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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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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전전야

작성자
익명
작성
10.03.20 16:36
조회
2,270

(1)

칠월칠석까지는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2)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해본다. 오늘은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거라며 나조차 믿지 않는 거짓말을 되뇌며 잠에 들어본다. 하지만 그것도 허사. 오늘도 꿈을 꾼다.

숲속을 미친 듯이 달린다. 나무가 아니라 보라색 칼날로 이루어진 숲. 보라색 검광에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이, 살풍경한 숲은 무너지며 나를 덮친다. 쏟아지는 검 끝을 피해 내달리다 간신히 그 숲을 빠져나오면, 녀석이 날 기다리고 있다.

내 악몽의 원인이자 결과인 녀석은 말없이 나를 쳐다본다. 도망치려 다리를 움직여 보지만, 웬 여인이 산발한 머리를 부비며 내 발을 감싸 쥔다. 피에 절은 축축한 손바닥에서 도망가려 하지만 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기어서라도 이곳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칠 때, 차가운 목소리가 내 몸을 멈춘다.

"사형은 너무나 큰 죄를 지었소."

은자색銀紫色 검광이 나를 난도질 한다. 머리가 터져라 비명을 질러보지만, 온 몸이 조각난 상태로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다 녀석의 발이 내 머리를 향해 다가오는 장면에서야 간신히 잠에서 깬다.

(3)

잠에서 깨어나 술을 한잔 마셨다. 하지만 타는 갈증은 술로는 채워지지 않았다. 보통 이런 밤에는 여자를 찾거나 살인을 했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맘이 들지 않았다.

머리맡 찬장을 열어 비무첩比武帖을 만지작거렸다. 비무첩에는 짤막한 말이 한줄 적혀 있었다.

'칠월칠석 정오에 사형의 목을 베어 피 빚을 갚겠소.'

두렵냐고? 그래, 두렵다.

호사가好事家들이 말하는 서열 따위는 집어치워라. 비록 혈월마도血月魔刀가 무영검無影劍 보다 더 강하다고 말하지만 그건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할 이야기이다. 그리고…… 천하에 '진짜' 녀석을 아는 세 명의 사람들 중 한명이 나다.

문득 옛날이 생각난다. 부모를 잃고는 사부를 따라 일원검문一元劍門에 입문 하던 날.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녀석이 형의 손을 붙잡고 작은 눈으로 날 뚫어져라 쳐다보던 날.

다시금 둘의 모습이 떠오른다.  형인 모용광은 치밀하고 외골수적인 성격이었고, 동생인 모용수는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어린 마음에도 성질 더러운 모용광이 모용수를 애지중지 하던 것과, 그런 형과는 달리 항상 배슬배슬 웃던 모용수가 신기했었다. 닮은 점도 있었다. 쌍둥이처럼 닮은 생김새가 첫 번째였고, 사부로 부터 1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기재 소리를 듣던 나를 바보로 만든 천재성이 두 번째였다.

내가 삼년에 걸쳐 이룩한 경지를 두 형제가 따라잡는 데는 일 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녀석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 둘의 천재성은 노력으로는 넘을 수 없는 높은 장벽이었다.

그리고 다시 몇 년. 사부는 우리를 모아두고 후계자 이야기를 했다.

"너희 셋을 제자로서 가르치긴 했지만, 일원검문 최후의 절기인 무상검은 단 한명만 익힐 수 있다."

그랬다. 일원검문의 무공은 아무나 익힐 수 없었다. 인간이 만들어 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력하지만, 그 만큼 수련하기 힘든 절기였다. 그 어려운 수련을 마치기 위해서는 수련자의 천부적인 자질 못지않게 스승의 지도도 중요했다. 그리고 그 지도를 받기에 둘은 너무 많았다.

사부는 나를 먼저 쳐다보며 말했다.

"성아."

"네."

"내가 이십년의 시간을 더 들인다면, 어쩌면 너도 무상검을 익힐 수 있었을 런지도 모르겠구나."

잠시의 뜸을 들이고, 사부는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분함이 밀려왔다. 그 분함에 차례로 이어지는 열등감과 자괴감이 더해져 왠지 눈물이 흘렀다.

"광아."

"네."

