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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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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 단편제 참가작 # 45

작성자
익명
작성
10.03.20 17:39
조회
2,480

                                    stranger(이방인)

이방인이 찾아왔다. 그 이방인 때문에 우리 누나가 죽었다. 그러나 난 그 이방인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 이방인은 잠시나마 누나에게 웃음을 찾아 주었고, 행복이란 것을 알게 해주었고,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캔스빌의 정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성! 황궁! 왕이 살고 있는 궁의 앞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 마치 시장바닥을 보는 듯 했다. 높은 성벽의 뒤로는 뾰족한 지붕의 높은 건물들이 각자 위용을 뽐내듯 우뚝 서 있었다. 정문은 3미터의 날개가 달린 두 마리의 돌사자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지키고 있었다. 정문 쪽에도 사람들이 몰리자 경비병들은 물러나라고 소리를 쳤다. 어린아이들은 기다리다 지쳤는지, 정문 앞의 호화스러운 분수대 앞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분수대의 중앙에는 알켄스트1세 황제가 물이 품어져 나오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의 동상이 있었다. 평소 같으면 궁궐 앞에서의 이런 소란과 알겐스트1세 동상이 있는 분수대에서의 물놀이는 절대 용서 될 수 없었다.

소란도 잠시 성벽위에 병사들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성벽위에서 웅장한 나팔소리가 퍼져 나갔고 거대한 궁의 정문이 ‘쿠르릉’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성의 정문이 열리며, 제일 먼저 하얀 백마를 탄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

짙고 깊은 검은 눈동자에 구릿빛피부가 강인하면서도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의 짧은 검정색 머리카락 위에는, 영광을 상징하는 로터스 나무의 둥근 잎사귀처럼 생긴 은빛 왕관이 있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은빛 갑옷으로 무장한 백여 명이 병사들이, 화려하게 치장한 말을 타고 정문으로 걸어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중 백마를 탄 남자에게 쏠렸다.

“잠깐만 좀 비켜주게! 우리아들에게도 애슬란의 얼굴 좀 보여줄 수 있게 비켜주게나!”

어린 아들을 목마 태운 왜소한 남자가 앞 사람에게 부탁을 했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털북숭이 남자는, 목마를 타고 있는 귀여운 아이를 보자 자리를 조금 양보했다.

“귀엽게 생겼구나! 나중에 크면 너도 저기 맨 앞에 있는 애슬란처럼 되어야한다.”

“저 사람이 누군데요?”

꼬마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털북숭이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런! 자네는 애슬란이 누군지도 가르쳐주지 않고 아들을 데려왔나?”

털북숭이남자가 왜소한 남자를 나무랬다.

“꼬마야! 황실 근위 기사단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단은 오프렛기사단이란다. 그런데 그 대단한 오프렛기사단에 수석으로 합격한 남자가 바로 저 사람이다. 더군다나 저 남자는 우리와 같은 평민이라고! 낮에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검술수련과 공부를 해서 저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었지!”

털북숭이가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양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야기했다.

“봐봐! 애슬란의 뒤쪽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얀 피부에 귀공자 같은 얼굴이지만, 애슬란은 농사일 때문에 우리처럼 피부색이 구릿빛이잖아! 애슬란 덕분에 그 잘난 귀족여성들이 우리 같은 구릿빛피부를 섹시하다고 하더라! 하하하!”

“아빠! 나도 저 애슬란형처럼 오프렛기사단에 들어가면, 주인어르신이 아버지와 나를 무시하지 않을까요?”

소년이 아버지가 모시고 있는 귀족을 생각하면서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년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이번에도 털북숭이였다.

“당연하지! 너희 아버지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무시는커녕, 너희 부자에게 굽실거리면서 잘 보이려고 애를 쓸걸!”

“아빠! 나도 애슬란형처럼 될 거야!”

“그러려면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검술연습을 해야 해! 저 오프렛기사단이 4년 만에 백 명의 단원을 뽑았거든! 그런데 저 중에 평민은 애슬란뿐이라고! 더군다나 수석이라니 정말 대단해!”

털북숭이남자는 입에 침이 마르게 애슬란을 칭찬했다. 잠시 후! 애슬란일행이 점점 근처로 다가오자 털북숭이가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저것 좀 보라고! 애슬란의 뒤쪽에 있는 로딘 좀 봐!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얀루즈공작의 아들 표정 좀 보라고 하하! 완전 똥 씹은 얼굴이잖아! 이번에 수석은 자신 것이라 큰소리치더니 결국은 애슬란에 밀려 차석이라니! 하하!”

수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잘못 쳐다보았다가는,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도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대단한 귀족 가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자신과 같은 평민인 애슬란은 그 대단한 귀족보다 앞에서 당당하게 걷고 있었다. 귀족에 억눌려 살던 많은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행진에는 평소보다 세 배는 많은 사람이 몰렸다. 사람들은 애슬란이 마치 자신의 아들인양 기뻐했다. 꽃가루가 사방에 휘날렸고 골목골목마다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으로 가득 찼다. 귀족들의 억압과 탄압에 눌려 기를 못 피던 사람들에게 애슬란은 해방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였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 애슬란은 희망이라고!”

“흥! 애슬란이 무슨 우리 같은 사람인가? 애슬란은 크린튼백작의 딸과 약혼했다고 하더군! 애슬란은 이미 반은 귀족이었던 거나 다름없네!”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크린튼의 딸이 좋아했다는 말은 그전부터 애슬란이 대단했던 증거라고! 그리고 막말로 애슬란이 먼저 좋아한 것도 아니고 크린튼의 딸이 따라다니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털북숭이가 자신의 말에 토를 단, 옆에 있는 대머리 남자에게 성질을 내며 따졌다. 대머리와 털북숭이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시선은 애슬란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애슬란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은 존경심과 감동으로 가득 찼다.

애슬란이 가까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가까이서 보려고 서로 밀고 밀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심한 몸싸움에 왜소한 남자가, 갑자기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아버지의 어깨에 목마를 타고 있던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그런데 꼬마가 넘어진 위치가 얀루즈공작의 아들, 로딘이 지나가려는 자리였다. 가뜩이나 수석자리를 빼앗겨 기분이 나빠 있던 공작의 아들이었다. 땟국물이 흐르는 지저분한 꼬마 때문에 말을 세우고 싶지 않았다. 재수가 좋으면 말의 발굽이 피해갈 것이고 나쁘다면 그것은 꼬마의 운수가 나쁜 것이라 생각했다. 커다란 말이 막 꼬마를 밟고 지나려는 순간 사람들은 놀라서 눈을 질끈 감았다.

‘악’ 하는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던 사람들이 눈을 떴는데 피투성이가 되 있어야할 소년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말에서 뛰어내린 애슬란이 꼬마를 안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울고 있었던 꼬마의 코앞에 자신의 우상인 애슬란이 있었다. 꼬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울음을 그치고 감격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애슬란은 넘어진 왜소한 남자도 일으켜 세우고 아이를 넘겨주었다. 왜소한 남자는 연신 고개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애슬란이 꼬마에게 미소를 지어보이고 말에 오르자 사람들은 더 신이나 애슬란을 칭송했다.

