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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찌르는 창.

작성자
익명
작성
10.03.20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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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4

인류를 찌르는 창.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네가 무시하는 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

“그건 무리야.”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다면 대책은 하나뿐이지.”

“뭐지?”

“더 강한 힘을 획득하는 것.”

“하지만 그 힘이라는 건 결국 세계를 더럽히고 감정을 메마르게 하는 것이지 않나?”

“그건 그래. 그렇기 때문에 너에게만 가르쳐줄 생각이야.”

그는 웃으며 말했다.

“너는 이 폭주하는 이들의 최후에 서 있는 창이 되어줘.”

“창?”

“응. 최후의 양심이 되어줘.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는 웃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검은 용왕 헤지발카드는 세계와 싸우고 있다.

지성의 문명이 자연을 마침내 제압하고 천 년, 문화혁명 혹자는 과학혁명, 산업혁명이라고 일컫는 과학의 발전과 함께 지성체는 마법과 정령, 그리고 전투문화를 잃어버리는 대신 과학을 획득했다. 그들은 이윽고 인류라는 이름으로 통합했고, 세계에 퍼져 있던 수많은 지성체들을 격살했다.

그리고 세계의 패자가 된 이들 인류는 이루말할 수 없이 오래 전부터 세계의 주인임을 자처하고 있던 드래곤과 싸우고 있다.

그 강력한 드래곤도 결국 과학의 먹이가 되었다.

사라져갔다.

드래곤의 사체는 과학의 힘으로 산산조각 찢겨지고 해부되었으며, 고가에 팔려나갔다.

인류 최강의 제국 헤즈바인더의 성도에는 200m의 덩치에 이르는 백룡왕의 시체가 딱딱하게 굳은 채 복구되어 있었다.

이제 인류에겐 어떤 저항도 없었다.

그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최후의 드래곤이라는 검은 용왕을 처단하러 향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학에서조차 그의 이름이 쓰여 있었지만 인류는 과학의 힘을 믿고 있었다.

저 위대한 백룡왕조차도 그들의 화학병기에 내장이 다 녹아버린 채 죽고 말았다.

검은 용왕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검은 어둠.

그러나 어둠조차 정복해버린 인류는 고글을 쓰고서 검은 용왕이 사는 레어를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 것은.

200m의 체격에 이르는 강철의 과물.

그리고 그곳에 있는 검은 용왕은 200m에 이르는, 그야말로 자연의 선택을 완전히 무시하는 압도적인 체격을 떨쳤다.

한 순간 위압감을 느꼈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드래곤의 강력한 육체를 완전히 감싸고 있는 은빛의 갑옷이었다.

그리고 그 날개 사이사이마다 듣도 보도 못했던 미사일이 매달려 있었으며, 검은 용왕의 얼굴은 특유의 검은 비늘 대신 그들의 적외선 고글의 빛을 반사하는 백은의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패퇴.

1차 원정대의 승리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던 이들은 그 길로 드래곤에 대한 편건을 조금 접고 정식으로 군대를 꾸렸다. 그 군대는 산을 올라가기도 전에 토양의 재료가 되었는데, 그것은 검은 용왕, 아니 강철의 용왕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검은 용왕 헤지발카드는 제트 엔진을 날개와 날개를 잇는 등에 달고 있었고 그 추진력으로 수십 톤에 이르는 덩치를 움직였다. 물론 공중에서 궤도를 바꾸고 하는 것은 날개와 마법의 힘이겠지만, 일반적인 드래곤의 비행을 떠올린 이들에겐 그야말로 재앙 그 자체였다.

벼락과도 같은 속도로 날아든 헤지발카드는 즉시 산을 토했다.

2천에 이르는 군대가 그 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헤지발카드는 군대의 전멸에 광소를 터뜨리거나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대신 인류의 수도로 향했다.

“스텔스입니다. 아직 완성조차 하지 못했던 기술을-!”

“200m의 덩치이면서 레이더 색적에 걸리지 않다니 이 무슨!”

