재한다면 그녀가 당했던 일도, 그날의 상처도 전부 잊을 수 있을 텐데. -지훈.』

한줄기 글을 끼적이다 펜을 놓았다. 너무 이른 시간에 호텔에 들어와서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잘 된 건가? 누가 있었음 민망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을 테니까.

언제부터인지 눈물이 나왔다. 그것이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 한 시간이나 멍하니 누워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딱히 답이 나오진 않았다. 나도 참 주책이다. 이러니 그녀에게서 음침하단 소리나 듣지.

“킥킥, 킥킥킥!”

허파에서 쉴 새 없이 바람이 새어나왔다. 생각해 보면 나도 참 바보 같은 놈이었다. 그때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모른 척 외면이 아니라 따뜻한 온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뭐하고 있었던 거야!”

순간 화가나 노트를 집어던졌다. 방 한 구석에 처박히는 노트. 나는 노트에 끼적이고 있을 게 아니라 한 마디 말을 해주었어야 했다. 걱정 말라고, 내가 옆에 있어주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한동안 후회 속에서 몸부림 쳤다.

잠시 밖에 나가 바람을 쐤다. 한겨울에 불어 닥치는 공기는 내 머리를 식혀주기에 알맞았다. 슬슬 날이 저물어 갔다. 이날이 끝나면 다시 학교에 나가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다 고3을 마무리하겠지.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려나? 그때쯤이면 이 날을 잊을 수 있을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 다시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그곳에는 한껏 스키를 타고 왔는지 지친표정의 아이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훑어보다 방구석으로 이동했다.

“어, 없어.”

그리고 나는 경직됐다. 없다, 분명 여기 있을 노트가 없다!

“야! 혹시 여기 있던 노트 못 봤어?”

“노트? 아, 그 녹색 노트? 아까 주환이가 들고 나가던…어이, 이지훈!”

나는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큰일이다! 그 노트에는 분명 지혜의 비밀이 적혀있다. 다른 애들이라면 몰라도 주환 녀석은 분명 눈치 챌게 분명해!

“젠장, 젠장, 젠장!”

그 비밀을 들켜선 안 되었다. 그 아이는 유명한 아이돌이다. 내 실수로 인해 소문이 퍼지는 것만큼은!

“지, 지훈아!”

복도를 뛰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한지혜와 맞닥쳤다.

“저, 저기, 아까 내가 한말은…….”

나는 한지혜의 말을 듣기 전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큰일이야!”

“뭐, 뭐야?”

“주환이가 내 노트를 가져갔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놔!”

내가 엉뚱한 소리라도 했다 생각한 걸까?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며 빽 소리 질렀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긴장한 눈빛을 보이자 이상함을 느낀 건지 그녀도 조금 긴장했다.

“뭔데, 무슨 일이야?”

“그 노트엔 네 비밀이 전부 적혀있어.”

복도에 선 우리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찾았어?”

“자판기 쪽은 없어. 넌?”

“버스 쪽에도 없어!”

“그럼 밖은 아닌 것 같아. 이 호텔 안에 있는 게 분명해!”

“무리야, 이렇게 넓은 호텔에서 대체 어떻게 찾으라고!”

그녀가 배를 감싸 쥐고 크게 소리 질렀다. 울먹이는 걸로 보아 가까스로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찾아낼 거야. 찾고 말거야.”

“……….”

나는 입을 꽉 깨물었다. 노트에 왜 그런 걸 써놓았는지 아직도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은 것이었다. 그것보다 주환을 찾는 게 내가 할 일이었다.

“녀석은 왜 노트를 들고 밖으로 나간거지?”

아직도 의문이 들었다. 왜 내 노트를 들고 밖으로 나갔을까. 분명 나쁜 의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노트가 필요해서? 왜? 무언가 쓰기 위해? 무언가 써?

“공중전화부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무언가 메모하기위해 노트를 가져갔다면 그곳밖에 쓸 일이 없지 않겠는가. 나는 설명하기 전에 뛰었다. 늦지 말아야 할 텐데. 제발, 제발!

“김주환!”