“여러분! 오프렛기사단의 1대 기산단장인 맨디어단장님께서는 가난과 굶주림에 고통 받던 백성들을 위해 전 재산을 기부하셨고, 나라를 위해 어려운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지긋지긋한 연설이었다. 하품을 참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눈에선 핏발이 서며 눈물이 맺혔다. 아침에 궁에 입궐해 사열을 하고 왕으로부터 정식기사로 임명받았다. 오후에는 왕궁에서부터 오프렛기사단까지의 거리행렬을 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프렛기사단의 단원으로 임명받는 일만 남았지만, 아침부터 시작된 강행군에 신출내기 단원들의 몸은 녹초가 되었다.

“맨디어단장님께서는 진정한 강함이란! 자신을 희생시켜 남을 돕는 일이라 하셨습니다. 희생정신이란 무엇입니까? 말과 행동에 조금의 거짓도 없이 남을 돕는 일입니다. 자신을 희생시켜 남을 돕는다면 여러분 개인의 힘은 물론이고 우리 오프렛기사단의 힘도 저절로 솟구쳐서! 파이스제국의 원대한 꿈! 여러분의 꿈! 오프렛기사단의 꿈! 이 모든 것이 이루어 질것입니다!”

오프렛기사단은 희생을 기사단 최고의 이념으로 여겨왔다. 때문에 연설의 주 내용은 신입생들의 환영으로 시작해 희생으로 끝을 맺었다. 기사단장은 신입생의 대표 애슬란을 단상으로 불러올렸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할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자랑스러운 오프렛기사단의 단원이 된 것을 환영한다.”

팡파르가 울려 퍼지며 오늘 하루의 대 단원이 막이 내렸다.

“나 좀 보세!”

거구의 기사단장이 단상에 나와 있던 애슬란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말을 했다. 저런 거구가 바람의 검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기사단장의 집무실은 무척이나 단촐 했다. 커다란 테이블, 작은 책상, 1대기사단장인 맨디어의 초상화가 방안에 있는 물건의 전부였다. 단장은 애슬란에게 맞은편 테이블에 앉으라며 의자를 가리켰다.

“수석으로 합격했을 테니, 당연히 우리 기사단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

“희생입니다.”

오프렛기사단이 아니라도 누구나 알고 잇는 상식을 물어왔다.

“우리 기사단은 기사단에 들어오기 전 희생을 체험하는 것을 전통으로 여기지! 대부분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를 하네! 처음의 희생정신을 잊지 말고 초심을 지키자는 뜻이네. 그러나 지금은 맨디어단장의 취지에서 조금 동떨어져 많은 사람들이 거금을 기부하고 그것을 때운다네! 부모님의 돈이지만 말로는 ‘제가 땀 흘려 열심히 벌어놓은 저의 재산을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써 주십시오!’ 라고 개소리를 하지!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네! 나 역시도 그랬고 실제로 그 돈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쓰이고 있으니!”

“저는 돈이 없습니다.”

“그래 알고 있네! 그런데 자네의 이름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기부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네! 그 액수가 이번에 얀루즈공작이 했던 돈과 맘먹는 액수라네!”

애슬란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단장은 애슬란이 돈을 기부한 자를 정말로 모를까? 하는 표정이었다. 단장은 일부러 뜸을 조금 들였다.

“그 돈을 기부하겠다는 사람은 바로 크린튼백작이네!”

크린튼백작은 얀루즈공작보다 신분의 지위는 낮았지만 왕으로부터의 신망과 궁에서의 위치는 결코 아래에 있지 않았다. 그는 수도와 제일 가까운 도시의 영주였다. 거기다 그가 가지고 있는 병사 수는 파이스제국 안에서 제일 많았다. 이번 오프렛기사단의 보강은, 크린튼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돌을 정도였다.

“저는 그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흠! 잘 생각해보게! 자네가 앞으로 맨디어단장의 취지를 살려 1달간의 휴가를 봉사활동으로 쓴다고 치세! 그 1달동안의 봉사활동이 그 어마어마한 돈의 가치를 할까? 굶주림과 헐벗은 백성에게는 그 돈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가?”

“아무튼 그 돈은 저의 돈이 아닙니다.”

“소문에 검술이라면 환장하는 연습벌레라고 소문이 나 있던데! 쓸데없이 시간낭비 하지 않고 그 시간을 검술훈련에 쓰는 것은 어떠한가?”

“검술이라면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만 나가 보게나!”

300년 이상씩은 되 보이는 거대한 네 개의 기둥이, 복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지붕을 떠받들고 있었다. 지붕의 양끝에는 용맹한 독수리조각상이 앉아있었다. 잠시 후 네 개의 기둥사이에 있는 세 개의 문이 동시에 열리며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자랑스러운 자신의 자식을 찾으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축하한다.”

“네가 자랑스럽다.”

감격한 귀족들이 자식을 찾자마자 끌어안으며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 사람들 사이로 한 소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사람을 찾고 있었다.

“왜 이리 안 나오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 아냐? 벌써 지나갔나? 랄스 네가 들어가서 애슬란 좀 찾아가지고 나와!”

“큰일 납니다요! 저기는 기사단원이 아니면 누구라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가씨!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저는 저쪽 좀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붉은 머리를 양쪽으로 곱게 기른 소녀가 무리한 일을 시킬까봐, 몸종이 도망치듯 애슬란을 찾으러 갔다.

큰 눈과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볼 살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열여덟 살가량의 여자는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이 눈가가 촉촉해졌다. 여자의 근심과는 상관없이 젊은 귀족들은, 그녀가 크린튼백작의 딸임을 알아보고 묘한 시선을 던졌다.

“뭘 보는 거야!”

독이 잔뜩 오른 그녀의 말에 남자들은 어색하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 때 갑자기 소녀의 눈이 반달모양으로 변하면서, 입가에 환하게 웃음이 번졌다.

“애슬란!”

그녀가 애슬란을 부르며 달려갔다. 번쩍 뛰어오른 여자가 애슬란의 품에 안겼다. 대낮에 낮 뜨거운 장면이 연출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녀가 크린튼백작의 딸임을 알고는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왜 이리 늦은 거야! 기다리다 눈 빠질 뻔했단 말이야!”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애슬란이 천천히 그녀를 떼어놓으려 했지만, 그녀는 쉽게 떨어지지 않다가 이내 아쉬운 듯 그에게서 떨어졌다.

“축하해! 애슬란!”

그녀의 말과 동시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나, 꽃가루를 뿌리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기 시작했다.

“왜 그래 창피하게! 제발 조용히 좀 하라고 해!”

“너희들은 애슬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거야! 이제 그만해! 집에 있던 몸종들이라 연주가 형편없지! 내가 다음에 훌륭한 악사들로 준비할게! 오늘은 악사들도 너를 보겠다고 다 쉬어서 사람이 없더라고!”

“그런 거 필요…….”

필요 없다고 하지 말라 말하고 싶었지만, 말도 잘 안 먹히는 블레어에게 말해봤자 라는 생각이 들어 뒷말을 삼켰다.

“애슬란! 우리 집으로 가자! 아버지께서 널 위해 많은 음식을 준비했어!”

