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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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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작성자
익명
작성
10.03.20 20:49
조회
3,279

코르케우스는 죽었고, 혁명은 실패했다.

염비선은 갑판에서 바닷바람을 맞고 있었다. 청명한 하늘에 맑은 날씨였지만, 꼭 마지막 해전의 그 날을 생각나게 하는 기분 나쁜 날씨였다.

"그는 죽었어......."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감히 신성한 왕권에 도전하고 '공화정 수립' 따위의 멍청한 짓거리를 벌인 몽상가 코르케우스를 중앙 해의 해전에서 격파하고 신효 왕국의 깃발을 바로 건 지도 보름 가까이 지났건만, 그의 망령은 아직까지 염비선을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 웃음을 터뜨리는 그 미친 모습만 보지 않았어도!'

그는 고개를 젓고 선실로 들어갔다.

어느새 차가웠던 갑판의 분위기는 활기차게 바뀌어 있었다. 차마 목소리를 높이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이 수군대고 있는 내용은 대개 갑판 위에 서 있던 남자, 그러니까 신효 왕국의 통치자 염비선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소문대로 무서운 사람이로군, 정말이지 피비린내가 풍겨오는 것 같아, 하는 이야기들.

그 '피비린내 나는 남자'는 선실에서 초상화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세트 왕실의 자문기관인 <현자의 좌>의 의원들의 초상화였다.

아무래도 이 왕국은 무언가 이상했다. 코르케우스의 '공화정 수립' 이후 귀족과 왕족들이 모두 자신과 손을 잡고 그를 몰아낼 방도를 백방으로 찾아보고 있을 때, 저들의 부귀영화를 좇아 그의 곁에 빌붙었던 선세트의 현자들, 그리고 왕 레본.

특히, 국왕이라는 이 레본 그리즐리에 대해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했다. 함께 혁명군을 몰아내는 것만이 그가 왕좌를 되찾는 길이었을 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괴물 혼혈의 곁에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레본을 잡아들여 심문하고, 나머지는 모두 즉석에서 목을 치겠다."

"예."

수행원이 대답했다.

"아니, 고통만 주고 죽이지는 않는 편이 나으려나."

함부로 선세트의 주요 인사들을 처형해서는 꽤나 큰 뒤처리가 따라야 할 것이다.

염비선은 다시 국왕 레본의 초상화를 꺼내들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레본은 권력보다는 목숨을 더 아끼는 자라 어릴 때부터 정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평민들과도 어울렸다고 했다.

"지금 당장 권력을 휘어잡고 있는 코르케우스에게 줄을 서는 것이 이로우리라고 생각한 것인가."

아무래도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지만, 염비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왜인지는 모르지만,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다. 그는 그 찜찜함을 가슴에 품은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배는 차가운 겨울 바다를 가르며 선세트로 향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레본 공께서는 옴네스 섬으로 가셨다니까요....... 아악!"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를 단칼에 베어 버렸다.

코르케우스가 중앙 해전에서 목숨을 잃었으니 이제 선세트는 왕국이고, 레본은 엄연한 국왕이다. 그럼에도 그를 공이라는 단어로 지칭한 것이 첫 번째였다. 보름 동안 완벽하게 정치 체제를 전환하라는 것이 무리한 처사였다 해도, 적어도 왕정의 수호자 앞에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예의가 없었다.

또, 이 자들은 한겨울에 귀빈을 안으로 모시지도 않고 당황부터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을 그렇게 세워 놓고 하는 소리라는 것이, 레본이 옴네스로 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나는 레본을 만나러 왔다."

"정말입니다, 전하. 바로 어제, 수로(Suro)의 항구에서 쾌속선을 타고 출항하셨으니 지금 소환장을 보내신다면 따라잡을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저희는 모르는 일이옵니다. 공화정 수립 때부터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더니 기어이......."

염비선은 의원의 말을 끊었다.

"답하라. 그대들이 언급한 옴네스 섬이라 함은 브라이튼 대륙 리볼타 만에 있는 섬, 곧 반역자 코르케우스의 고향임이 분명하다."

아무도 대꾸하는 이가 없었다.

"내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라."

그는 기다렸다.

끝끝내 대답이 나오지 않자, 염비선은 현자들의 면전에 칼을 들이대고 싶은 의지를 애써 억제하며 궐문으로 입장했다. 그의 수행원들과, 당황한 듯 서로를 쳐다보던 현자들이 뒤를 따랐다.

그는 곧바로 최고 귀빈실에 들어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저녁이 되자 그를 환영하는 의미의 연회가 열렸으나, 염비선은 참석한 뒤 줄곧 레본의 행방만을 물었다. 분위기가 냉랭해진 연회는 몇 십분 만에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배에서 잠깐 잔 탓인지, 국왕 주제에 나라를 팽개치고 도망간 레본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그는 도통 잠들 수 없었다.

레본의 그 유약한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그가 옴네스 섬으로 가 뭔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면 그야말로 위협 중의 위협이었다. 정무 처리 속도가 신속하기로 유명한 레본이 무언가 음모를 꾸며 염비선이 당도하기도 전에 그것을 실행한다면.......

