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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의 추억

작성자
익명
작성
10.03.20 16:43
조회
2,615

바이의 추억

띠리리링~띠리링~~

근 한 달 만에 쉬는 토요일이라 잠이나 실컷 자자고 결심했던 윤주는 그 결심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없이 울려대는 벨소리에 몽롱한 목소리로 휴대전화의 슬라이드를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여보세요.”

“이윤주 씨 되십니까?”

“그런데요.”

“경찰서입니다.”

피곤에 지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윤주의 귀에 닿았다.

“에이씨. 어디서 사기전화야?”

경찰이란 말에 잠시 멈칫했던 그녀는 짜증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슬라이드를 닫고 내팽개치듯 침대 머리맡에 전화를 던져버렸다.

막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휴대전화가 또 울려댔다.

그녀는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집어 들었다. 이번엔 발신번호를 확인해 보았다. 생판 모르는 번호였다. 아까의 그 사기전화인 것이 분명했다.

“끈질긴 놈들.”

투덜거린 윤주는 베개 밑에 전화기를 폭 파묻히게 넣어 두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두툼한 배게 밑에 전화를 놓아둔다고 소리가 아예 안 들리는 건 아니었다.

벨 소리는 잠시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며 5분 동안 계속 울려댔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서는 베개 밑의 전화를 거칠게 집어 들었다. 좀 전의 그 모르는 번호다. 슬라이드를 올렸다.

“이윤주…….”

상대가 말을 제대로 꺼내기도 전에 윤주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 사기 치지 말라니까. 나 경찰서에서 연락 받을 만큼 잘못한 거 없거든? 안 통할 것 같으면 포기하고 딴 사람을 물색해야지. 계속 전화하는 심보가 뭐야? 그런다고 내가 너희 사기 수법에 넘어갈 것 같아? 경찰에 신고할 거야.”

수화기 반대편에서 긴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윤주의 얼굴엔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이제 통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알았으면 이제 그만 끊어라.”

“이윤주 씨.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가 경찰서입니다. 강현수 씨라고 아시죠?”

윤주는 있는 대로 인상을 구겼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저렇게 나온다면 뭔가 있을 수도 있었다.

경찰서. 경찰서?

그녀는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을 만한 일이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주위에 사고치고 경찰서 유치장에 갇힐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운전을 하지 않으니 벌금 내라는 말도 아닐 터였다. 그리고 벌금 고지서는 우편으로 오지 않던가.

근데 강현수?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 것 같긴 한데…….

“강현수 씨라고 모르십니까?”

그녀의 침묵이 조금 길어지자 채근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J고등학교 나온 강현수?”

“아직 확인해 보진 못했습니다. 근데 고인의 통화내역을 보니 이윤주 씨 이름 밖에 없어서 연락드렸습니다.”

“고인이요?”

제대로 말도 나눠 본 적 없는 고등학교 동창의 얼굴을 애써 떠올려 보던 윤주는 ‘고인’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막 떠오르려던 강현수의 얼굴이 산산이 부서지며 제대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네. 오늘 새벽에 뺑소니 사고로 사망한 채 발견됐습니다.”

윤주는 멍한 기분이 들었다.

강현수란 녀석. 학교 다닐 때 워낙 조용하고 말이 없던 터라 조금은 겉도는 존재였었다. 다행히 왕따를 당하거나 한 것 같진 않았지만 친한 친구 하나 없이 늘 혼자서 다녔던 것이 기억났다. 이미 십 년 전의 일.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생긴 건 멀끔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근데 통화내역에 자신의 이름이 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윤주였다.

동창회에 잘 나가지도 않고, 연락하는 동창들도 몇 되지 않는다. 현수와 연락이 닿을 방법은 거의 전무한 상태인데 어떻게 자신의 번호를 알고 통화내역에 남겼단 말인가.

게다가 그녀는 그 어떤 연락도 받은 바가 없었다. 최근에 발신자 미표시로 전화를 받은 적도 없을뿐더러, 모르는 번호로 전화 온 것은 번호를 바꾸고 자칭 경찰에게서 전화 온 지금이 유일했다.

“경찰서로 잠시 와 주셔야겠습니다. 시신을 확인해 주셔야겠어요.”

가고 싶지 않았다. 같은 반이었다고는 하지만 거의 모르는 사이나 다름없는 동창의 시신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 리 만무했다.

“제가 꼭 가야 하는 건가요?”

“바쁘시겠지만 어쩔 수 없네요. 이윤주 씨 말고는 고인과 관련된 사람을 찾을 수가 없는 상태라서요. 지문을 조회해 보고는 있는데 시간이 좀 걸리거든요.”

“……알겠습니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남자로부터 경찰서의 위치를 대충 전해 듣고는 전화를 끊었다.

잠시 멍한 기분이 들어 손에 전화를 든 채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멍한 기분이 되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머릿속에 그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다니.

고개를 휘휘 저은 윤주는 느릿한 동작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젠장. 한가한 주말은 날아갔네.”

두 시간 뒤 윤주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경찰서에 들어섰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여경이 친절하지만 웃음기는 없는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아, 네. 김민성이라는 형사님한테 연락받았는데요.”

여경이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아, 김 형사님. 이 여자 분이 연락받고 오셨다는데요.”

삼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피곤에 전 표정의 게슴츠레한 눈을 들어 윤주를 보았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걸어 그녀 앞에 섰다.

“이윤주 씨 되십니까?”

“네.”

“일단 시신 확인하러 같이 가시죠.”

민성이 앞장섰다. 윤주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그의 뒤를 따랐다.

“확인해 보시죠.”

비닐 백 같은 데에 넣어진 시신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 검시관이 비닐 백의 지퍼를 열었다. 그러자 누군가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 아래 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것치고 얼굴은 꽤 멀쩡했다.

어련하게 기억을 맴돌던 얼굴이 또렷한 형상을 띤 듯 눈앞에 있었다.

“강현수 씨가 맞습니까?”

“휴~네. 맞아요. 얼굴 보니까 확실히 기억이 나네요.”

잠시 빤히 시신을 보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기억의 편린에 사로잡혀 가만 보고 있었지만 시신을 보는 것이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님은 분명했다.

“나갈까요?”

“네.”