“나도 집에 가야지! 우리 아버지께서도 날 기다릴 거야! 오늘 출발해도 삼일은 걸릴 텐데 서둘러야지!”

“내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사람을 시켜 아버님을 우리 집으로 모셔왔어!”

아버지가 와 계신다는 말에 애슬란이 블레어를 재촉해 집으로 향했다. 애슬란의 아버지 터커는 너무도 우직해 미련하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말도 없고 왠지 멍청해 보이는 터커를 좋아할 여자는 없었다. 40이 넘어서야 간신히 결혼을 한 터커였다.

애슬란의 어머니는 귀족의 노리개로 일생을 살다 나이가 들어 쫓겨난 여자였다. 일생을 성의 노리개로 불우하게 살던 어머니는 우직하고 자상한 모습의 터커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에 출산 후, 제대로 영양보충을 하지 못해 돌아가셨다. 젖동냥을 하며 나를 키우신 아버지는 나를 세상의 제일로 여겼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보고 멍청한 터커가 천재를 낳았다며 아버지를 놀려 댔다. 아버지는 자신을 놀리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천재라고 하자 기분이 좋아 춤까지 추었다. 그런 아버지가 떠오르자 애슬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얼른 아버지에게 이 애슬란이 오프렛기사단에 수석으로 합격한 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주방 쪽을 제외하고 사람 키보다 큰 창문들이 6개나 있었다.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거실이었다. 창가엔 고급스런 붉은 커튼이 걷어져 있어 은은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거실에서 애슬란의 관심사는 오로지 아버지였다. 이제는 검은 머리카락보다 하얀 머리카락이 더 많아진 아버지를 보자 애슬란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애슬란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달려가 조용히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2년 전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 아버지는 모든 재산을 털어 수도로 나를 보냈다. 성공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아버지는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 얼굴의 주름살이 두 배로 늘어났다. 애슬란은 아버지의 얼굴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되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에 거친 주름이 걸리자, 애슬란의 뺨에 눈물이 흘렀다. 자랑스러운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에도 눈물이 흘렀다. 이때 ‘험! 험!’ 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고, 애슬란은 그제야 아버지와 자신을 초대해준 크린튼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축하하네! 어서 앉게! 자네를 기다리느라 이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못하고 있었네!”

긴 직사각형의 원목으로 이루어진 탁자에는 크린튼백작의 가족들이 모여 앉아있었다. 자리에는 열 개의 의자가 있었고, 비어있는 자리는 두 개뿐이었다. 주인인 크린튼백작과 그의 아내가 상석에 앉아 있었고, 그에 대응하는 크린튼의 맞은 편 자리가 오늘의 주인공인 애슬란과 블레어를 위해 비어져있었다.

애슬란은 비어있는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의자를 들고서 가장 말단에 앉아있던 아버지보다 더 끝자리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뜻밖의 상황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정적을 깬 것은 블레어였다. 블레어는 조용히 걸어가 자신의 의자를 힘겹게 들고 애슬란의 옆, 가장 말석에 자신의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크린튼과 그의 가족들은 성의를 무시하고 가장 말석에 앉아 있는 애슬란과 블레어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더군다나 그 둘이 거부한 자리가 크린튼의 맞은편이었다. 이 상황을 이해 못하고 있는 것은 귀족들의 에티켓을 모르는 터커뿐이었다. 크린튼의 장남인 캐런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올랐다.

“애슬란! 어찌 우리 아버지의 성의를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는가!”

크린튼이 옆에 있어 큰소리는 못 쳤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잔뜩 실려 있었다.

“짐승도 부모를 챙긴다는데, 아들 된 도리로서 아버지보다 높은 상석에 앉을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아버지가 당신의 아버지와 얼굴을 맞대고 식사를 해야 된다는 말이냐?”

캐런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오빠는 시끄럽게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야! 아무데나 앉으면 어떻다고!”

“둘 다 조용히 해라! 내가 그렇게 가르쳤느냐?”

크린튼의 말에 실내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아직 너와 애슬란의 결혼을 승낙한 적이 없다. 아직 사돈이 아니니 내 앞에 너의 아버지를 앉혀야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네가 상석에 앉으면 부모보다 상석에 앉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신을 무시하고 자리를 터커의 옆자리로 옮긴 애슬란에게 일종의 경고를 했다. 아직 내가 결혼 허락을 하지 않았다는 경고였다. 그의 경고에 자존심 상한 애슬란은 ‘저도 블레어를 나에게 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라고 말할 뻔했다. 그러나 아직 여리기만 한 블레어가 상처를 받을까봐 말을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블레어에겐 큰 수모가 될 것이 뻔하였다.

수도로 처음 와서 블레어와 친해지게 되었을 때! 크린튼은 검술훈련을 하는 애슬란을 조용히 불러냈다.

“나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이네! 너무 가까이 지내지 않았으면 하네! 자네도 부모가 되면 나의 마음을 이해할것이네! 미안하네! 어쨌든 자네가 알아들은 것으로 알겠네!”

크린튼은 가슴에서 돈 봉투를 꺼내 애슬란에게 건넸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테니, 그런 것은 필요 없습니다.”

그날 저녁 애슬란은 블레어에게 ‘난 네가 싫어! 네 얼굴만 보면 짜증이 나! 그러니 헤어져!’ 라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블레어는 ‘싫어!’ 라는 한마디만 했다. 그녀의 독불장군식의 ‘싫어!’ 라는 단 한마디지만, 이상하게도 애슬란은 그 말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마음약한 애슬란은 크린튼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를 사랑해주고 뒷바라지 해주는 그녀를 위해 참아왔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만은 너무도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임금 다음의 권세를 누리고 있는 크린튼도 일개 평민과 대등이 앉아서 식사를 한다는 것도 상상해 본적이 없었다. 애슬란 부자를 초대한 것은 블레어의 성화도 있었지만 평민들의 환심도 살 기회였기 때문에 거절하지 않았다. 오프렛기사단의 수석학생이라면 명분도 있었다. 그러나 크린튼은 블레어를 궁으로 보내 황제의 사돈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러기에 애슬란이 달갑지 않았다.

음식을 씹는 소리와 수저를 들었다 내렸다하는 적막을 깬 것은 크린튼이었다.

“기사단장이 자네가 나의 돈을 거부했다고 하더군!”

“호의는 감사하나 제 힘으로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어차피 그리 큰돈도 아닌데 뭐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크린튼이 먼저 일어났다. 크린튼이 일어나자, 다른 사람들도 애슬란과 터커와 같이 밥을 먹는 것이 불쾌한 듯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 남은 사람은 애슬란과 터커, 블레어뿐이었다.

삭막했던 분위기와 귀족들의 권위에 눌려 식사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계신 아버지를 보자, 애슬란은 죄스러움에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 일어나시죠! 제가 더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이 시간에 어딜 간다고, 내가 하녀들을 시켜 제일 좋은 방과 따뜻한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어!”

블레어가 애슬란의 팔목을 잡았다. 그러나 애슬란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힘들게 하지 마!”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의 격한 감정이 목소리에 실려 있었기에 그녀도 더 이상 애슬란을 잡지 못했다.