"너의 자질은 어쩌면 네 동생을 능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살기가 짙어 무상검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하하……."

모용광은 사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수아야."

"네."

"네가 일원검문의 검을 잇는다."

결국 무상검을 익힐 제자로 남은건 모용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일원검문과 모용수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름만 생각해도 자괴감을 떠올리게 하는 자. 내 유년기를 다 바친 일원검문에서 나를 쫒아낸 사람.

그 뒤로 나는 강호를 돌아다니다가 악마의 병기라 불리는 혈음도血飮刀를 얻었다. 사람의 피를 빨아들여 붉게 물든다는 악마의 무기. 인성人性을 망가트린다는 그 저주받은 도를 쥐고는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처음 혈음도를 쥐었을 때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아니, 그 보다는 훨씬 전, 내 혼자 힘으로 무상검을 깨 버릴 거라고 맹세했을 때부터.

혈음도의 수련은 지독했다. 끈기 하나는 자신 있었지만, 사람을 매일 한명씩 죽여야 하는 그 잔인한 수련방법에 익숙해지기란 쉽지 않았다. 그 동안 원한에 가득찬적들을 수백 베어 넘기기도 하고, 뼛속부터 악마인 사람들을 만나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그리고 혈음도를 다 익혀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된 그날, 나는 두 가지 이름을 얻게 되었다. 혈월마도血月魔刀라는 천하제일 살인마의 이름과, 혈월칠살血月七殺이라는 일곱 악마들의 대형大兄이란 이름을.

하지만 혈음도를 다 익히고 나서는 떠오른 건 무상검을 꺾는 내 모습이 아니라 무상검에 몸이 잘리는 내 모습이었다. 사부는 허공에 검을 휘둘러 삼십 장丈 밖의 세척두께 현철玄鐵을 가루로 만들었었다. 비록 내가 익힌 혈음도도 뛰어난 도법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극성으로 익힌 혈음도로는 세척 두께의 현철을 자르지는 못한다.

녀석과 겨루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난 녀석을 이기지 못한다.

(5)

녀석의 원한을 산건,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 일이었다.

객잔에서 혼자 술을 마시다 구석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는 여인을 발견 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허리에는 검까지 찬 여자였다. 하지만 그 여자가 눈에 띈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동여맨 옷차림과 면사포로도 가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술은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취한 기분이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여인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먹던 음식도 두고 사라졌다.

몰래 여인을 따라가고, 허술한 여관 문고리를 부수는 데는 소리를 낼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내 무공이라면 주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하는 것과 반항하는 여인을 붙잡는데 일초도 걸리지 않는다.

여인은 옷을 붙잡고 울며 사정했다. 자신은 결혼한 몸이라는 둥, 좀 있으면 남편이 들어 올 거라는 둥, 하늘이 무섭지 않냐 는 등…….

남편이 있는 여자라……. 오히려 남편을 기다리는 것도 좋으리라. 살인을 한 뒤라면 더욱 흥분이 될 테니.

내가 그 말을 무시하자, 여인이 말했다.

"손……. 손대면 죽어 버릴 거예요!"

"푸하하하. 죽어 버릴 거라고? 죽여 버린다가 아니라? 이거 참 귀여운 여인네구만."

이렇게 앙탈부리는 여자도 한 둘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여자들 대부분은 내 별호別號를 듣고 나면 저항을 포기했었다.

"나는 혈월마도야. 서툰 수작 부렸다가는 남편부터 죽여 버리는 수가 있어."

눌러 잡은 손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제 포기한 건가 싶어서 살금살금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 순간이 가장 흥분되는 순간이지. 그래도 혹시나 해서 자살하지 못하도록 손을 쓰려는 순간, 여인의 입가로 피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뭐야?"

정말로 자살할 줄은 몰랐던 터라 순간 당황했다. 시체를 범하는 취미는 없었기에 착잡한 기분으로 입맛만 다셨다.

그때였다. 모용수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십년 전 보다 덩치는 커졌지만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얼굴로 녀석이 나타났다. 녀석은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그리고 내 밑에 깔려 피를 흘리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이……. 이건?"