밤의 정령을 두르고 있는 갑옷에 덧씌워 그림자 속에 물든 것처럼 보이는 헤지발카드는 아무런 위험 없이 수도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도를 즉시 제거하지는 못했다. 수도의 하늘과 땅은 그야말로 강철의 병기로 덮어 씌워져 있던 것이다.

헤지발카드는 경고했다.

순수한 드래곤의 언어.

이제는 드래곤도 인류가 퇴치해야할 대상에 지나지 않기에 그의 경고를 이해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개전이다 싶어서 포격을 퍼부은 이들이 대다수.

헤지발카드는 발사코드를 입력했다. 헤지발카드는 다시 날아서 퇴각했고, 뭣 모르는 인류는 드래곤이 꼴사납게 패퇴하는 것을 보고서 환호를 내질렀다. 몇몇 성급한 이들은 벌써부터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샴페인 거품이 채 바닥에 떨어지기 전, 1만 3천 년 전 개발했던 핵병기가 수도에 떨어졌다.

수도는 사라졌고,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은 내일이 지옥이라는 듯 절망하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그것도 일주일 후 완전히 사라졌다.

핵방사능에 노출된 몸은 새로운 세포를 탄생시킬 수 없기 때문에 일주일간은 꽤나 고통스러워 하던 이들은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리고 헤지발카드는 세계의 적이 되었다.

인류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제국 수도를 날려버린 최악의 마룡으로서.

모든 인류가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헤지발카드는 맞서서 싸웠다.

놀라운 사실이지만, 헤지발카드는 과학을 알고 있었다.

예상하고 있었다.

수도를 날려버린 것이 핵미사일이라는 것은 조금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서라도 헤지발카드가 하는 일은 충분히 과학기술을 이해하고 있는 이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는 결코 숲과 논 따위를 태우지 않았다. 인류를 겁먹게 만들지 않고, 스텔스의 힘을 빌리고 인비저빌리티(투명화)의 마법을 사용한 채로 최단시간 연구소를 폭격했고 순수업체를 와해시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미사일을 쏟아붓고는 인류가 사용하는 미사일등을 훔쳐서 달아나곤 했다. 달아난 후 다른 곳에서 사용하여 인류를 재앙에 빠트리고 있었다.

헤지발카드의 습격은 그야말로 누구 하나 끝장날 때까지라는 인상은 없었다.

단지.

하지만.

그러나.

헤지발카드의 습격은 날이 갈수록 사나워졌다. 그리고 정확해졌다.

헤지발카드는 과학기술뿐만이 아니라 과거 마법의 주인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엄청난 마법을 사용하며 정령을 부리곤 했다. 그는 인류의 모든 추적수단을 무효화하며 도주했고 충분한 휴식을 취했을 무렵엔 다시 뛰쳐나와 인류의 요충지를 파괴했다.

계획적.

그리고 살인적인 태도에 인류는 이 개체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드라코(Draco, 두려움; 공포)의 어원을 따른 드래곤이라는 이름을 실제로 실감하게 되었다.

거기서 살아보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기류에 동화되어 자신은 자유롭게 나는 반면 추격해온 전투기는 삽시간에 와해되어 버리고, 무분별한 난개발로 인해 사막이 되어버린 땅에서 허리케인을 불러 일으켜 탱크며 무엇이든 송두리째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그의 약은 수.

인류는 이의 전투방식을 열거하며 서서히 대화를 필요로 했다.

그는 그 어떤 인류보다도 과학기술과의 전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루 종일 비를 내려서 인공위성의 추적도 의미없게 만드는 등, 엄청난 수단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하나.

그리고 그가 쓰러뜨려야 할 인류는 80억에 가까웠다.

1년 가까이가 지났다.