어제 밤에 한차례 비가 몰아쳐서 질퍽질퍽한 산길을 내려오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애슬란이 밟고 지나간 발자국만 조심스럽게 밟고 내려오는 집필관 베리니의 이마는 아침부터 땀으로 흠뻑 젖었다. 봉사활동을 나온 애슬란의 행적은, 영주의 소견과 집필관이 애슬란을 따라다니면서 쓴 기록에 의해 평가되었다. 앳돼 보이는 뚱뚱한 집필관은 이틀 동안의 강행군에 벌써 녹초가 되었다.

“애슬란형! 좀 쉬었다 가죠? 저는 태어나서 운동이라고는 글쓰기를 위한 손가락 운동밖에 해 본적이 없어요.”

“거의 다 왔어. 저기 우리 목적지가 보이네!”

집필관은 벼슬이 아니다. 어깨너머로 글만 간신히 뗀 서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 귀족들의 일상을 위인전처럼 꾸며서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돈이 없는 애슬란에게 뛰어난 집필관은 무리였고, 이제 갓 집필관으로 일하기 시작한 신출내기 베리니가 애슬란을 따랐다. 이번 여행이 수도근교에서만 살아온 베리니의 첫 장거리 여행이었을 정도였다.

“저 곳이 목적지인가요? 꽤 화려하네요?”

지방의 빈민가에서 생활한 애슬란은 집들이 화려한 이유를 알았기에 가슴이 아팠다.

베리니가 말한 화려한 집들이 자세히 보일정도로 가까워지자, 베리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알록달록한 집들이 규칙 없이 제 멋대로 무분별하게 지어져 있었다. 오른쪽 지붕은 노랗고 왼쪽지붕은 흑색인 집부터 시작해, 넓적한 판자는 무조건 주워와 얹은 지붕을 만들었다. 햇빛을 받지 못한 외벽은 그보다 심했다. 형형색색의 판자로 이루어진 벽은 곰팡이가 슬고 페인트까지 벗겨져 사람이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알록달록한 집들은 정체모를 형형색색의 판자를 주워와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산에서 내려와 빈민가 입구에 들어서자, 어제 온 비 때문에 물이 많이 고여 있었다. 그런데 빗물에 쓰레기와 인간과 가축의 배설물들이 섞여있어 심한 악취를 풍겼다.

애슬란의 소문은 이곳까지 퍼졌는지,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떼거지로 몰려나와 애슬란을 반겼다. 아이들은 애슬란을 보기 위해 똥물을 첨벙첨벙 튀기며 달려왔고, 놀란 베리니가 물이 튈까봐 허겁지겁 멀찌감치 피했다. 애슬란은 자신에게로 뛰어오다 넘어진 남자아이를 일으켜 번쩍 들어올렸다. 집필관은 똥물에 넘어진 지저분한 아이를 안는 애슬란을 보자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울지 않네! 넌 남자구나!”

애슬란의 칭찬에 울먹이던 아이가 해맑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야! 영웅 납셨군! 납셨어! 어제저녁부터 오늘아침까지 굶은 아이들이 이렇게 생생해 지다니!”

면도를 안 해서 파릇파릇하게 수염이 돋아난 키 큰 남자가, 비꼬는 말을 하며 애슬란과 아이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오해 하지 마! 난 환영하러 온 사람이 아냐! 아이들이 네 소문을 듣고 어찌나 데려다 달라고 하는지! 아! 난 레먼이야! 너 아직 정식기사단에 들어간 것은 아니니까, 나와 같은 신분의 평민이지! 나중에 기사단에 들어가면 존대하지!”

이 때 멀리서 말을 탄 병사들이 물을 크게 튀기며 다가왔다. 열 명의 병사들은 일제히 말에서 내렸다.

“비켜라!”

병사들은 아이들은 쫒아 버린 후, 허리를 크게 굽혀 애슬란에게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께서는 업무에 바빠 직접 못 오시고 저희들에게 성으로 모시고 오라는 명을 하셨습니다.”

“아니네! 난 저곳이 편하네! 사람들을 도우려면 사람들과 가까운 저 곳이 낫지 않겠는가? 영주님께 성의만 잘 받겠다고 전해 주게나.”

블레어의 짓임을 직감했다. 애슬란은 당황한 병사들을 젖혀두고 어린아이들 쪽으로 다가갔다. 병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혹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런 애슬란의 모습에 베리니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애슬란형! 저 곳에 여관이 있을 리도 없고 잠은 어디서 자려고 해?”

“저희 집으로 가요!”

“아니야! 우리 집이 더 좋아!”

베리니의 말에 눈치 없는 아이들이 신나서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야단법석이었다. 애슬란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베리니에게 미소를 지었고 베리니는 더 울상이 되었다.

“어이! 저 아이들의 집으로는 갈 생각조차 하지 마! 가뜩이나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집들인데, 입이 하나 늘어나서 근심거리 늘려주지 말라고! 대신 며칠 전에 영주에게 빚을 지고 자살한 야물의 집을 알려줄게! 그리로 가!”

“레먼형! 거긴 귀신이 나오잖아요!”

귀신이란 말에 베리니는 울상이 되었다.

“귀신도 영웅은 무서워한다고 그러더만 뭐!”

레먼이 베리니를 보며 웃었다.

집안으로 들어오는 입구의 문은 위쪽만 붙어 있어 덜렁덜렁 거렸고 바닥은 썩은 이불과 정체모를 쓰레기들로 가득했다. 곰팡이냄새와 쾌쾌한 냄새 때문에 창문을 모두열고 청소한지 반나절이 되었지만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았다. 애슬란이 쓰레기를 한쪽 끝에 모았고 그것을 들고나가는 베리니가 투덜거렸다.

“전 집필관이지 청소부가 아니라고요!”

“미안! 그래도 잠은 자야지!”

애슬란이 웃으며 썩어 문드러진 장판을 들어냈다. 놀란 좀벌레며 바퀴벌레들이 ‘후두룩’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달아났다. 장판을 들춰낸 자리에는 벌레들이 뜯어 먹었는지, 군데군데 뜯겨져나간 종이가 있었다.

‘영주에게 많은 돈을 빌렸다. 실컷 써보고 싶었다. 반도 써 보질 못하는 구나! 돈을 쓰면 쓸수록 무서운 영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단 하루라도 인간답게 살아보고 싶었는데……. 그래도 나는 행운아다. 바다건너 머나먼 대륙에서 왔다는 탁발승을 만났으니까! 그는 나에게 다음 세상에 귀족으로 태어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나는 영주에게서 빌린 돈의 나머지 절반을 그에게 주었다. 나머지 반도 쓰질 말걸 그랬다. 돈이 너무 작어서 힘없는 귀족이 될까 두렵다. 그래도 지금보다야 낳겠지!’

자살한 야물은 글은 깨우쳤는지 삐뚤삐뚤한 글씨로 유서 비슷한 메모를 남겼다. 영주의 괴롭힘과 사이비 탁발승에 속아 자살까지 이르게 되었지만, 그 탁발승 때문에 적어도 그의 마지막은 행복했다. 불쌍하게 죽어간 야물을 생각하고 있는 애슬란을 깨운 것은 베리니였다.