이런 상황에서는 손발이 빠른 게 우선이 아니었다. 가장 어이없는 시점에 만난 가장 예상치 못한 사람. 이런 상황에서는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이 이긴다. 그리고 상황 파악을 먼저 한건 나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순간 수많은 게 떠올랐다. 내가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꿈속에서도 그려왔었던 무상검과의 대결. 그 모든 것이 섞여서 발악하듯 손이 움직였다. 수천, 수만의 피를 머금은 악마의 도는 저승 밑바닥의 절규와도 같은 소리를 내며 녀석의 목을 향했다.

        키이이익! 챙-!

하지만 그것은 헛수고였다. 황급히 휘두른 칼은 녀석의 목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막혔다. 완벽하다면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기습이었는데 녀석의 장난과도 같은 손짓을 뚫지 못하고는 다시 튕겨 나온 것이다. 그렇다. 녀석은 검도 뽑지 않았다. 그 순간 수없이 겪어온 생사의 경험이 위험을 알렸다.

'강하다.'

강하다는 한 글자로는 부족할 정도로 강하다. 판단을 내리는 데는 눈 깜박하는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원래 그런 의도였다는 듯 도가 튕겨 나온 힘을 이용해서 창문을 깨고 전력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도망쳤지만 결국 결과는 이 비무첩이다. 하긴 내가 사는 곳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니까.

(6)

긴 상념이 끝났다. 문뜩 정신을 차리니 무의식적으로 비무첩을 만지고 있었다. 순진하던 녀석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복수치고는 꽤나 머리 쓴 복수였다. 녀석은 나에게 공개적으로 비무比武를 신청해버렸다. 비무첩을 돌린 걸로 모자라 하나둘 무림인들에게 그 사실이 퍼지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다. 모아둔 돈도 제법 있으니 어디 멀리 도망가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천하에서 세 번째로 강하다는 혈월마도의 이름은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럼 겁쟁이가 되어버린 나에게 복수하려는 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겠지. 목숨보다 명예가 중요할리는 없지만, 대적한 자 중 살아남은 자 없다는 핏빛 이름 없이는 늙고 지친 사자가 되어 사냥될 뿐이다.

녀석은 지금쯤 어딘가에서 불안해하는 나를 상상하며 복수의 칼을 갈고 있겠지. 젠장. 앉아서 당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자만 녀석의 막강한 무공을 꺾을 길이 보이지 않는다.

'막강한 무공이라...'

그러고 보니 무공으로는 한참 모자란 녀석들에게 죽을 뻔 했던 적도 꽤 많았다. 가슴부터 등까지 이어진 이 상처도 강자와 싸울 때 생긴 것이 아니라 녹림의 무리와 싸우다 생긴 상처다.

'녀석의 성격이라면 비열한 수작 같은 건 상상도 하지 못할걸.'

계략의 기본은 정보. 하지만 지금의 녀석에 대해 아는 것은

아침 해가 뜨자마자, 정보 상인에게 천금을 쥐어 주고 녀석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다. 녀석은 무영검이라 불릴 정도로 정체가 모호하지만, 돈은 귀신도 부리는 터. 정보 상인은 다음날까지 무영검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전해준다 했다.

그제야 묘한 안도감이 든 나는 간만에 푹 잘 수 있었다.

(8)

얼굴을 찌르는 햇살에 잠에서 깼다. 이렇게 푹 잔게 얼마만인지. 기지개를 피고 주변을 둘러보니, 탁자에 한 뭉텅이의 종이가 있었다. 정보 상인에게 의뢰한 정보가 온 모양. 보통 때 같으면 머리 쓰는 일은 동생들에게 맡겼을 터이지만, 내가 질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는 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야 없지. 차근차근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무영검無影劍 모용수'

용모파기容貌疤記 없음. 그의 맨 얼굴을 아는 사람은 천기수사 뿐임.

생사비무生死比武에서 흑수당黑手黨의 삼공三公을 살해하여 유명해 졌으나, 복면을 쓰고 있어서 자주 빛 검 외에는 정체가 밝혀지지 않아 무영검이라는 별호가 생김. 이후 친우인 천기수사千技秀士의 복수를 위해 나섰음이 알려지면서 그의 이름이 밝혀짐. 하지만 여전히 사문과 사용하는 무공은 불분명.