인류는 헤지발카드와의 전쟁을 일상처럼 여기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것을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지도부가 한 순간에 죽어버려 나라의 기능이 마비되어 버렸지만 즉각 그 자리를 차지한 인간이 있고, 사회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었으므로 1억 정도 죽는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헤지발카드가 나타났다는 신호로 사이렌이 울리면 방공호에 숨어들어가고 그가 습격하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군대와의 전투를 실시간으로 구경하다가 헤지발카드가 도주하면 그때 비로소 방공호 밖으로 나와 투덜거리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헤지발카드는 서서히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힘겨운 투쟁.

제 아무리 강력한 이라고 해도, 그 혼자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인류에 의해 쫓기고 반격하길 1년 째.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는다면 모르겠지만, 그저 재앙이니 자연현상 따위로 판단해버리고 군대에게 맡겨버릴지도 몰라, 너의 행위를.”

“그렇군. 그렇다면 놈들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다면 어떡해야 하지?”

“그렇다면 그 마음을 다진 시스템을 바꿀 수밖에 없지.”

“무슨 소리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인류는 하나가 돼. 하지만 개인이 되기도 해. 외적이 나타났을 때 공공의 적이라며 침공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기본적으로 욕구가 충족이 된다면, 즉 먹고 살수만 있는 기반만 있다면 너를 습격할 이들은 외적과 싸울 집단뿐이게 돼. 그 집단을 홀로 쓰러뜨릴 수 없으니, 시스템을 파고 들어야 할 거야.”

“시스템을 바꾼다?”

“응.”

그는 웃었다.

웃고 있었지만 우는 것 같았기에 뭐라 격려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억눌러 참았다.

“방법은 뭐냐면 말이지.”

열흘에 걸쳐 주문을 외웠다.

인류의 땅인 도시가 세워지지 않을 메마른 고원, 사막, 외딴 곳. 그런 곳에 얼굴 모양의 석상이라던가 비석 따위를 세워두고 풀을 밟고 땅을 파헤쳐 이상한 고리를 무수히 그렸다. 그것이 미티어(유성 소환)라는 것을 아는 이는 최소한 이 지구상에는 없을 것이다.

그때에도 잊혀졌다고 생각한 마법이었으니까.

지금 기억하고 있는 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인류는 옛 선조, 혹은 우주에서 온 외계인들이 남겨놓은 것이라며 관광지화 시키고 보존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미티어의 마법진이라는 걸 아는 이들은 없다.

열흘 후, 지구에 직경 1.7km의 유성이 떨어졌다.

이 유성은 마법진과 조형물 따위를 만들면서 일찌감히 우주로 쏴올린 물건이었다. 요정의 가호를 받아 투명화 된 유성은 누구에게도 막히지 않고 지구로 수직낙하했다.

목표는 감히 헤지발카드도 쳐들어가지 못할 만큼 완벽한 방어를 유지하고 있던 군단 사령부.

군대가 쓸려나갔다.

가차없이 쓸려나갔다.

헤지발카드와 싸우느라 너무 많은 물자를 소비하였기에, 차마 막을 수 없었던 미티어에 의해 행성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리고 헤지발카드가 다시 나타났다. 복구와 수선, 공포와 공황 따위로 정신이 없던 인류의 앞에 나타난 헤지발카드는 공포였다.

그는 이제 얼이 빠진 군대와 맞서 싸우는 대신 인류의 도시를 와해했다.

군대는 일반 세계와 다르다.

상식이 다르다.

적을 상정하고 싸우는 이 집단은, 상하관계가 명확하며 계급하에 활동하는 사회다. 이제 인류 이외의 다른 종 모두가 노예 이상이 아니었지만, 군대만큼은 같은 인류 사이에서도 급을 나누어 명령을 내리고 받는 그런 곳이었던 것이다.

그들 사령부가 쓸려나가고 온갖 군사정보가 사라져버린 공터에.

헤지발카드가 나타났다.

헤지발카드는 이제 빌기 시작하며 겁을 먹고 나오지도 못하고 있는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 년이 넘는 동안의 활동에 몹시 피로했지만 강철로 만들어진 갑옷은 피로를 감추었다.