“애슬란형! 누가 왔어요! 나와 봐요!”

베리니의 말에 밖으로 나온 애슬란의 앞에는 이런 빈민가에 살 것 같지 않은, 화려한 옷차림의 어여쁜 아가씨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랭킨영주님의 명으로 애슬란님을 수발하기 위해 온 이렌이라 합니다.”

약간 검은 피부에 도톰한 붉은 입술, 허리를 질끈 동여매어 잘록한 허리가 여성미가 물씬 풍겨나는 여자였다.

“저는 지금도 괜찮으니 개의치마시고 돌아가세요. 영주님께 신경 써 주셔서 고마운데 저는 지금도 만족하니, 정말로 신경 안 써 주셔도 괜찮다고 전해주세요!”

“평민 출신이 아니라! 그냥 평민이라니까! 평민!”

베리니가 애슬란을 보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섹시한 느낌이 나는 이렌의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랭킨영주가 꽤나 아끼는 종을 큰 인심 쓰듯 애슬란에게 보냈다. 오프렛기사단이 아무리 대단하다 했지만 한 지역의 영주가 애슬란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애슬란이 크린튼의 사위가 될 것이라는 소문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저는 매를 맞습니다.”

애슬란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때 낮에 넘어져 애슬란이 일으켜주었던 한 꼬맹이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엉엉! 누나! 누나!”

얼굴이 온통 눈물자국으로 범벅이 된 아이가 달려와 이렌에게 안겼다. 이렌의 깨끗한 옷이 더러운 땟자국으로 얼룩이 졌지만, 이렌은 개의치 않고 동생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센도! 잘 있었어?”

“누나 금방 온다고 했잖아! 영주가 괴롭히지는 않아?”

‘훌쩍’ 거리며 센도가 이렌의 걱정을 했다. 이렌은 자신의 화려한 옷을 가리켰다.

“이렇게 좋은 옷에 좋은 음식이 매일 나와! 누나는 너무 잘 지내!”

“정말이야.”

센도는 갑자기 애슬란에게 달려가 다리를 꽉 붙들었다.

“형! 우리 누나를 보내지 마요!”

애슬란이 자신의 다리에 붙은 센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렌! 내가 여기 머물 동안 가족들의 집에서 지내! 영주께는 이렌이 일을 참 잘 한다고 전해 줄께!”

“아니에요! 저는 여기에 머무르면서 애슬란님의 시중을 들겠습니다.

이렌이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지 주변을 살폈다. 베리니도 누군가를 찾는지 주변을 살피다 애슬란에게 소곤소곤 말을 했다.

“형! 저렇게 예쁜 노예를 보내고 불안하지 않을 영주가 있겠어요! 랭킨은 혹시라도 이렌이 도망칠까봐 누군가를 붙여 놓았을 거예요!”

폐가에는 식구가 늘었고 능수능란하게 청소를 잘 하는 이렌 덕분에 청소하는 속도가 크게 빨라졌다.

애슬란의 배려에 제일 깨끗한 방에서 홀로 잠을 잔 이렌이, 아직 해가 뜨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눈을 떴다. 이렌의 뇌리 속에 어젯밤부터 궁금증을 유발하는, 애슬란이라는 남자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색만 밝히던 여태까지의 귀족들과 다른 행동! 다른 사람들이 그냥 형이라고 불러도 개의치 않는 모습! 애슬란은 자신이 알고 있던 귀족들과는 달랐다. 이렌은 잡념을 떨쳐버리듯 머리를 흔들며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녀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 온 것은 애슬란이었다.

아직 아침바람이 차가웠지만 애슬란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애슬란은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돌아 이렌을 바라봤다.

“더 자지! 왜 이리 일찍 일어났어?”

“버릇이 돼서요! 지금보다 늦게 일어났다가는 집사님께 혼쭐이 나요!”

이렌이 웃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해가 조금씩 얼굴을 내밀면서, 햇빛이 애슬란의 검에 반사되었다. 애슬란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황금색 빛이 뻗어 나갔다.

“물 좀 줄래?”

검술 훈련을 마치고 땀으로 범벅이 된 애슬란이 부엌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침준비를 하다 이렌이 물을 떠 애슬란에게 건넸다.

“부지런하시네요!”

“나도 버릇이 돼서! 조금이라도 게을러지면 몸이 금세 둔해지더라고!”

탁자에 많은 음식이 준비 되어 있는 것을 보자 베리니가 입맛을 다졌다.

“돈이 어디서 나서 이렇게 많은 음식을 준비한 거야?”

“영주님이 애슬란님을 대접하라고 꽤 많은 돈을 주셔서 어제 저녁에 장을 봤거든요!”

“나는 이렌이 밖으로 나가는 것도 보질 못했는데……. 그 돈은 이렌이 써! 그리고 앞으로 이렇게 음식준비 같은 거 하지 마! 나도 할 수 있으니까?”

“아니에요! 어차피 이 집에 살면서 저도 밥값은 해야죠!”

“정 그렇다면 이 돈을 써!”

애슬란이 품에서 은화 5개를 건넸다.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많은 돈도 아니었다.

“아직 내가 부자가 아니니까! 오늘처럼 이렇게 음식은 많이 하지 마.”

애슬란이 웃으며 부엌을 나섰다.

“그냥 평민이라니까!”

베리니가 밥알을 튀기며 애슬란이 들을 수 없게 투덜거렸다.

애슬란은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아침을 때우고 일찍 길을 나섰다. 바쁘지 않은 사람들은 마을의 큰 소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는 곳으로 모여 달라 부탁했다. 애슬란은 사람들을 모아 산적이나 오크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벽을 보수하려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강도로 돌변했고 인근 돌산에는 오크들이 거주하며 인간들을 사냥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과의 약속장소에 도착한, 애슬란의 눈에 띈 것은 레먼뿐이었다.

“어이! 이곳에 바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그 모냐! 사람들을 소집하고 싶다면 강제 소집령이라도 내렸어야지! 당장 오늘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성벽보수를 하라는 건지!”

“그럼 너와 나 그리고 베리니, 이렇게 셋뿐인가?”

“어이 난 빼줘! 지킬 사람도 없는 성벽을 모하러 보수한다는 거야! 그보다 쓰레기더미를 뒤져서 먹을 것을 찾는 아이를 돕던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영주의 농지를 개간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어때?”

레먼이 애슬란을 보며 비웃었다.

애슬란은 어제부터 지금까지 마을에서 나이든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이왕 봉사활동을 하는 바에야 가장 어렵게 사는 마을인 이곳, 살루멘고을을 지원했는데 이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인 살루멘은 왕권이 닿지 않아 영주의 폭정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레먼! 네 말대로 마을 사람을 도와 농사를 돕는 것이 낳겠는걸! 우리 셋이 돕는다면 사람들이 좀 더 일찍 일을 끝내고 쉴 수 있을 거야!”

“형! 저는 청소부도 아니고 농부도 아니고 집필관이라니까요!”

베리니의 통통한 볼에 불만이 가득 찼다.