두 사람은 발길을 돌려 시체안치실을 빠져나왔다. 그녀의 뒤로 비닐 백의 지퍼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멈칫한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서서히 비닐 백 안으로 감춰지는 현수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앞서 가는 민성의 뒤를 따랐다.

윤주와 민성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요.”

“네.”

민성은 컴퓨터 자판에 손을 얹고는 질문을 시작했다.

“평소 고인과는 자주 연락했었습니까?”

“전혀요. 9년 전에 학교를 졸업한 뒤로 한 번도 강현수를 본 적이 없어요. 통화기록에 제 전화번호가 남아 있다고 하시지만 전화를 받은 기억도 전혀 없고요.”

컴퓨터 자판 위에 올려져 있던 손으로 턱을 괸 민성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에 윤주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강현수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그 애가 J고등학교를 나왔다는 것과, 2학년 때 4반이었다는 것 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정말 이상하군요. 강현수 씨의 전화에 분명 ‘이윤주’라는 이름으로 번호가 저장돼 있었거든요. 사고 때문에 전화가 망가져서 전화번호부를 복원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만, 통화기록엔 이윤주 씨 번호밖에 없었던 게 확실합니다.”

윤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2학년 때 같은 반이었을 때도 그와는 한 번도 전화 통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십 년이 지난 뒤 새삼스레 전화를 한 것도 모자라 기록이 자기 밖에 없다고?

“그런데 왜 가족이 아니라 저한테 연락한 거죠?”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강현수라는 이름은 어떻게 안 건데요?”

“휴대전화에 본인 정보를 기록할 수 있잖아요. 이름만 적혀 있더군요.”

윤주는 이마를 짚었다. 휴대전화에 기록이 있을 정도면 번호 알기는 쉬울 거고 그러면 그 번호를 갖고 추적해 보면 될 것이 아닌가.

“휴대전화 명의는 다른 사람으로 돼 있었습니다. 일명 대포폰이라고 하죠?”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민성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일단 학교로 전화를 해 보죠.”

민성은 윤주의 모교인 J고등학교에 전화를 걸어 강현수에 대한 기록을 요구했다. 팩스로 그의 생활기록부가 도착하자 조회가 시작됐다.

“제기랄. 이러니까 지문 조회에 안 뜨지.”

민성은 욕지기를 내뱉으며 험악하게 투덜댔다. 그나마 여자 앞이라서인지 심한 욕은 자제하는 것 같았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겁먹을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왜 그래요. 김 형사님?”

아까 경찰서에 왔을 때 처음으로 윤주를 맞아 주었던 여경이 민성을 보며 물었다. 민성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주민등록증을 안 만들었어.”

“주민등록증을 안 만드는 사람도 있어요?”

윤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여경이 대답했다.

“주민등록증에 지문 들어가잖아요. 그게 싫다고 주민등록증을 안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지문 기록이 없지. 게다가…….”

민성이 있는 대로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끝을 흐렸다. 여경이 고개를 갸웃하며 민성의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저런. 가족이 없네요. 친척들은요?”

“없어.”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또 동시에 시선을 돌려 아직까지 민성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윤주를 보았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는 사람은 당신 밖에 없으니 어떻게든 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견디기 힘들었던 윤주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잠깐만요. 유품이라도 좀 거둬주시죠.”

“유품이요?”

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주는 갈등했다. 유품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과 더 이상 얽히면 골치 아파질 거라는 현실성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민성이 재빨리 발치에 놓여 있는 상자에서 그리 크지 않은 배낭을 꺼내들었다.

“신분을 증명해 줄만한 건 없었습니다만……. 일기장 비슷한 게 있더군요.”

그녀는 무심결에 민성이 건네는 가방을 받아들었다.

“그럼 시신은 행려자로 처리하겠습니다.”

“…네…….”

대답하기가 꺼림칙했다. 어쩐지 여자 경찰과 민성의 눈이 ‘매정한 여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동창 녀석의 죽음을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인정 있는 건 아니었다. 장례라도 치르려면 돈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갑작스런 지출을 포용할 수 있을 정도의 금전사정도 아니었다.

민성의 말대로 그냥 사고 전까지 현수가 매고 있었을 배낭을 챙겨 주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예. 가십시오.”

윤주가 경찰서를 나서고 나서 여자 경찰이 눈살을 찌푸리며 민성에게 말했다.

“매정하네요. 아무리 친한 사이가 아니라도 그렇지, 가족도 없는 동창 시신 좀 거둬주면 어디가 덧나나?”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잠시 생각하던 여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친한 친구도 아니고 단지 동창이었다는 이유로 시신을 거두기엔 삶이 너무 각박했다.

윤주는 집에 돌아와 현수의 배낭을 마주했다.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의 물건.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사람의 유품.

죽은 사람의 물건이라는 것만으로도 오스스 소름이 돋는 기분이라 그녀는 크기에 비해 다소 무거운 배낭을 옷장 깊숙한 곳에 처박아 놓았다.

그리고는 휴대전화를 들어 고등학교 동창인 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친한 친구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그녀를 꼽는 윤주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못 만난 게 몇 달은 된 것 같다. 전화를 한 것도 근 한 달 만에 처음이던가?

“어? 야, 이윤주. 웬일이야?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그러니 반가움은 제쳐두고 이렇게 툴툴거리는 말을 들어도 마땅히 할 말도 없었다.

“전화 안 한 건 너도 똑같잖아. 기집애야.”

“우리가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누가 전화한 거였더라?”

“쳇.”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현수의 죽음으로 심란해진 터에 그저 생각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이야?”

처음의 툴툴대던 반응과는 달리 걱정스런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윤주는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는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너, 혹시 우리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강현수라는 애 기억해?”

“강현수?”

아마 연희는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생각에 잠기고 있겠지. 아마 윤주 자신처럼 그에 대해 생각해내는 데에 퍽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그리고 기억하고 있는 내용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얼굴 좀 잘 생기고 얌전하던 걔 말이지?”

잘 생겼다고? 그랬던가?

윤주는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방금 전에 보고 온 현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생기라고는 전혀 없어 한 때 살아 움직이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던 그 얼굴.

그 얼굴을 보고 왔기 때문인지 살아 있던 그의 모습, 고등학교 때의 모습이 지워진 듯 잘 떠오르지 않았다. 참 이상했다. 막상 시신을 볼 때는 그 얼굴과 겹쳐져서 잘만 떠오르더니 지금은 그 기억이 시신의 얼굴로 대체된 양 제대로 생각나지 않았다.