드워프가 단련했고 엘프가 축복했고 페어리가 정령을 심었고 그대곤의 숨결로 벼려진 갑옷 속에서, 그는 다시 경고했다.

경고는 누구에게도 번역되는 일이 없었다.

인류의 정보매체에 암운이 드리운 날도 그때부터였었을 것이다.

미래가 없다, 인류의 절망, 악몽의 왕 등등. 수많은 명칭이 그에게 붙었고 그의 활공만으로 인류는 암운을 드리우며 절망했다. 물자는 말라가고 음식들이 귀해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번성한 도시에서 가족의 손을 붙잡고 떠나려 했고 약탈과 방화가 잇따랐다.

일 년이 지났다.

피폐해진 인류의 제국에는 군대가 없었다.

군대는 적을 빠르게 격퇴하고 노력을 통해서 잃은 물자를 획득해야만 돌아가는 기관이다. 예비된 전쟁을 일찍 막고 일어날 참사를 대비해야 하는 곳이다. 그 이외에는 물자를 소모하기만 하는 그런 곳.

비효율의 극한이지만 1%의 상황을 위해 존재하는 이 기관이 일찌감치 헤지발카드를 쓰러뜨리지 못한 순간부터 이런 상황은 예견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군대가 무너진 후 상황은 심각해졌다.

물자가 모이고 돈이 굴러가는 도시를 보호하지 못하자, 헤지발카드가 그곳을 쓸어버린 것이다. 일 년이 넘도록 날개 한 번 접는 일 없이 헤지발카드는 도시를 와해했고 온갖 귀한 보석들을 삼켰다.

몇몇 식자들은 말했다.

“이제는 농촌이겠지.”

1년 동안 군대와 싸우고, 다음 1년을 도시를 무너뜨리며 싸웠던 헤지발카드는 그들의 경고를 듣기라도 하듯 씨익 웃으며 두 날개를 펼쳤다.

논과 밭, 포도농장과 목장 등이 녹아내렸다.

인류의 절망.

인류의 최후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뒤늦게야 군대에게 힘을 지원하여 그를 쓰러뜨려야 했다며 자책했다. 하지만 군대는 지휘부가 날아간 이후 다들 파벌을 이뤄 파벌끼리의 전투로 힘을 소모하고 있었고, 그들을 고용할 수 있는 도시는 산산조각 부서졌다. 도시를 버리고 떠났던 이들은 논과 밭에 뿌려진 강력한 산에 녹작물이 녹아내리는 걸 망연히 지켜보아야 했다.

인류의 최후는 가깝다.

인류는 인류로서의 존엄을 잃어가고 있었다.

자식을 잡아먹기 위해 낳는 건, 당연한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그렇게 많은 인류.

산과 평야를 뛰며 짐승을 잡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인류는 서서히 그들이 이룬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 인류는 끝이라고 할 수 있어.”

“과연 그렇군.”

“하지만 말이야. 인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그런가?”

“그들은 가진 시스템을 잃고 지난 날을 후회하게 되면 싸우게 될 거야. 인류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던 기술과 본능을 이용해서. 과학을 너를 잡는데 쓰려고 할 거야.”

“그렇군, 그때부터가 진짜인가?”

그는 웃었다.

“인류는, 그때부터 정식으로 인류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

드래곤을 잡기 위한 원정대가 만들어졌다.

동굴에서, 지하에서, 쉘터에서, 약한 이들은 드래곤의 눈을 피해서 살아가며 건장한 이들은 무기를 벼렸다. 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총을 쥐고 옛 과거를 뒤적이고 쓰러뜨리기 위해 전투기술을 익혔다.

여자는 아이를 키우며 옷을 기워입고 농작물을 키웠다.

아이들은 더 이상 과자를 찾지 않고 인형과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았다.

최초의 반격은 실로 무모했다.

하지만 그 반격이 기화되었을 것이다. 인류는 헤지발카드를 쓰러뜨리기 위해 단합했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거의 씨도 안 남아있는 엘프나 드워프 등에게까지도 의견을 구했다.