자신들의 곁으로 다가오는 애슬란을 보며 사람들은 경계의 태세를 취했다.

“이 분이 그 유명한 애슬란이에요! 여러분을 돕겠대요.”

특유의 비꼬는 말투로 레먼이 마을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어차피 며칠간만 돕는 시늉을 하며 있다가, 귀족들의 세계로 갈 사람이었다. 지금 우릴 감시하는 병사들처럼 도끼눈을 하고 우릴 감시하는 것은 아닌가? 마을 사람들은 애슬란에게 경계의 태세를 취했다.

“그래도 그제 비가 와서 작업하기가 좀 수월하네요!”

허리를 피기 위해 잠시 일어난 노인에게, 애슬란은 밀알을 심기 위해 땅을 뒤집으며 친근하게 말했다.

“예! 지금 밀알을 심어야 무럭무럭 잘 클 것입니다.”

“어르신! 말 편하게 하세요! 저희 아버지보다 더 연세가 많으신데…….”

“아닙니다. 무슨 큰일 날 소리를! 저 같이 천한 것이…….”

“정말 괜찮다니까요? 저도 어렸을 때는 끼니를 해결하기위해 남의 집 농사일을 도왔습니다.”

애슬란이 웃음을 지어보이며 갑자기 농민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꽃이 피고 봄이 오면서 우리 농민들의 시대가 왔네! 이곳 밭에서는 우리가 임금이네!”

“뒷집 사는 총각은 이 좋은 임금 짓 할 생각 않네! 옆집에 이사 온 과부생각뿐이라네!”

노인이 애슬란의 노래자락에 흥겨워 후렴부분을 소리 높여 불렀다. 고된 농사일에 모처럼 사람들의 안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능수능란하게 농사일을 하는 애슬란을 보며 사람들은 동질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감시하는 병사들이 애슬란 덕분에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묵묵하게 일을 하는 애슬란을 보며 마을사람들도 하나 둘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 집에 도착하자, 지저분했던 폐가가 이렌 때문에 한결 깨끗해져 있었다. 누나와 놀고 있던 센도는 애슬란이 집에 온 것을 보자, 부모님들도 일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다.

“금방 저녁을 준비할 테니! 우선 씻으세요!”

이렌이 부엌으로 향했다.

“형! 내일도 농사지으러 갈 거요! 나는 못 가겠소! 지금도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요!”

“아까 보니 농민의 피가 흐르던 것 던데, 빼긴 어딜 빼려 그래! 내가 나중에 기사단에 들어가면 네 은혜는 잊지 않을게! 조금만 더 도와줘!”

베리니가 마지못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아침보다는 차림이 간소해진 저녁을 먹었다. 하지만 이렌의 정갈한 음식들은 그런 것들을 커버하고도 남았다. 밥을 먹으며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이는 이렌을 보며 베리니가 먼저 물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거야?”

“센도가 그러던데 애슬란님은 평민출신이라고…….”

“흠! 애슬란님에 대해 그런 것도 몰랐단 말이야! 귀족들도 합격하기 힘들다는 오프렛기사단에 귀족들을 제치고 수석으로 합격하신 분이야! 수도에서의 환영식이 얼마나 대단했다고 거기다 크린튼백작의…….”

“베리니. 그만해! 왜 그래 창피하게!”

애슬란이 쑥스러운지 베리니의 말을 잘랐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농사일은 끝이 없었다. 똑같은 일상은 시간을 빠르게 흘려보냈다. 이제 닷새간의 시간만 지나면 오프렛기사단으로 귀환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오늘 아침도 언제나처럼 검술훈련을 하는 애슬란에게 이렌이 물을 떠 가지고 다가왔다.

“고마워!”

“아니에요! 베리니님은 오늘도 늦잠이네요!”

이렌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일은 이곳에 높은 사람이 오나봐! 농민들을 감시하던 병사들도, 모두 경비를 서고 마중을 나가기 위해 농사일은 쉰다고 그러더라고! 이곳에 오고 처음 휴식이네!”

“그렇게 높은 사람이 오나요?”

“나도 몰라! 우리일도 아닌데 신경 쓸 필요 없잖아!”

장가를 가는 농부에게도 일을 시키는 악덕 영주가, 이렇게 모든 농부를 쉬라고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 나도 닷새 후면 떠나야 하는데……. 이렌이 그 동안 고생을 많이 해서 나도 뭘 하나 해주고 싶은데 뭐 필요한 것 없어?”

애슬란이 떠난다는 말에 이렌의 얼굴이 무척 어두워졌다. 하지만 수건으로 땀을 닦는 애슬란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아무것도 필요 없는 거야? 그럼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이렌이 아무 말도 없자, 애슬란이 한 번 더 물었다.

“꼬....꽃놀이를.. 하고 싶어요!”

“뭐야! 한참 뜸을 들이더니 겨우 그거야? 그래 내일 베리니하고 셋이 들판에 나가 꽃놀이나 하자!”

푸른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연두 빛 들판을 애슬란과 이렌 둘이 걷고 있었다. 들판에는 노란 민들레꽃이 만개하였고 민들레 씨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군데군데 보라색의 제비꽃과 분홍의 진달래가 바람에 흔들거리며 지나가는 사람을 유혹하고 있었다.

“야! 농사만 짓다보니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네! 베리니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베리니는 농사일만 하다 보니, 애슬란이 이곳에 와서 한 일을 하나도 쓰질 못했다. 사실 농사일만 한 애슬란에게는 쓸 이야기가 없었다. 베리니는 애슬란의 일을 영웅담처럼 만들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다. 정이 든 애슬란의 봉사활동을 농사일만 했다고 적을 수는 없었다.

‘둘이서 갔다 오슈! 나는 혹시나 농사꾼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농업기술서나 편찬해야겠소!’ 라고 핀잔을 주던 베리니가 떠오르자 둘은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쉴까?”

애슬란이 먼저 잔디위에 앉았고 이렌도 따라 자리에 앉았다. 이렌은 주위의 민들레 씨를 꺾어 입에 가져다 대고 ‘후’ 하고 불었다. 하얀 민들레 씨가 하늘에 날렸다.

“애슬란님도 이 민들레 씨처럼 곧 떠나야겠죠?”

“응! 아무도움도 안되고 여기 와서 폐만 끼치고 가는 것 같아 미안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애슬란을 보자 이렌의 얼굴에 그늘이 졌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도움이 왜 안돼요! 마을 아이들과 사람들이 애슬란님을 보며 얼마나 밝아졌는데요!”

물론 자신이 가장 많이 밝아진 것을 이렌도 알고 있었다.

“귀족이나 평민, 노예 할 것 없이 모두 웃으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애슬란의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심각한 말에 이렌과 애슬란의 침묵이 이어졌다.

“우리 도시락 먹어요!”

이렌이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바구니에서 샌드위치와 딸기를 꺼냈다.

“우와! 언제 준비한 거야!”

애슬란이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정말 맛있는 걸! 여기를 떠나도 이렌의 음식 맛은 절대 못 잊을 거야!”

“저는 잊으실 건가요?”