“걔 너랑 잠깐 사귀었었잖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전화를 타고 들려왔다.

“말도 안 돼. 그런 적 없어.”

“어머, 얘 좀 봐. 아무리 이주일 밖에 안 사귀었다지만 아예 기억도 못하는 거야?”

“사귄 적 없다니까.”

윤주는 화까지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지금 애인도 없는 게 뭐 그리 발끈하냐? 네가 정 없었던 일로 하고 싶으면 그렇다고 해 두지 뭐.”

“정말 아니래도.”

심지어 억울하다는 듯 말하자 연희가 그녀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그렇게 발끈할 거면서 걔 얘기는 갑자기 왜 꺼냈어?”

“죽었어.”

“뭐?”

윤주는 민성에게 전화를 받은 것부터 유품을 받은 것까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세상에. 혹시 걔한테 네가 첫사랑이어서 생각났던 거 아냐?”

“됐어. 난 걔 얼굴도 간신히 기억해냈다고. 내가 지금까지 사귄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기억조차 못하겠냐? 아니니까 어디 가서 그런 얘기 하지도 마. 알았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연희의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정말 기억 못하는 거야?”

“기억 못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런 일이 없었대도!”

“윤주야. 너 정말 현수랑 사귀었었어. 장난 아냐.”

“나도 장난 아냐. 됐으니까 끊어.”

윤주는 다시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슬라이드를 내려버렸다.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연희에게 전화했던 건 기분을 풀기 위해서였지 이런 기분이 되고자함은 아니었다.

“괜히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해서는.”

그녀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민성의 전화 때문에 단잠에서 깨버렸던 터라 채 풀리지 못한 피로가 순식간에 밀려왔다. 경찰서에 간다고 나름 긴장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외출복 차림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커튼 틈으로 오후의 햇살이 비춰들고 있었지만 그녀의 잠을 깨우진 못했다.

탈탈 턴 칠판지우개를 들고 텅 비어 있을 교실 문을 열었다. 주번인 그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월요조회 때문에 밖에 나가 있을 터였다.

“어?”

그런데 누군가 있었다. 어디가 아픈 것인지 책상에 엎드린 채였다.

“강현수. 넌 왜 조회에 안 나갔어?”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살짝 창백한 얼굴이었다.

“너 어디 아파?”

“응. 머리가 조금.”

“그럼 양호실에 가지?”

그녀는 칠판을 정리하며 무심하게 말했다.

“아냐. 조금만 이렇게 엎드려 있으면 나을 것 같아.”

그는 다시 책상 위에 엎드렸다. 그녀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칠판정리를 계속했다. 그러나 곧 정리가 끝났고, 겨울방학 개학식을 겸한 조회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학기가 바뀌기 직전의 짧은 학기는 긴장감이라고는 거의 없는 시간이었다. 다만, 곧 고3이 되는 2학년들에게는, 마지막 자유를 즐길 수 있는 기간인 동시에 3학년을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끝나지 않는 조회에 지친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야, 강현수.”

그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슬쩍 시선만을 그녀에게로 향했다.

“넌 대학 어디 갈 거야?”

교장 선생님이 훈화를 하시는 데 자꾸 고3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무심코 물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 넌?”

“대학은 아직 잘 모르겠고, 행정 족으로 가 보려고.”

“그렇구나.”

다시 침묵이 흘렀다. 엎드린 채 눈만 내밀어 그녀를 보고 있는 그도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그녀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1년 동안 같은 반으로 지내면서 가장 길게 나눈 대화가 이 정도다. 몇 마디나 나눴다고 벌써 이렇게 할 이야기가 없으니 평소 그들의 사이를 알만 했다.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둬 다시 팔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넌 뭘 좋아해?”

침묵이 너무 어색하고, 그런 시간이 정말 지루했던 그녀가 다시 말을 걸었다.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아픈데 괜히 말을 시켜서 화가 났나 싶었다. 그래서 사과의 말이라도 주워섬기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막상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어젖혔다.

끝자락이긴 했지만 아직은 겨울의 기운이 남은 2월이라 문을 열자마자 찬바람이 훅 하고 그녀에게까지 끼쳐왔다.

“야, 창문 닫아. 춥잖아.”

“난 바람을 좋아해.”

“뭐?”

“뭘 좋아하느냐고 물었잖아. 바람을 좋아해.”

그리 길지 않은 그의 머리카락이 찬바람에 휘날렸다. 서늘한 늦겨울의 햇살과 더불어 그의 모습이 어쩐지 신비하게 보였다.

“미친 거 아냐? 그냥 말로 하면 되지 창문은 왜 여냐?”

그가 시선을 돌려 교탁에 몸을 기댄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미안. 닫을게.”

그는 어쩐지 아쉬운 듯 훅 불어오는 바람을 한 번 더 맞고는 천천히 문을 닫았다.

“너 아프다는 거 다 뻥이지?”

그는 휘적휘적 걸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아니, 진짜 아파.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는 다시 책상 위에 엎드렸다.

그런 그를 어이없다는 듯 보고 있던 그녀가 몸을 기대고 있던 교탁에서 손을 떼고는 그의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야, 강현수. 너 나랑 사귈래?”

말을 한 그녀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본인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빨리 주워 담아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고개를 든 그의 시선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좋아.”

“뭐?”

“좋다고.”

“너…….”

띠리리링. 띠리링

윤주는 다시 무심결에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윤주 씨. 김민성입니다.”

“누구라고요?”

깜깜한 방 안에서 침대 옆의 스탠드를 켜기 위해 손을 더듬거리던 그녀가 되물었다.

“아까 만났었잖아요. 김민성 형사입니다.”

그녀는 겨우 스탠드를 켜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는 전화를 건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스탠드의 불빛에 익숙해져 초점을 맞춘 뒤에야 경찰서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아, 네, 김 형사님. 근데 무슨 일이죠? 강현수에 대한 건 끝난 일이 아닌가요?”

“뺑소니 피의자가 잡혔습니다. 혹여 관심이 있으실까 하고요.”

‘별로 관심 없는데요.’라고 대답하려던 윤주는 순간 멈칫했다. 방금까지 꾸던 꿈의 내용이 어렴풋이 기억난 까닭이다.