신화 시대의 전설이 재현되었다.

한 차례, 두 차례, 세 차례, 수십 차례.

그들의 저항은 군대와 맞붙을 때보다 미약했다. 하지만 직접 상대하는 헤지발카드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팔이 뜯겨 나가도 달려들면서 고함을 지르는 자.

수류탄을 주렁주렁 매달고 그의 다리를 붙잡고 폭사하는 자.

숨겨온 칼로 비늘 위에 덮여있는 강철의 갑옷을 하나 떼어내고 만족한 얼굴로 죽어가는 자.

헤지발카드는 쉴 수 없었다.

기술은 분명 군대보다도 못했는데, 폐가 터져라 달리며 그의 위치를 추적하는 이들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그가 조금 쉴라치면 저항군이 밀려왔다. 그들은 기쁜 낯으로 죽어갔고, 헤지발카드는 점점 높은 곳으로, 점점 낮은 곳으로 도주해야 했다.

“인류라는 건 생각보다 굉장하다구?”

“쓸데없이 진지하기만 한 가정이었다만 흥미진진하긴 했다.”

“그렇게 말하다가 헤지발카드, 네가 죽을 수도 있어.”

“내가? 설마.”

“설마가 드래곤도 잡을 걸?”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죽지는 마. 너는 죽으면 안 돼. 너는 그야말로 최후의 창이니까.”

“안 죽는다.”

“죽을지도 모른다니까.”

“웃기는 소리.”

헤지발카드는 실로 오래전의 추억을 떠올렸다.

드래곤이 당시에 산맥 하나에 만족하고 그들을 믿고 따르는 코볼드나 리저드맨, 드래고뉴트 부족과 있었을 때가 떠올랐다.

드래곤은 과거에는 분명 말도 못할 정도로 강대했던 상대였다. 하지만 드래곤은 왕국을 점령하거나 지배하지 못했다. 인류의 결사적인 항전이 있었으니까. 수백, 수천을 죽인다 해도 인류는 물러나지 않고 맞서 싸웠던 것이다.

그러다 죽기도 하고 도주하기도 했다.

그때의 인류와 지금의 인류가 다른 점이 있을까?

“인류라는 건 굉장하군.”

그는 이걸 예상하고 있었을까?

옛 향수마저 느끼게 하는 이 모습에 헤지발카드는 저도 모르게 푸우, 하고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말했다.

죽지 말라고.

죽으면 다시 인류는 과거의 시스템을 부활시킬 거라고.

“그래서는 안 되지.”

그의 유언이었다.

그의 부탁이었다.

이 기나긴 드래곤의 모든 생명을 걸머쥐었던 이와의 약속이었다.

“나는 헤지발카드. 검은 용왕이다.”

헤지발카드가 날개를 펼치고 올랐다.

60년이 지났다.

과거 번성했던 과학기술은 쇠락해가고 있었고 인류는 극도로 수가 감소했다. 한 세계가 바뀌어버린 시간이 흐른 후, 많은 이들이 지하철과 기차 따위를 알지 못했고 총을 어떻게 만드는지 몰랐다. 지식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죽어가고 많은 기술이 소진되면서 더 이상 인류는 과학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어려웠다.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기술을 많이 잃어버리고, 대신 드래곤과 싸우기 위한 병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노예처럼 부리고 있던 다른 종족들의 숫자가 늘어남과 동시에 그들끼리 꽤나 손을 섞으며 사회를 구성해갔다.

헤지발카드의 등장은 점점 줄어들었다.

결국 그들의 할아버지, 아버지는 헤지발카드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을 이끌던 이가 갑옷이 떨어져 나간 곳에 검을 박아넣어 큰 상처를 입혔고, 그의 활동을 조금이나마 줄였다.

삶이 팍팍해져갔지만, 웃음이 많아지고 있었다.

미래의 직업을 위한 지식 대신 살아남기 위한 기술과 과거에 대한 지식이 많아졌다.