이렌의 말에 시간이 정지된 듯, 애슬란이 샌드위치를 베어 문채로 이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호호! 뭘 그렇게 심각해해요! 나중에 출세해서 높은 사람이 되면 절 잊지 말고 요리사로 써주기에요!”

봄 날씨가 포근하여 절로 잠이 왔다. 따스한 봄바람이 스쳐지나간 자리는 사랑하는 연인이 쓰다듬어 주듯 부드러웠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자유와 평온함이었다. 그런 평온함에서 영원히 깨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다급하게 나를 깨우는 손길에 이렌이 눈을 떴다. 애슬란이 다급하게 왼손으로 자신을 흔들며, 오른손으로 허리의 검을 뽑았다. 애슬란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서 한때의 인마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렌! 절대 내 뒤에서 떨어지면 안 돼!”

이 넓은 들판에서 저들은 분명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맹렬하게 달려오는 기세로 보아 절대 좋은 뜻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스무 명의 말 탄 사람들은 금세 가까이 다가와 둘을 에워쌌다. 그들 가운데 낮 익은 사람이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에 큰 눈,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볼 살의 작은 보조개가 매우 귀여운 블레어였다. 그러나 지금 블레어의 얼굴에선 귀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살맛났군! 살맛났어! 우리 아버지의 돈을 거부하고 기껏 한다는 봉사활동이 창녀와 놀아나는 것이야?”

블레어가 애슬란과 이렌을 쳐다보며 역겹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언제나 네 멋 대로군! 함부로 말하지 마!”

랭킨이 높은 사람을 영접하기 위해, 농부들을 쉬게 하면서까지 기다린 사람은 크린튼의 딸 블레어였다.

“흥!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더만! 결국은 더러운 창녀랑…….”

“시끄러!”

애슬란이 소리를 질렀다. 애슬란이 소리를 지르자 블레어가 움찔했다.

“이 여자는 창녀가 아니야!”

“그럼 뭐지? 랭킨은 네가 편히 즐길 수 있게 어여쁜 여자를 보냈다고 하던데…….”

왕과의 혼사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자 크린튼이 블레어가 애슬란을 잊게 하도록 만든 술수였다. 그리고 그 술책에 블레어까지 완벽히 속아 넘어갔다. 크린튼은 고생하고 있는 애슬란을 위로하라며, 웬일인지 자신을 살루멘으로 가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웬 여자와 다정스럽게 있는 애슬란을 보자 블레어는 눈이 뒤집혔다. 블레어가 이렌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원래 네가 하는 일이 귀족들에게 몸을 주고 환심을 사는 것이잖아! 퉷!”

블레어가 말 위에서 뱉은 침이 이렌의 얼굴에 정통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렌은 블레어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더 수치스러웠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흥! 네가 하는 짓이 훨씬 더 지저분해서 구역질이 나는데…….”

애슬란이 자신의 소매 안쪽으로 정성스럽게 이렌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애슬란의 말보다 그 모습이 블레어를 더 화나게 했다.

“저 년 놈을 죽여 버려라!”

블레어의 한 마디에 말 위에 있던 병사가 창을 내 질렀다. 애슬란이 병사가 내지른 창을 겨드랑이 사이로 잡았다. 그리고는 병사의 팔을 낚아채 내동댕이쳐 버렸다. 다른 병사가 그 틈을 타 애슬란을 향해 검을 내리 찍었다. 애슬란은 이렌을 살짝 민 후, 날아올라 병사의 목을 베어버렸다. 또 다시 병사 두 명이 다가와 검을 내 질렀고 애슬란은 이렌을 밀었다 당겼다 하면서 병사들 향해 위협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렌과 애슬란은 점점 궁지에 몰렸지만 쓰러지는 것은 애슬란이 아닌 병사들이었다. 한명씩 애슬란의 공격에 상처를 입고 말에서 떨어졌다. 애슬란이 이렌을 끌어당기며 한 병사의 허벅지에 검을 내리 찍었다.

병사들은 감히 애슬란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연약한 이렌곁을 맴돌았다. 그러니 싸움자체가 되지 못했다.

“멈춰라! 과연 오프렛기사단에 수석으로 합격할만하군! 애슬란! 꼭 후회하게 해주겠어!”

열세 명의 병사가 남았지만 가망이 없는 것을 안 블레어가 병사들을 제지 시켰다. 블레어가 애슬란과 이렌을 번갈아 노려보고는 돌아갔다. 병사들이 돌아가고 한참이 지났어도 이렌의 울음은 멈추질 않았다.

“저.. 때.문에.. 흑흑! 제가 이런 곳에 놀러 오자고만 하지 않았어도, 아니 처음 애슬란님께서 돌아가라 했을 때 돌아가기만 했어도…….”

애슬란은 이렌의 어깨를 다독였다.

“네 잘못이 아니야! 나도 꽃놀이를 꼭 한번쯤 해보고 싶었어!”

애슬란은 측은한 눈으로 이렌을 바라보았다.

애슬란과 이렌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폐가의 마당에 들어서자 인기척을 듣고 베리니가 쏜살같이 달려 나왔다.

“큰일 났어! 둘이 가고 난 후, 병사들이 들이닥쳐서 마을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어!”

“이유가 뭐야!”

“마을 사람들이 마녀 이렌의 꼬임에 빠져서 음탕하고 사악한 짓을 일삼았다는 게 이유야!”

베리니가 울음을 터트렸고 애슬란의 뇌리에는 블레어가 떠올랐다.

“마을 사람들이 성나서 이렌의 부모님과 센도를 잡아갔어!”

베리니의 말에 이렌이 푹하고 쓰러졌다.

“어느 쪽이야!”

“마을 중앙의 큰 소나무가 있는 곳!”

“베리니 위험하니 집안에서 이렌을 잘 돌보고 있어! 이렌 너무 걱정하지 마!”

애슬란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마을의 큰 소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했지만 소나무 주변은 평소와 같이 평온했다. 마을 노인 네 명이 한담을 하며 이야기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애슬란이 얼른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베리니에게 속았다.

“너도 한발자국 늦었군!”

큰 키의 레먼이 애슬란의 뒤를 따라 집에 들어왔다. 레먼은 평소에 잘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 마을에 나타났기에 그들의 동태를 살폈다. 그런데 그들의 목표가 이렌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너의 값싼 동정이 이렌을 죽인거야!”

그때 한 꼬마가 달려와 레먼을 잡고 물었다.

“엉! 엉! 레먼형! 그게 무슨 말이야! 누나가 죽다니!”

모처럼의 휴가에 센도는 아침부터 누나를 찾았다. 그러나 이렌과 애슬란은 아침 일찍 꽃놀이를 나가 찾을 수가 없었다. 매 시간마다 누나를 찾기 위해 애슬란의 집을 방문했던 센도는 레먼에게서 뜻밖의 소리를 듣고 말았다.

“레먼형! 엉엉! 누나를 살려줘! 앞으로 형이 놀기만 좋아하는 건달이라고 놀리지 않을게!”

센도가 레먼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려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레먼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레먼에게 매달려 있던 센도의 눈에 애슬란이 눈에 띄었다. 센도가 울면서 애슬란에게 달려왔다.

“레먼형이 형은 아무에게도 지지 않는 무적이라 그러던데 우리 누나 좀 살려줘요!”