“내일 오후에 경찰서로 가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늦은 시간에 미안했다는 둥, 잘 쉬라는 둥의 인사도 없이 민성은 툭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민성이 제대로 인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다시 강현수와 얽히는 행동을 하려하는지 스스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꾼 꿈도 영 기분 나빴다.

“설마 실제 있었던 일은 아니겠지?”

분명히 연희가 쓸데없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서 꾸게 된 꿈일 터였다.

손에 들려 있는 휴대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두 시.

그녀는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잠이 올 것 같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시간에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오후, 윤주는 퀭한 눈을 하고서 경찰서에 들어섰다. 이번엔 누군가의 도움 없이 바로 민성의 자리로 찾아갔다. 그는 이십대 중후반, 즉 그녀 또래의 남자와 대화중이었다. 남자가 경찰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범죄자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아마 참고인 정도로 출두한 모양이었다.

“김 형사님.”

“아, 이윤주 씨.”

민성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방금 전까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남자가 휙 고개를 돌렸다.

“이 여자가 이윤주라고요?”

윤주는 그가 현수와 아는 사이란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민성을 보았다.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강현수 씨 애인이라는군요.”

윤주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보았다. 남자 같은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분명 남자였다. 그가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채고는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되레 여자 같은 남자였는지 그 모습이 새침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떻게 된 거죠?”

“아, 뺑소니 범인을 잡으려고 탐문수사를 하다가 알게 됐습니다.”

윤주는 남자와 민성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군요. 그럼 전 이만 가 봐도 되죠?”

“…네.”

민성은 남자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불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윤주는 어쩐지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경찰서를 나섰다. 그러나 이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발길을 멈춰야 했다.

“이봐요. 이윤주 씨. 잠깐 기다려요.”

민성과 함께 있던 남자였다. 그는 택시를 잡으려던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생긴 건 여자처럼 곱상하게 생겼는데 그래도 남자라고 힘이 꽤 셌다. 잡힌 손목이 은은하게 아파왔다. 그녀는 힘을 주어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왜 이래요?”

“줄 건 주고 가야죠.”

그녀는 황당했다. 자기도 모르게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빚이라도 졌단 말인가.

“나 댁한테 빚진 거 없거든요?”

“현수의 유품 가지고 있잖아요.”

그제야 그녀는 ‘아’하며 그의 행동을 납득했다. 동창이지만 기억에도 없는 자신이 유품을 갖는 것보다는 애인이 갖는 게 당연했다.

“알았어요. 번호 찍어 줘요. 연락할게요.”

그녀가 핸드백에서 전화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굳어진 표정으로 전화와 그녀를 번갈아 보던 그는 내밀어진 그녀의 손을 탁 쳐냈다.

“지금 당장 내 놔요.”

까칠한 그의 반응에 윤주는 있는 대로 인상을 구겼다. 이 피곤한 태도는 뭐란 말인가.

새벽에 걸려온 민성의 전화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그녀였다. 그래도 약속이랍시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왔는데 짜증나는 일의 연속이다.

“집에 있거든요. 따라와서 받을래요?”

“당연하죠. 앞장서요.”

막말이라도 퍼부어 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는 윤주였다. 애인을 잃어 슬픈 마음이고, 유품을 빨리 얻고 싶은 마음에 예의는 잠시 무시한 것이리라 애써 그를 이해해 보았다.

택시가 오는 걸 본 남자는 재빨리 그 택시를 잡고는 직접 문을 열어 그녀를 안쪽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자신도 그녀의 옆 좌석에 타며 쌀쌀맞게 말했다.

“어서 가요. 집이 어디죠?”

막무가내인 그의 태도에 윤주는 인상을 잔뜩 구기며 그를 노려보았지만 여기서 실랑이해 봐야 피차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목적지를 말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그녀가 사는 작은 원룸에 도착했다. 오는 내내 한 마디도 없이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이제는 그녀가 더 서둘렀다. 그가 원하는 것을 얼른 줘서 쫓아버리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여기서 기다려요. 금방 갖고 나올 테니.”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서는 밖에 있는 그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문을 닫으려는데 그가 문을 꽉 잡았다.

“밤새도록 세워둘 셈이에요?”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지금 그녀가 현수의 유품을 준다고 말해 놓고 그를 계속 기다리게 해서 지쳐 돌아가게 만들려는 속셈이냐고 묻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문을 열어 놓고 밖에서 지키든, 안으로 들어와서 날 감시하든 마음대로 해요.”

윤주는 짜증을 가득 담아 앙칼지게 외치고는 쿵쾅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붙잡은 채 잠시 망설이던 그는 결국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장롱 문을 열어 안을 뒤적거리는 틈을 타 그는 그녀의 집을 휙 둘러보았다. 그리 호화롭다거나 넓은 건 아니었지만 서른도 안 된 여자가 혼자 살기엔 다소 비싸 보이는 집이었다.

“이런 집에 혼자 사는 걸 보니 돈을 잘 버는 모양이네요.”

장롱 깊숙한 곳에서 배낭을 꺼내든 윤주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쓸 만큼은 벌어요.”

“무슨 일을 하는데요?”

배낭을 들고 일어서며 이번에도 무심코 대답하려던 그녀는 그를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진지한 호기심으로 그녀를 보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보면 여자처럼 선이 가늘어 보이는데 키도 크고 호리호리하다. 시쳇말로 꽃미남이었다.

‘이런 게 동성애자라니 아깝다.’

괜히 아쉬운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직업이 뭔지 물었는데요?”

다시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윤주는 퍼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꽤 잘 생긴 얼굴이라 급하게 호감이 가던 마음이 냉랭한 한 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든 가방을 던지듯 그의 품에 안겨주고는 톡 쏘듯 말했다.

“이제 꺼져 주시죠.”

눈앞에 있는 남자가 잘 생긴 동성애자이든 말든 사실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 내키지 않게 받아온 현수의 가방을 그에게 넘김으로써 어제 오전 단잠을 깨우는 전화벨 소리에서 시작된 이 짜증나고 답답한 상황을 날려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자신의 품에 던져진 배낭과 윤주를 한 번 번갈아 본 그는 즉석에서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원하는 물건이 모두 있다는 걸 확인한 후에도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설마, 이 노트를 읽어 봤다거나 한 건 아니겠죠?”