헤지발카드는 한손을 부목으로 감싸고 길을 걷고 있었다.

헤지발카드의 등장이 20년째 없었던 곳에는 마을이 생겼다.

콘크리트와 시멘트를 쓰기는 하지만 그것을 헛되이 이용하지 않고 집을 꾸미고 강의 길을 만드는데만 쓰이는 건축기술은 논과 밭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벼를 베고 있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하나 같이 구슬땀을 흘리며 내일 먹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남성 어른들은 기술을 복원시키려 애쓰고, 일부는 무기를 휘둘러대면서 단련을 잊지 않았다.

여관을 찾았다.

손님이 올 때 맞이하는 곳.

그곳에 헤지발카드가 찾았을 때 주인과 주인의 눈을 조금 닮은 딸이 인사하며 맞았다.

“저런, 팔을 다치셨네요.”

“정확히는 어깨지만.”

헤지발카드의 말에 딸이자 점원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언젠가 과학기술이 발전했을 때 손님을 걱정하거나 그러는 경우가 있었을까.

“며칠 머물고 싶은데 방에 여유가 있을까?”

“푹 쉬고 싶은 모양이군요? 확실히, 농번기이긴 하지만 그때마다 새참도 가져다 먹고 잔치도 있고 그래서 즐거울 거예요.”

“이런 광경은 오랜만이거든.”

“저런. 도시에서 오셨나 보군요.”

딸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 시대에는 도시주의자가 있다.

옛 과거 기술에 매달리고 복원시키려 애쓰며 농촌으로 돌아간 이들에게 후회할 거라며 떠드는 이들. 이제는 잃어버린 기술에 매달리며, 헤지발카드를 증오하는 이들. 그들은 옛 도시에서 부유한 이들이었고, 허영심이 배속까지 들어찬 이들이었다. 이제는 쓸모도 없는 지폐 돈을 산더미같이 소유하고 농촌으로 돌아간 이들을 약자라느니 패배자라며 비웃고 있다.

“근래 도시를 좀 거쳤거든.”

“어머, 고향은 어쩌고요?”

헤지발카드가 멀쩡한 손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주인과 딸은 아, 탄식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 세상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생물은 새 말고는 딱 하나 밖에 없다.

헤지발카드.

인류를 찌르는 창.

“걱정말고 푹 쉬세요. 여기는 ‘그것’이 20년 동안 쳐들어온 적이 없는 곳이거든요.”

“그래?”

“그래서 인심이 무척 좋고, 사람들도 다들 착해요.”

“그렇군. 그럼 이곳의 특산물을 부탁할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오븐에 빵을 굽고 마카로니 치즈를 올린다. 샐러드는 유전자개조로 인해 만들어진 풍성한 야채. 먼 과거와 60년 전의 과거가 혼재되어버린 양상이다. 헤지발카드에게 있어선 몹시 낯설었다.

이 세계는 전기를 쓰고 있다.

그러면서도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인류가 중세라 불렀던 시대의 그것과 비슷하다. 또 나온건 미묘하게 현대스럽지만.

“맛있군.”

따뜻한 차는 생강차. 호밀빵과는 별로 안 어울리는 것 같긴 했지만, 도시들이 쓸려나가면서 민족들이 합쳐지고 번성하면서 다른 민족들의 먹거리가 퓨전되어 버린 것이다.

“...따뜻해.”

헤지발카드의 말에 딸과 주인은 빙그레 웃었다.

“이런 시대에 이런 맛을 느낄 줄은 몰랐어. 그에게 감사해야할지도 모르겠군.”

헤지발카드는 단순히 그를 지칭했을 뿐이지만 딸과 주인은 ‘그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확실히 그런 말도 있지요.”

“그런 말?”

“그것이 난리를 부린 덕분에 브레이크 없이 탐욕을 향해 달리던 인류는 한 차례 쉴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죠. 물론 아버지, 그 아버지의 죽음은 용서할 수 없지만, 과거를 검색해보면 그건 인간이 살아가는 시대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가?”