흑수당과 원한을 맺었음에도 살아남음으로서 그 실력을 증명함. 하지만 그 동안 암습과 흉계에 약하다는 단점이 드러남. 실전경험이 많지 않은 것으로 보여 십대 고수에 들 정도는 아니라고 보임.

사람 사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듯 하며 천기수사 말고는 강호에 지인이 없는 듯하다. 다만 천기수사의 복수를 위해 흑수당 전체를 상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보면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친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혼해서 일가를 이루었다는 것 외에는 가족에 대해 알려진 것도 없음. 딱히 취미라고 할 것도 없는 듯 하며, 평소에는 처와 함께 강호를 유람한다고 함.

최근에는 …… (중략).}

{'천기수사千技秀士 조원의曹元意'

용모파기 첨부

신산神算의 일맥一脈으로 알려짐. 기관장치機關裝置와 술법術法에 능하며 점술, 시, 서화書畵등 잡기雜技에도 능하다고 한다.

온갖 기관장치과 기문둔갑奇門遁甲으로 가득 찬 천기장天機藏에서 살고 있음. 천기수사나 그 총관이 아니고서야 천기장을 드나드는 건 불가능 하다고 하며, 여태껏 천기장에 침입한자는 시체조차 남지 않고 모두 죽었다고 함.

흑수당에서 천공天公이러 불리는 수라마검修羅魔劒에게 부모를 잃어버림. 복수를 하지 못해 한스러워 했으나 최근에 무영검의 도움을 받아 복수를 완수함. 그 이후로는 시와 서화로 유명한 부모님의 작품을 모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 (중략)}

{'흑수당주黑手黨主 흑연혈장黑煙血掌 이정일李丁一'

용모파기 첨부

…… (전략) 최근에 무영검에게 천天·지地·인人 삼공을 잃고 이를 갈고 찾고 있다고 함. 하지만 무영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고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아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 못하고 있음. 그래서 몇 개의 조직을 강호로 내 보내며 무영검을 찾으면 바로 죽일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무영검과 마주한 쪽은 모두 죽었고 그렇지 않은 쪽은 아무 무림인에게나 시비를 걸어 강호에서 평판이 매우 나빠진 상태.

지금은 자력으로 무영검을 찾는 건 포기하고, 무영검의 위치나 얼굴에 대한 정보에 현상금을 걸어두었다. …… (후략)}

정보 상인에게서 온 정보를 읽고 또 읽었다. 일부는 잘못되었고 일부는 턱없이 모자랐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 중에 저기 없는 건 두 가지 정도 있다.

첫째. 녀석은 나에게 질 것이란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내가 녀석에게 이길 것이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이다. 이 비무는 녀석에게 단순한 복수의 자리이지 생사를 건 비무는 아닐 것이다.

둘째. 녀석이 천기수사를 생각하는 마음은 보통 이상일 것이다. 낯가림이 심한데도 불구하고 사람을 사귀고, 그 유순한 성격에 살인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필시 가족처럼 생각하는 상대일 것이다. 마치 자신의 아내와 같은 정도로 소중한 사람일 것이다.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또 보았다. 어느 덧 해가 지고 글이 가물가물 해졌다. 마지막 노을빛이 피처럼 방을 비출 때 쯤, 피 비린내 물씬 풍기는 한 가지 더러운 음모가 생각났다.

        한 사내가,

        생사를 겨루는 비무가 있는 전날,

        밤을 새워 천릿길을 달리고,

        세상에서 단 한 번도 뚫린 적 없는 진을 통과한 다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적과 생사를 겨루는 결전을 벌이고,

        비무 시간에 맞추어 근육의 힘을 빠지게 하는 독에 걸린다면,

        그자가 설령 검의 신이라고 해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7)

흑수당주 친전親傳

당신이 무영검을 죽이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있소. 실은 나도 무영검에게 원한이 있지만 그를 이길 무공을 가지고 있지 않아 흑수당주께서 대신 복수를 해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글을 남기오.

흑수당주께서 아직까지 녀석을 죽이지 못하는 것은 녀석을 찾을 방도가 없다고 해서 . 사실 나도 녀석의 위치는 모르지만 거꾸로 오게 할 방도가 있소.