“아, 진짜 짜증나게 구네. 안 읽었어요. 아니, 읽었다면 어쩔 건데? 고소라도 할 거예요? 내가 무례하게 구는 것도 다 참아 주고 곱게 돌려 줬더니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그나마 지금까지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그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 주던 그녀였다. 그러나 이런 것까지 따지고 들자 화가 나서는 반말을 섞어가며 짜증을 부렸다.

“졸업앨범 있어요?”

그런데 그녀가 화를 내든 말든 그는 이번엔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뭐? 졸업앨범?”

“네. 당신 현수랑 고등학교 동창이라면서요? 그 졸업앨범 말이에요.”

“지금 여기엔 없어. 뭐, 있다고 해도 너처럼 예의도 모르는 인간한테는 못 보여주지.”

“현수와 관련된 거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어요? 편지라든가, 사진이라든가.”

“그런 건 애인인 네가 갖고 있겠지. 단순한 그저 동창인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

이젠 완전히 반말을 하고 있는 윤주였다. 그녀는 속이 끓는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컵에 물을 따랐다.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를 따랐다.

“내가 현수를 만난 건 3년 전이에요. 그 전의 현수에 대해선 전혀 몰라요. 게다가 당신은 현수가 처음 사귄 사람이니까, 좀 더 많은 흔적을 갖고 있을 거잖아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그녀가 입 안의 물을 푸확 뿜어냈다. 사레가 들렸는지 연신 기침을 해대던 그녀가 한참만에야 겨우 진정하고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누가 그래? 내가 걔랑 애인이었다고?”

“숨길 필요 없어요. 내가 비록 현수 애인이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다 알고 있는 일이고, 또 이미 고인이니까요…….”

그가 말끝을 흐렸다. 고인이라는 말을 하는 그의 눈이 살짝 젖어들었다. 그러나 윤주를 강하게 인식한 때문인지 눈을 꼭 감았다 뜨더니 멀쩡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혹여 지금 애인을 의식해서 하는 말이라면 걱정 말아요. 내가 당신 애인을 만날 일이 없잖아요?”

“그게 아니라 나 강현수랑 사귄 적 없거든? 게다가 애인 따위 없……”

없다고 절규하듯 소리치려던 윤주는 황급히 뒷말을 삼켰다. 그녀의 나이 어느덧 서른을 바라보는 스물아홉이었다. 스물아홉에 결혼도 안 하고 애인도 하나 없다고 하면 그가 얼마나 자신을 우습게 볼 것인가. 설사 그가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해도 굳이 시시콜콜하게 자신의 애인 이야기까지 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이미 들을 말은 다 들은 터. 그의 입매가 여지없이 치켜 올라갔다.

“후훗. 스물아홉이나 돼서 애인도 하나 없어요? 꽤 불쌍하네요.”

직설적인 공격에 윤주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소리를 빽 질렀다.

“나가.”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그를 억지로라도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을 뻗어 그를 떠밀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밀리지 않고 되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확 끌어당겼다. 그의 얼굴이 그녀의 코앞에 다가왔다. 그린 계열 같기도 하고 시트러스 계열 같기도 한 상큼한 향이 그녀에게 훅 끼쳐왔다. 거의 나지 않는 듯 은은한 향임에도 무척이나 강하게 느껴졌다.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었다.

‘젠장. 남자 없이 3년 세월 지내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그녀를 빤히 보는 그의 눈빛에 그녀는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어 버리고 싶었다. 달아오른 얼굴이 확연히 드러나 자신의 상태를 금세라도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그녀를 보던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리고는 키가 작은 그녀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살짝 구부렸던 허리를 펴며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얼굴도 그냥 보통, 몸매도 그저 그렇고,”

자신을 위아래로 품평하듯 훑어보는 그의 표정에 강한 수치감이 들었다. 그가 동성애자이므로 성적인 의도는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래서인지 더 기분이 나빴다.

“성격은 더럽고, 예의도 없는 당신의 어디에 끌렸던 걸까요?”

살짝 붉어졌던 그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졌다. 이를 악문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보는 사람으로서는 어쩐지 그녀의 정수리에서 김이 뿜어져 나온다는 착각이 일었다.

“성격 더러운 거 제대로 겪고 싶지 않으면 말로 할 때 나가라.”

“현수와 당신이 다녔던 학교에 나도 가보고 싶어요.”

열 받아서 엄포 비슷한 말을 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들려온 그의 말에 갑자기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드는 윤주였다.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몸에서 나는 향처럼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내해 줄래요?”

“매력이 있네 없네 까댈 땐 언제고 그 따위 부탁이야?”

잠도 제대로 못 잔 상태에서 꽤나 감정이 격해졌던 덕분인지 피곤함이 몰려왔다. 화도 제대로 못 낸 것 같은데 벌써 화낼 기운도 없었다.

“금요일에 가는 걸로 하죠.”

윤주가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웬만하면 기운이 없어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 말도 안 되게 비약해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뭐란 말인가. 그녀는 쥐어짜듯 소리 질렀다.

“야, 누구 맘대로 약속을 정해? 난 너 다시 보고 싶은 생각 없거든? 그러니까 나가라고.”

“그럼 금요일에 회사 앞으로 데리러 갈게요.”

그녀가 화를 내든 말든 싹 무시한 그는 자신이 할 말만 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나섰다.

윤주는 기가 막혀서 한동안 그가 나가 버린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회사로 데리러 와? 그가 그녀가 다니는 회사를 어찌 안단 말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그냥 잊기로 했다. 그저 실없는 소리려니 생각하고.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지금은 휑한 그 공간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한바탕 꿈이라도 꾼 기분이었다. 김 형사의 전화를 받던 어제 아침부터가 꿈이면 좋으련만.

그녀는 천천히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윤주는 그의 이름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리고 금요일.

의지와는 달리 그녀는 퇴근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현수의 애인이 과연 자신을 찾아올지가 궁금해졌다.

그녀는 졸업을 한 이후 모교에 들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속에서 학교로 가는 발걸음을 막기라도 하는 듯 여러 번 기회가 있었음에도 번번이 핑계를 대며 빠지곤 했었다.

되찾으면 안 되는 무엇인가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불안감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웃을까?