정답이었다. 전화 부스 대기의자에 앉아있는 주환을 찾은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참담한 심정도 몰려왔다. 주환이 이미 노트를 읽고 있었으니까.

“너…여기 쓰여 있는 글, 사실이냐?”

“………!”

“………!”

나와 지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움찔 떨었다. 김주환은 그 행동에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지혜를 보았다.

“사실이었구나. 1학년 때 들었던 소문이…사실이었어.”

들켰다. 완전히 들키고 말았다. 어쩌지, 어떡해야하지?

“…내놔.”

내가 혼란스러워 할 때 한지혜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야, 화내지마. 나는 그저…….”

“내놔!”

변명하던 주환이에게 소리 지른 한지혜. 번쩍 들린 그녀의 얼굴은 말도 못할 정도로 상처투성이였다.

“내놔, 내놔, 내놔아!”

심하게 구겨진 얼굴로 우는 한지혜를 보니 내 마음도 휴지처럼 구겨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주환이도 차마 뭐라 말할 수 없었던지 펼쳐져있던 노트를 조심히 접었다.

“그거 내가 망상한 거야.”

울던 지혜도, 난감해하던 주환도 나를 보았다. 내 얼굴은 아마 쓰디쓴 얼굴이 분명하겠지.

“전에 차여서 홧김에 그냥 마구 쓴 거였어.”

천천히 주환에게로 다가갔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올려보았다. 후, 그래 이러면 되는 거야. 이것으로 모든 게 해결되겠지.

“그러니까 이런 건…….”

주환이에게서 노트를 빼앗은 나는 잠시 애틋한 심정으로 애물단지를 보았다. 나와 함께한 녀석,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도, 감추어두고 있던 마음도 모두 담겨있는 소중한 노트. 차근차근 다시 읽어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것 같구나.

“그냥 망상 글에 불과해.”

그리고 난 처음으로 내 노트를 찢었다.

“우, 춥다. 이놈의 추위는 가시질 않네.”

코트에 손을 푹 쑤셔 넣고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은 채 종종걸음으로 뛰는 나. 그날이 있은 후, 다음날 김주환은 나에게나 지혜에게나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안심했다. 그래도 녀석, 조금 생각은 있는 모양이다. 덕분에 오늘 하루는 무난히 넘어가 하교할 수 있게 되서 신께 감사를 드리고플 정도였다.

교문이 저 멀리 보였다. 후하, 춥다. 오늘은 집에 가서 라면이나 먹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교문에 도착할 때였다.

“…한지혜.”

쪽문 밖에 팔짱끼고 서있는 그녀. 오래전부터 기다렸던 건지 손하고 얼굴이 시뻘겋다.

“늦어!”

“뭐?”

“늦다구!”

아니, 대체 약속을 잡아놓고 그런 말을 하면 설득력이라도 있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내 가슴팍에 무언가 종이하나를 턱하고 건네고 아무 말 없이 걸어갔다. 뭐, 뭐야? 나는 얼떨결에 종이를 받은 상태로 그녀를 보다 고개를 내려 보았다. 그 종이는 여기저기 이어붙인 듯 스카치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여있었는데 꽤나 조심히 이어붙인건지 여기저기 노력한 티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 종이는…….

나는 한동안 종이를 내려 보다 피식 웃었다. 그곳에는 익숙한 내 필체의 글들이 적혀있었다. 그래, 이건 내가 찢었던 종이의 마지막 장이었다. 그녀의 비밀이 전부 적혀있는 장말이다. 이런 것을 왜 돌려주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맨 아래 쓰여 있는 다른 글씨체를 보게 되었다.

“풋, 그런가?”

내 입 꼬리가 한없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문득 저 앞에서 나를 힐끗 보다 화들짝 놀라 황급히 걸음을 빨리하는 그녀가 보였다. 이거 두고두고 놀릴 수 있겠는 걸? 나는 뛰었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그러다 하늘을 보았다. 왠지 오늘은 눈이 내릴 것 같다.

『바보 멍청이에 너의 모습이 멋있다고 느껴질 것 같은 하루.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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