무영검은 천기수사의 사주를 받아 흑수당에 대적하고 있다고 하오. 하지만 비겁하게 천기장 안에 숨어있는 천기수사를 잡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닌 터. 다만 천기수사가 제발로 천기장에서 나와 안으로 모시게 할 방안이 있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천기수사를 인질로 녀석을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오.

천기수사를 끌어들일 방법은 하나의 금척金尺이오. 천기수사 아버지의 신물信物과도 같은 물건인데, 그는 원래 부모의 물건을 모으길 좋아하니 이 물건이면 천기장에 잠입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오.

금으로 된 자는 막내의 장보고藏寶庫에서 가져왔다. 수라마군의 집에서 훔쳐냈다고 자랑하던게 기억나서 가져왔는데, 뭐 훔친 다음에는 동굴 안에 던져두는 녀석이니 설마 없어진걸 알아차리진 못하겠지.

무영검 친전

천기장에서 식객食客으로 있는 경천검驚天劍이라 하오. 흑수당이 당신을 잡기 위해 천기수사를 인질로 삼으려 하오. 물론 천기수사는 천기장에 있어 천군만마千軍萬馬의 보호를 받는 것과 같소.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오. 이번에 흑수당에서는 전문가를 초빙했소. 귀곡鬼谷의 후예이자, 기관과 기문둔갑이라면 천하제일이라는 사천뇌邪千腦 문빙文聘을 말이오.

천기수사가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몰래 밖으로 내보내기는 했으나, 흑수당에게 들통나 엄중한 상처를 입어 직접 나설 수 없게 되었소. 서두르지 않으면 천기수사와 그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서두르셔야 할 것이오.

'문빙같은 소리하고 있네.'

문빙은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라 흑수당주같은 악당에게 협력할 인물이 아니다. 물론 천기장 정도라면 그의 호기심을 자극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렇기에 이 거짓말이 더욱 효과가 있는 것이다.

글을 잘 확인한 후, 만지기만 해도 중독되는 독을 그 위에 얇게 발랐다. '만기지만 해도 중독되지만, 삼일 뒤에 효과가 나타나는 독' 이란 내가 만들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하지만 이 얼토당토않은 독을 만들었다고 자랑하던 셋째에게서 협박하다시피 해서 뺏어 오는 것은 쉽지. 독은 손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레 바른 다음 종이를 잘 접어 숨겨두었다.

하지만 편지를 쓴다고 다가 아니다. 흑수당이 무영검을 죽이고 싶어도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꼭 무공때문은 아니지 않는가? 편지를 적어도 전달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랴. 하지만 나는 천하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다. 이미 솜씨 좋은 화공畵工을 불러서 용모파기를 완성하였으니, 이것이 있으면 사람 찾는 건 일도 아니다.

이제 한 가지만 확인하면 확실해 지는데, 언제쯤 연락이 올까?

"혈월마도님, 심부름 갔던 자가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부하가 보내온 작은 쪽지를 펴서 읽었다.

보내주신 용모파기의 사람에게 분명히 종이를 전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글을 확인하더니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습니다.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한 사내가,

        생사를 겨루는 비무가 있는 전날,

        밤을 새워 천릿길을 달리고,

        세상에서 단 한 번도 뚫린 적 없는 진을 통과한 다음,

        생사를 겨루는 결전을 벌이고,

        비무 시간에 맞추어 근육의 힘을 빠지게 하는 독에 걸린다면,

        설령 그자가 검의 신이라도 이길 수 있다.

(8)

드디어 비무 당일이었다.

녀석이 오지 못 할리는 없다. 오지 않는다면 마음은 제일 편하겠지만 녀석의 무공 수위를 생각 했을 때 그건 무리겠지.

'어쩌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죽여 버리는 것도 나을지 모르고.'

아무리 걱정해 봤자 결과가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묘한 흥분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 이런 긴장감을 느낀 지 얼마나 되었지?

한참을 방에서 서성이다,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비무장소에 나갔다. 조금 기다리자 비무장소로 사람들이 한 두명씩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무시간인 정오가 되도록 모용수는 오지 않았다.

"무영검은 비무를 신청할 용기는 있었지만 감히 날 대적할 용기는 없던 모양이군."

사람들에게서 비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죽은 건가? 내가 녀석을 너무 과대평가 했던 걸까?'