그 무엇인가가 혹시 현수에 대한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강현수라는 사람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남자아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있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생각이 무색하게 연희도 현수의 애인도 두 사람이 사귀었던 사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연희의 말을 들은 그 날 꾸었던 이상한 꿈도 그녀의 확신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묘한 기시감이 들던 꿈속의 상황을 어찌 설명해야 옳을까.

그녀는 한숨을 쉬며 퇴근을 하기 위해 회사의 로비에 들어섰다.

그리고 환상처럼, 의자에 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일어서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가죠.”

인사도 없이 툭 말을 던진 그를 위아래로 죽 훑어보았다.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지난번과는 다르게 그는 무겁게 침잠돼 보였다. 무슨 마음고생이 그리 심했는지 며칠 사이에 부쩍 수척해진 것도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게 그런 의미일까?

그는 그녀의 동정 어린 눈빛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앞장서 걸었다. 그녀가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 자신감에 찬 걸음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 때문인지 본인도 확신하지 못했던 걸음을 윤주는 옮기고 있었다.

이성이란 녀석이, 잘 모르는 그에 대한 경고를 끝없이 보내고 있었지만 그녀는 깨끗이 무시해 줬다. 어차피 내린 결정에 더 이상의 방해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의 신상명세를 확인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의 면허증을 보며 이름과 주소를 연희에게 문자로 보낸 후에야 그들은 그의 차에 올라 그녀의 모교로 향할 수 있었다.

한세진. 오늘에서야 알게 된 강현수의 애인, 그의 이름이었다.

“일어나요.”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늦가을의 바람처럼 서늘한 남자의 목소리에 윤주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비친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제야 윤주는 자신이 자동차에 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던 그녀는 모교 앞에 오기까지의 상황을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름만 아는 남자의 차를 타고 오면서 잠이 들었다는 사실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여기가 맞아요?”

“어. 그래…….”

윤주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헤드라이트에 비친 학교의 정문을 응시하며 자동차에서 내렸다. 이제 3월을 겨우 며칠 앞둔 늦겨울의 밤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그녀는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던 트렌치코트를 꽉 여몄다.

세진도 그녀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현수는 아마 이 시간쯤에 하교했을 테죠?”

한참 뒤 들려온 세진의 목소리에 윤주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현수의 흔적을 모두 더듬고 싶은 그의 생각을 헤아린 것이다. 자연히 대꾸하는 목소리도 부드러워졌다.

“평소라면 이 시간이 맞아.”

“근데 학생들이 없네요.”

“봄방학 기간이잖아.”

“봄방학 때도 예비 고3들은 자율학습을 하지 않던가요?”

“우리 학교는 사형수의 만찬을 베풀지.”

윤주의 신랄하다면 신랄한 말에 세진은 ‘풋’하고 웃었다. 앞으로 고생길이 열린 고3들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휴가를 ‘사형수의 만찬’에 비유한 게 재미있게 느껴진 모양이다.

윤주는 썩소나 냉소 대신 순수하게 피어오른 세진의 웃음을 보며 잠시 멍해졌다. 섬세하고 날카로운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도니 곧 다가올 봄날의 햇살이 내려앉은 듯 보기가 좋았다.

“너 이제 보니 은근 꽃미남 스타일이네. 여자들도 많이 따랐을 텐데 왜 하필 남자를 좋아하게 됐어?”

그냥 ‘꽃미남 스타일이다.’에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윤주는 자기도 모르게 뒷말을 뱉어내고 말았다. 사실 윤주는 동성애자들이 같은 성에 끌리는 이유는 이성에서 적당한 상대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의 질문에 세진의 얼굴에 머물던 봄 햇살이 순식간에 걷혔음은 물론이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남자였던 것뿐이에요.”

“뭐? 그럼 여자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거야? 바이라는 뜻?”

머리로는 그냥 수긍하고 넘어가야지 생각했지만 의지를 배반한 윤주의 입은 또 다시 말을 쏟아냈다. 이제 세진의 얼굴은 단순히 봄 햇살이 걷힌 정도가 아니라 북풍한설이 내리고 있었다.

“혼자 버려지고 싶지 않으면 입 닥쳐요.”

그의 말에 윤주는 고분고분 입을 닥치는 수밖에 없었다. 타고 온 자동차의 주인은 세진이었기 때문이다.

벌써 11시가 넘은 시각. 본래 세진과 함께 모교에 올 생각이 없었던 윤주는 지하철 요금과 아주 적은 금액의 비상금만을 챙겨든 채 출근했었다. 그런 상태에서 세진이 차를 끌고 가버린다면 그녀는 꼼짝없이 날이 밝을 때까지 근처를 헤매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 근데 뭐 한 기지 물어도 될까요?”

버려질 것이 적이 걱정된 윤주는 안 쓰던 존대까지 해 가며 조심스레 세진에게 물었다.

“뭔데요?”

가자미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대꾸하는 세진의 반응에 찔끔한 윤주가 망설이다 말했다.

“우리 언제 서울 가?”

“당신이 아는 현수의 모든 걸 내게 말해줄 때까지.”

파르르 성을 낼 줄 알았던 윤주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사실 잘 모르겠어.”

힘없는 윤주의 말에 세진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윤주의 말이 이어졌다.

“강현수와는 2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 내가 기억하는 건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얌전한 아이였다는 것뿐. 별 달리 이야기를 나눠본 기억도, 함께 무언가를 해 본 기억도 없어.”

세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조금만 더 세게 깨물었다가는 입술이 다 터져버릴 것 같았다.

윤주는 그가 눈물을 참아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연인의 과거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를 겨우 찾았는데 알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데에서 오는 슬픔일까?

미안해졌다. 정말로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면 꼭 기억해내고 싶었다.

그 생각은 세진의 차에 오르기 전부터 하던 것이지만 그 전까지는 마음에 이는 혼란을 잠재우고 싶은 욕망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눈앞의 세진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내 친구들도, 너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현수의 마지막 행동이……”

윤주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을 인정해야 하는 듯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내게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어.”

그녀를 보는 것 자체가 괴로운 듯 고개를 돌리고 있던 세진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안심시키는 미소라고 믿고 싶었지만 세진의 미소는 본인 스스로를 위로하는 미소임을 모르지 않았다. 어쩐지 자신의 존재감이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에 그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후~ 꽤 춥네요. 일단 다시 차에 타죠.”

팔을 쓱쓱 문지르던 그가 다시 차에 올랐다. 쩝 입맛을 다신 윤주도 보조석에 올랐다.