“물론이죠. 정말 끔찍했다고 해요. 돈이 세상의 모든 가치였고 도로 하나가 더 깔린 땅 한 덩이를 위해서 사람을 몇이나 죽이고 그랬다더라고요. 어머, 죽인다니 너무 심한 말을 했네.”

“괜찮아.”

헤지발카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헤지발카드도 지쳐서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조금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인류는 이제 과거의 추악했던 기억을 뉘우치고 다시 시작하려하고 있으니까요. 이웃인 다른 종족의 친구들과 함께.”

“그래? 역시 그의 생각이 맞았군.”

“? 그라는 이는 그것을 말한 이가 아니었나요?”

“아니, 내 친구가 있었지. 이런 사태를 예견한 친구가.”

먼 미래에서 왔다고 했던 그.

과학기술로 해츨링에 불과했다지만 그때도 강력했던 헤지발카드를 제압하고 미래를 이야기해주던 이. 미래를 걱정하고 인류를 걱정하며, 이윽고 헤지발카드에게 부탁했던 그.

“손님이 그렇게 애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누군진 몰라도, 무척 부럽네요.”

“부러워?”

의미를 알 수 없어 반문하는 헤지발카드를 향해 딸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를 생각하면서 부드럽게 웃고 있잖아요.”

“웃고 있나, 내가?”

“네. 웃고 있어요.”

“그렇군.”

잘 된 것 같다, 친구.

네 뜻은 잘 이뤄진 것 같아.

그렇다면 이제 나는 좀 쉬어도 될까?

인류가 다시 끝없이 질주하는 날이 올 때까지 쉬어도 될까?

“비가 오는군.”

“네? 설마요. 그렇게 맑았는데...어머?”

하늘은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딸은 밖으로 나가봤다가 깜짝놀라 돌아왔다.

딸이 말했다.

“그라는 건 역시 남자친구인가요?”

주인이 이마를 짚으며 끄응, 소리를 냈다. 딸의 나이로 보면 그런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깃궂게 물어볼 나이이기는 했다.

헤지발카드는 긴 여행 끝에 조금 헝클어진 긴 머리칼을 빗어 넘기고는 단조롭게 대답했다.

“그냥 모질이야. 어릴 적 친구.”

“어릴 적 친구면서 그런 표정이라니, 에이 그러지 말구요.”

“그래. 남자친구, 애인이지.”

헤지발카드는 쿡, 하고 웃으며 진실을 답했다.

“아주 먼 미래에는, 분명히 그랬다고 하더라.”

최후에 살아남은 드래곤의 최후를 장식해버렸던 인류 최고의 과학자.

인류에게 모든 미래를 주었으나, 그 미래가 빛 바랜 미래였다는 것을 깨닫고 과거로 되돌아간 그 남자.

그가 최후에 죽였던 드래곤이 여성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과오를 뉘우치며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웠더랬다.

“네가 바라는 미래가 여기에 있다. 이제 만족하는 거냐?”

해지발카드가 말했다.

대답은 없었지만, 밖에서 들리는 노랫소리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도시였다면 분명히 짜증내고 하늘을 욕했을 이들은, 이 비에 축복을 보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Comment ' 9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22:00
    No. 1

    멋진 엔딩입니다. 판타지에 과학의 발달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마지막 남은 드래곤이 그것을 다시 릿셋 시키다...... 아쉬운 점은 찾을 수 없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20:16
    No. 2

    과거를 바꾼다라;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21:40
    No. 3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4 17:38
    No. 4

    잘보앗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6 13:12
    No. 5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0 00:06
    No. 6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0 00:36
    No. 7

    상당히 희망적이네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1 16:57
    No. 8

    반전도 있었고, 그 과학자라는것도 흥미롭고, 내용자체가 매우 재미있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4.05 22:45
    No. 9

    외국어?가 섞여있는데 좀 거슬립니다. 아무튼 재밌는 글이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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