조금씩 마음이 놓이기 시작한다. 그래. 녀석은 오지 못한 거다. 분명 일원검문의 무공은 혈음도보다 강하다. 하지만 녀석이 무공을 다 익히지 못했을 수도 있고 임기응변이 부족해서 계략에 걸린 것일 수도 있지. 강호에서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가 승자인 곳. 녀석은 강했지만 승자는 아니었다.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불안에 떨었다니 한심하군.'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더욱 마음이 놓인다.

"혹시나 녀석이 올지도 모르니 반 시진은 기다리겠소. 그래봤자 무서워서 검도 들지 못 할 테지만"

아까처럼 사람들이 웃기를 기대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이 썰물처럼 갈라졌다.

꿈틀거리는 인파사이로 녀석이 나타났다. 녀석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어떤 무공을 익히면 사람의 분위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그 무공을 닮아간다고 한다. 분명 일원검문의 무공은 부드러움에 근거를 두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저 살기는 무어란 말인가? 가만히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을 겁에 질려 물러나게 만드는 저 강한 기운은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오랜만이군."

애써 태연한척 대꾸하려 했지만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는다. 함정에 걸려 죽을 것이라 예상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체력은 소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녀석의 무공은 내 예상을 훨씬 능가한단 말인가?

"한 십년쯤 됐군."

'십년? 십년이라고?'

의혹이 점점 커졌다. 녀석은 지친 기색도, 독에 중독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독이 퍼질 시간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그것만으로는 설명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녀석의 옷차림에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남색 옷. 제대로 된 무인武人이라면 절대 끼지 않을, 번들거리는 녹색장갑.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허리춤! 검은? 검은 어디 갔지?

녀석이 품에서 종잇조각을 던졌다. 종이라면 당연히 하늘하늘 떨어져 내려야 한다는 법칙을 무시하고 나비처럼 천천히 허공을 날아오는 종이는 분명 녀석의 고강한 무공을 나타내는 증거. 하지만 받아든 종이에는 그런 시시한 장면보다 훨씬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내를 해친 건 사형이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해도 차마 사형을 베지 못해 내린 결정이오니,

형님께서도 용서하옵소서.

"이……. 이건 뭐야?"

"푸하하하! 내 동생은 너처럼 독을 묻히지도 않았는데, 설마 그동안 글도 읽지 못하는 바보가 된 거냐?"

'동생? 동생이라고? 이게 무슨……!'

그리고 순간 날아오는 금색 비도飛刀. 평소 같으면 쉽게 피했을 터지만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에 간신히 심장을 피하는데 그쳤다.

비도는 어께를 맞추고는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그리고 한 호흡. 온몸의 혈관이 요동치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다.

"끄아아아악!! 이건 일원검문의 무공이 아니잖아!"

당하자마자 몸이 녹아내리는 독이란 건 들어 본적도 없다. 그리고 일원검문주가 독을 사용한다는 말은 더더욱 들은 적이 없다.

"당연하잖아, 엽진성. 나는 파문당하고 독을 배웠으니까."

"너……. 너는, 모용수가 아니……."

"당연하지. 내가 내 동생처럼 남을 구한답시고 그 멀리까지 넙죽 사라질 줄 알았냐?"

내 모든 음모의 전제는 녀석이 모용수라는데 있었다. 자신이 독이 당한지도 알지 못한 채 친구의 어려움을 내버리지 않는 그런 모용수라는 전제가. 하지만……. 하지만 녀석이 모용수가 아니라면? 자신의 동생 말고는 세상에 소중한 것 하나 없는 모용광이라면?

심장박동이 거세진다. 온몸의 혈관이 쿵쿵 뛰어오르는데, 그때마다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고통에 서 있을 수조차 없다. 그리고……. 서서히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린다.

"자기 아내 죽었다고 자살한 동생 대신 나라도 복수하는 수밖에!"


Comment ' 5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11:25
    No. 1

    헐! 반전! 전혀 예상치 못했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12:54
    No. 2

    잘 보았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6 18:22
    No. 3

    재밌기는 했는데 뭔가 약간 부족한 느김이 드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9 19:41
    No. 4

    착하게 좀 살지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1 02:38
    No. 5

    잘 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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