“여기 앉아서 밤새 생각해 보라는 거지?”

“생각보다 눈치는 빠르네요.”

히터를 트는 세진을 보며 윤주가 뾰족하게 말하자 세진이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

짧은 대화가 오간 후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이 얼른 기억을 해내라는 압박임을 모를 윤주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기억을 하라고 압력을 넣어 봐야 별달리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그녀는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며 시선 둘 곳을 찾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시선을 돌려 세진을 보니 그는 운전석 의자를 뒤로 젖힌 채 약간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졸고 있었다.

그녀도 의자를 젖혀 몸을 뉘었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눈을 감았다. 기억에 집중해 보기 위함인지 아니면 반대로 잠시 동안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인지 그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끼이이이이익

급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세진은 수면을 방해하는 그 소리에 짜증스런 표정을 지으며 눈을 떴다.

헤드라이트를 깜빡이는 자동차 한 대가 멈춰 서 있었고, 고양이가 그 앞을 지나갔다. 고양이로서는 로드킬을 간신히 면한 것이었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걸음이 여유롭기만 했다. 그리고 자동차의 운전자는 욕지기를 내뱉는지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는 다시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세진은 바로 옆을 지나가는 그 차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았다.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젖혀진 의자 등받이에 기대려는데 창백한 손이 스르르 다가와 그의 팔을 꽉 잡았다. 윤주의 손이었다. 짜증을 내며 놓으라고 말하려는데 잡힌 팔을 통해 그녀의 떨림이 느껴졌다.

의아한 생각에 그는 재빨리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확연히 느껴지는 그녀의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눈엔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이봐요. 이윤주 씨. 왜 그래요?”

“자…동차…….”

그녀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세진은 그녀가 방금 전 치일 뻔한 고양이를 보고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고양이가 죽은 것도 아닌데.

“아무 일도 없어요. 고양이도 무사하고, 그 차도 이미 떠난 상태라고요.”

그가 사고가 날 뻔했던 곳을 가리켜 보이며 설명했지만 그녀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차리게 할 목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팔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줄뿐 전혀 나아지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세진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팔을 꽉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하지만 세진은 한동안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은 놓을 수가 없었다.

“으흑…으흑…”

윤주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손으로 틀어막은 입에서 연신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세진은 들썩이는 그녀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무슨 일인지 다그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녀를 울게 놔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변이 어스름히 밝아오기 시작하자 지나다니는 사람이 이상한 눈빛으로 울고 있는 윤주와 시선을 돌린 세진을 보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억지로 그녀의 울음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

윤주가 울음을 그친 건 한참 후였다. 여덟 시쯤 됐을까?

더 이상 그녀의 옆에 앉아 있기 싫어서 인지 세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차에서 내렸다.

홀로 차 안에 남겨진 윤주는 왠지 모를 한기에 몸을 움츠리며 히터의 온도를 올렸다. 그러나 온도를 올리고 코트의 깃을 여며 봐도 가슴에 스미는 한기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잠시 사라졌던 세진이 윤주 쪽의 차 문을 벌컥 열어젖힌 것은 그녀가 히터의 온도를 막 최대로 올린 직후이었다.

숨 막힐 듯 후텁지근한 공기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던 그는 윤주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그녀를 일깨웠다.

“히터 끄고 밖으로 나와요.”

그녀는 마치 인형처럼 그의 말에 따랐다.

차에서 내려 바깥 공기를 쐬니 되레 가슴 속에 감돌던 한기가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아니 누군가가 곁에 있기 때문인 걸까?

갑자기 그녀의 눈앞에 캔 커피가 흔들거렸다. 세진이 근처 편의점에서 사온 캔 커피를 흔들어댄 것이다.

“저기 앉아서 한 잔 하죠.”

윤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학교 안의 벤치로 향하는 그를 뒤따라갔다. 벤치에 앉고 나서야 세진은 그녀에게 커피를 건넸다. 커피는 차가워진 손을 녹일 정도로 따뜻했다.

“설마 캔 뚜껑까지 따 달라는 건 아니겠죠?”

세진은 그녀가 마실 생각은 하지 않고 캔을 쥐고만 있자 못마땅해서 툴툴댔다. 윤주는 힘없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조금 어렵게 캔을 따 내용물을 한 모금 쭉 들이켰다. 달콤 씁쓸한 커피의 맛이 멍해진 머리를 조금 깨워주는 것 같았다.

세진은 그녀에게 다그쳐 묻지 않았다. 그녀를 통해 고등학생이었던 현수에 대해 듣고 싶어서 그녀를 데리고 왔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다 부질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입 안에 맴도는 커피 향이 쓰게 느껴졌다.

“현수는 좋은 아이였어.”

윤주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가 벤치에서 막 일어서려던 순간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들려온 그녀의 말에, 그는 멈칫하며 이미 식어버린 캔을 꼭 감싸 쥔 채 말하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내가 현수랑 사귀기 시작한 건 고3 올라가기 직전 2월이었어. 겨울방학과 봄방학 사이 그 기간 있잖아.”

현수랑 사귄 기억이 없다고 짜증을 내던 윤주의 입에서 드디어 말이 나오고 있었다. 세진은 대꾸하지 않고 그녀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걔도 나도 피차 좋아하는 감정이 있어서 사귀기 시작한 건 아냐. 문득 내뱉은 내 말에 현수도 그냥 문득 허락했고, 마침 들이닥친 애들 때문에 기정사실이 된 거지.”

그들은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마음에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귀는 내내 서로 무덤덤한 편이었다. 그냥 조금 더 챙겨주는 친구 같은 느낌. 사실 먼저 사귀자고 말한 윤주보다 현수가 더 많이 그녀를 챙겨 주었었다.

이상하게 엮였지만 남들 사귈 때 하는 거 우리들도 해 보자는 윤주의 말에 주말에 만나서 영화도 보고, 패스트푸드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현수나 그녀나 서로 이성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늘 배려해 주고 챙겨주는 현수의 모습에 윤주는 그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많은 말을 털어놓았다.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서러웠던 이야기, 진학과 장래희망에 대한 것, 심지어 이성 문제에 대한 고민까지.

현수는 늘 진지한 태도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에게 이야기하고 나면 늘 완전히 이해받았다는 느낌에 홀가분해지곤 했다.