처음 레먼은 애슬란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애슬란을 보며 아이들이 꿈을 갖는 것을 보자, 아이들의 꿈을 꺾고 싶지 않았다. ‘무적의 애슬란’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아이들이 꿈을 잃지 않도록 했다.

애슬란이 울고 있는 센도를 안아 올렸다. 애슬란이 눈물로 범벅이 된 센도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형이 누나를 꼭 구해 올께! 집에서 기다려!”

애슬란은 아이를 내려놓고 문을 나섰다.

‘쾅! 쾅!’ 거대한 저택의 문이 부서질 듯 큰 소리를 냈다.

“문을 열어라!”

한 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저택의 문이 활짝 열렸다. 수십 명의 병사들 사이로 몸을 움직이기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뚱뚱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무슨 소란이냐!”

화려한 옷차림의 뚱뚱한 랭킨이 직접 애슬란을 맞았다.

“블레어를 나오라고 해 주십시오!”

“일개 기사단의 단원이 영주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냐?”

“블레어! 블레어!”

랭킨의 호통에 애슬란이 블레어를 목청 높여 부르기 시작했다.

“저 놈을 잡아들여라!”

랭킨의 명에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애슬란에게 들이 닥쳤다.

“멈춰라!”

날카로운 여자의 음성에 병사들이 모두 멈춰 섰다. 잠시 후 랭킨의 뒤쪽에서 블레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애슬란! 나에게 볼일이 남았나!”

블레어가 웃으며 애슬란에게 다가왔다.

“네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할게! 이렌을 살려줘!”

블레어의 뺨에 눈물이 흘렀다.

“네가 그녀와 잠을 잤는지 안 잤는지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냐! 너의 이런 모습이 나를 더 아프게 한다고! 그녀를 그냥 살려 달라고 하면 되지 왜 내가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하겠다는 거야!”

마지막 말을 하면서 블레어가 소리를 질렀다.

“미안해!”

“끝까지 그런 식이군! 돌아가 그녀는 죽었어!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냐! 수도로 돌아가!”

‘찰싹’ 이렌이 죽었다는 말에 애슬란이 그녀의 뺨을 때렸다.

애슬란은 무작정 걸었다. 이렌을 구해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마을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블레어의 말대로 갈 곳이 오프렛기사단밖에 없었다. 무작정 걸었다. 자신 때문에 이렌이 죽었다. 희생정신을 배우기 위해 살루멘에 왔지만, 오히려 나는 마을에 불행을 안기기만 했다. 굶주림과 헐벗은 백성에게는 돈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고 말한 기사단장의 말이 떠올랐다.

밤새 걷기만 했다. 무수한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지만 결론은 없었다. 해가 중천에 떠서 애슬란의 머리를 따스하게 달구었지만, 애슬란의 초점 없는 눈동자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결국은 도망가는 것이냐?”

애슬란의 상념을 깨운 것은 레먼이었다.

“오늘 저녁에 랭킨이 본보기로 마녀를 화형 시키겠다고 하더군!”

애슬란은 레먼의 말에 정신이 돌아 왔는지,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어제 감옥의 좁은 창살사이로 이렌을 만났네!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죽게 만든 자네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고 하더군! 그녀를 구하라는 터무니없는 소리는 하지 않겠네! 자네를 보고 싶다는 그녀의 마지막 소원이나 들어주게!”

화형장에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모였다. 아무도 빠지지 말라는 영주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렌과 그녀의 가족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 수 없었다. 영주의 눈 밖에 났다가는 자신도 저 화형장에 묶여있을 수 있었다. 그녀를 위해 슬퍼하는 사람은 그녀의 가족뿐이었다. 지친 이렌은 눈을 감고 조용히 화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블레어는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애슬란이 나타나지 않기만을 바랬다. 그래야 자신도 이렌을 죽이지 않을 수 있다. 블레어는 애슬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애슬란이 이렌과 더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둘의 다정함에 질투 났고 마지막에는 그녀를 챙기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

‘둥! 둥! 둥!’ 화형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대로 애슬란이 나타나지 않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오른쪽병사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소란이 났다. 블레어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에 흐릿해진 시야에 무서운 속도로 병사를 뚫고 오는 사람이 보였다.

“애..슬...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애슬란을 보자 제일 신이 난 사람은 센도였다.

“누나! 눈 좀 떠봐! 애슬란형이 누나를 구하려고 왔어! 누나! 누나!”

센도의 눈물 섞인 고함소리에 이렌이 눈을 떴다. 이렌의 입에 힘겨운 미소가 지어졌고 양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년을 죽여라!”

블레어의 말에 화살이 이렌에게 쏟아졌다.

“안 돼!”

애슬란의 고함소리가 뒤늦게 처형장에 울려 퍼졌다. 애슬란이 뛰어올라 나무기둥의 밧줄을 순식간에 끊고, 그녀를 안고 내려섰다.

“이렌! 이렌! 눈을 떠! 내가 왔잖아!”

이렌이 힘겹게 눈을 떴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당..신을 만..난.. 시간.동안... 행복했.어요. 슬..퍼 말..아요. 당신..을 만..나서 내 인생이 행복했으..니까요!”

이렌이 힘겹게 울고 있는 애슬란의 눈물을 닦아주려다 힘없이 팔을 떨어트렸다.

애슬란은 조심스럽게 이렌을 내려놓고 블레어를 노려보았다. 블레어를 노려보는 애슬란의 눈에 눈물이 흘렀고 블레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갑자기 애슬란이 야수처럼 블레어에게 달려갔다. 한 병사가 휘두른 칼이 애슬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며 피가 튀었다. 하지만 애슬란을 막을 자는 없었다. 애슬란이 휘두르는 검에 병사와 병장기가 같이 두 동강이 나버렸다. 블레어의 옆에 있던 랭킨이 겁을 먹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애슬란을 막으려는 병사들이 힘없이 쓰러져나가자 병사들도 겁을 먹고 감히 애슬란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블레어의 코앞까지 당도한 애슬란이 검을 뻗었고 그녀도 검을 뻗었다.

그녀의 검이 애슬란의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애슬란이 블레어의 어깨에 힘없이 기대어 섰다. 애슬란은 그녀를 찌르지 못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애슬란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지면서 무릎을 꿇었다.

“애슬란! 애슬란!”

블레어도 무릎을 꿇고 애슬란을 끌어안았다.

“헉! 헉! 넌... 모든 것을 가졌잖아! 허! 헉!”

애슬란의 목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내 마음까지 다!”

블레어의 품에서 애슬란이 힘없이 빠져나가며 그대로 쓰러졌다.


Comment ' 7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19:54
    No. 1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17:20
    No. 2

    이런 분 계시죠;; 제목 부분은 자동으로 바뀌니까 "가제 단편제"이렇게 넣지 말랬는데 넣으시는 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4 21:04
    No. 3

    잘 읽었어요 ㅎㅋ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6 20:50
    No. 4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7 13:47
    No. 5

    글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색다른 면이 안 보이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9 16:02
    No. 6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9 21:01
    No. 7

    아주 멍청하거나 이기적인 사람이네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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