“그래요. 현수는 그런 사람이죠.”

세진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떠올랐다. 윤주의 감정은 우정이었고, 세진의 감정은 사랑이었겠지만 현수에게서 편안함과 위로를 느꼈다는 건 동일했다.

“종업식 전날이었어.”

윤주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진 건 다시 말을 꺼낸 그때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세진은 그녀의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날도 우리는 예비 고3이라는 이유로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했지. 비가 많이 왔던 것 같아. 우린 둘 다 우산이 없었고, 또 둘 다 마중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현수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날 바래다주겠다고 했지.”

윤주는 뭔가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는 듯 잠시 말을 끊었다. 세진은 힘든 기억이면 말할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곧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좀 춥긴 했지만 평소처럼 얘기를 나누면서 우리 집으로 걸어갔어. 비가 오는 것 빼고는 특별할 게 아무 것도 없는 날이었어.

평소답지 않았던 건 우리 아빠야.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아빠가 비가 오는 걸 보고 날 데리러 왔던 거야. 그리고 빗길에 사고가 났고, 난 눈앞에서 아버지가 죽는 걸 봤어.“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는 걸 세진은 알고 있었다.

그 이후, 충격 때문에 멍해진 윤주를 다그쳐 친척들의 연락처를 알아내 연락한 사람은 현수였다. 한동안 그녀의 곁에 머물던 그는 부랴부랴 달려온 친척들을 보고 자리를 떴을 것이다.

그렇게 봄방학이 지나고 고3이 됐을 때 윤주는 사고가 있은 날 전후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현수와 함께 한 2주간의 기억도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반으로 배정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현수는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머뭇거리곤 했던 것 같아. 그리고 난 무심하게 안녕…하고 손만 한 번 흔들어 주고 지나쳤지.”

미안함과 씁쓸함이 가득 묻어나오는 말이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친척들이 올 때가지 옆을 지켜주고 연락도 다 해 준 그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한 적이 없는 셈이 아닌가.

“친구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던가요?”

“그랬겠지. 하지만 고아가 된 친구에게 일견 사소해 보일 수 있는 그런 문제를 시시콜콜 물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고양이 때문에 기억이 난 거예요?”

현수에 대해 기억해내라고 다그치긴 했지만 그녀가 정말로 그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떼를 썼던 것뿐이다.

그런데 윤주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바탕 울고 나서는 현수에 대한 말을 털어놓았다. 그렇다는 건 아까의 고양이가 그녀의 봉인됐던 기억을 깨운 장본인이란 뜻이 아니겠는가.

“이상하지? 아까와 같은 장면을 본 게 지금이 처음도 아닌데 왜 이제야 기억이 난 것일까?”

“장소의 힘이겠죠.”

다 마셔버린 캔을 우그러뜨려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윤주는 피식 웃으며 모교를 휙 둘러보았다. 십 년 동안 잊고 살았던 열아홉 늦겨울의 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아버지를 잃은 충격에 봉인해 뒀던 기억들 속에 아름답게 추억할 것도 있음을 깨닫고 보니 나약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근데 현수의 휴대전화에 통화기록으로 왜 내 이름만 남겨져 있었던 거지?”

윤주는 처음부터 궁금했던 것을 이제야 물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세진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현수는 기계치였어요. 아마 당신에 대한 기록을 지운다는 게 통화버튼을 눌렀고, 다시 그 통화기록을 지운다는 게 반대로 당신 기록만 남겨 놨을 거예요.”

윤주는 어이가 없었다. 삭제를 누른다는 게 통화 버튼을 누른 건 그렇다고 치자, 선택 반전이라도 했던 건지 통화기록에 그녀만 남아 있는 상황은 정말 기가 막혔다. 즉 그녀가 현수의 죽음을 전해들을 수 있었던 건 단순한 실수가 겹친 결과란 뜻이 아닌가.

“걔가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데?”

“내가 알려 줬죠.”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세진을 보며 윤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그가 무슨 재주가 있어 그녀의 전화번호와 회사를 안단 말인가?

“해커거든요. 정보 캐내는 건 자신 있어요.”

기계치의 애인이 해커란다. 죽음이라는 비극이 끼어있지 않았다면 그저 썰렁한 유머라고 받아들였을 사실이었다.

“현수가 사고를 당한 건 나 때문이에요.”

“뭐?”

“그냥 당신을 한 번 만나보라는 내 말이 질투처럼 들렸던가 봐요. 사소한 일로 싸웠는데 내 기분을 풀어준다는 명목으로 당신의 흔적을 없애려 했던 것 같아요.”

방금 전까지 웃음을 짓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윤주는 왠지 모를 공감을 느끼며 조용히 말했다.

“네 탓이 아냐.”

“그래요. 당신 탓도 아니죠.”

윤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말은 지금까지 그가 그녀를 탓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눈에 담긴 건 책망도 회한도 아닌 위로였다.

그가 말하는 일이 현수의 죽음이 아니라 그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걸 깨달은 건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도 똑같은 미소를 되돌려 주었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햇살을 등진 세진의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었다.

바람을 좋아한다며 창문을 열어젖히던 현수를 보던, 그날처럼……

“너 나랑 사귈래?”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날과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싫어요.”

“뭐?”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상태라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면 무의식중에 그가 현수와 같은 대답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싫다고요.”

“너…….”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현수가 벌떡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르며 종알거렸다.

“야, 너 너무 냉정한 거 아냐? 어쩜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냐?”

“내가 현수처럼 물렁한 사람인 줄 알아요?”

“야아~ 그래도 생각 한 번 해 봐.”

“나 여자랑 사귈 마음 없어요.”

“너 바이라며?”

“그런 말 한 적 없거든요?”

“그래도…….”

그녀가 무슨 말인가를 더 이으려고 하자 그가 딱 멈춰서며 휙 뒤돌아 그녀를 보았다.

“설사 바이라고 쳐요. 그래도 나 보는 눈 높거든요?”

그녀의 위아래를 가소롭다는 눈으로 훑어본 그가 툭 말을 내뱉고는 운전석에 올랐다.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그 태도에 그녀는 그의 차를 발로 뻥 차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현수가 차창을 열며 말했다.

“지금 안 타면 버리고 갈 거예요.”

그녀는 한껏 들어 올렸던 발을 얌전하게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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