그가 걱정을 떨치려 고개를 흔들고 침대에 누우려던 찰나에 수상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가까운 곳에 놓아둔 검을 검집에서 빼어들고 조심스럽게 귀빈실 문을 열었다.

한밤중의 손님은 평의원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어색하게 틀어진 수염이 그 복장이 위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순식간에 몸을 제압당한 남자는 곧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염비선이 누런색 수염을 떼어내자 과연 쉽게 뜯어졌다.

그는 칼을 남자의 목에 들이대고 물었다.

"누가 보냈나?"

"대답할 수 없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염비선은 더 이상의 소란을 방지하기 위해 그를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는 남자를 칼로 몇 번 가볍게 찌르는 시늉을 했다.

"정 그렇게 나온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 자가 내 방문 앞에서 얼쩡거렸노라고 공표하지. 위장까지 하고 나타난 걸 보니 떳떳한 일은 아닌 듯한데, 내게 설설 기는 그 원로대신들 앞에서도 네놈이 반항할 배짱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군."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 불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대답할 수 없다."

남자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눈빛을 보냈다.

밤중의 실랑이에 지친 염비선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고 그를 단단히 포박한 후 몸을 수색했다. 그러나 옷깃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진 서신에는 발신인도 수신인도 적혀있지 않았고, 온갖 비유와 시어만 가득했다.

머리가 아파진 그는 칼을 손에 쥔 채 침대에 누웠고, 남자의 움직임을 주시하다 서서히 눈을 감았다. 밤중에 뭔가 기척을 느꼈지만, 설마 무슨 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분명히 묶여 있던 남자가 사라진 것을 본 염비선은 지난 밤 무의식중에 있었던 결정을 깊이 후회했다. 일단 서신은 그의 손에 있었으나, 남자가 그 내용을 외우고 있었다면 문제는 심각해졌다. 직접적인 언어 없이 비유로만 쓰인 글이라 그 정확한 내용을 쉽게 유추할 수 없어 더욱 불안해졌다.

염비선이 신속히 시행한 수색이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함에 따라 옴네스로의 출항 또한 지연되었다. 마침내 그는 수색을 수행원들에게 맡기고 먼저 옴네스 섬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레본이 흑심을 품을 일은 없겠지만, 어떤 꺼림칙한 예감이 그를 계속 부추겼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인간, 동물과 식물이 그의 결정을 방해하려는 듯 보였다. 한 번은 분명히 사전에 점검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배 밑바닥에 큰 결함이 생겼다. 또, 노 젓는 사람들이 단체로 실종되어 찾는데 한동안 애를 먹기도 했고 ― 결국 의미심장하게도 노잡이들은 모두 수로의 버려진 저택에 감금되어 있었다 ― , 심지어는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괴물이 항구에 난입하기도 했다. 차라리 수색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험악한 장애물들이 그의 출항을 방해하고 있었다.

눈 아래의 피곤한 기색이 더욱 짙어진 채로, 노신은 집무실의 의자에서 기지개를 켰다. 집무실의 책상에는 고풍스러운 문체로 '상의원 가흐렌'이라 새겨진 명패가 있었다.

어색한 수염을 붙였던 그 남자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인상이 달라진 평의원 '타라 그라코'가 노신의 방에 들어섰다. 그라코는 무릎을 굽혀 상의원에게 절을 하고는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상의원에게 말을 걸었다.

"그 괴물을 구해 오느라 꽤나 고생하셨겠습니다, 가흐렌."

"창웅 그라코, 말씀은 고마우나 그 낯짝을 보니 걱정이라기보다 비아냥거림으로밖에 들리지 않는군요. 덧붙이자면 그 쪽 동방의 암시장에는 별의별 게 다 있다지요."

"아니, 정말로 수고가 많으십니다."

"전설 속의 괴물입니다! 그 놈을 구하느라 얼마나 들었는데, 고작 일회용품으로 쓰인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가뜩이나 기분 안 좋은데 계속 그렇게 비아냥대면 그 쪽에게 값을 물어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둘의 얼굴은 웃고 있는 채였다.

"평소에 전하께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시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닥쳐보니 정말 죽겠습니다. 좀 도와줄 수는 없겠습니까, 창웅? 내가 답장을 다 쓸 때까지는 할 일이 없잖습니까."

"그건 곤란하군요. 정치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저입니다."

"아이고, 이제는 밤에도 쉴 수 없습니다. 염비선 그 놈이 어찌나 집요하게 출항을 시도하는지....... 물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쪽이 염비선의 시선을 끌어주지 못했다면 아마 저는 지금보다 더욱 바빠졌을 겁니다."

가흐렌이 피곤한 눈을 비비는 동안 창웅은 집무실의 빈 의자를 끌어당겨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러니까 나한테 잘 보이라 이겁니다. 내가 아니었으면 지금도 암시장을 전전하며 또 다른 괴물을 구하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는 과장되게 거들먹거렸다.

"그 쪽이야말로 나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포박을 풀어주지 않았으면 지금도 염비선의 고문을 받으며 전하의 계획을 줄줄 불고 있었을 텐데요."

"누가 계획을 분다는 겁니까!"

가흐렌이 한 수 위였다.

잠시 창웅과 농담을 주고받던 가흐렌은 서류 더미 깊숙한 곳에 숨겨둔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냈다. 레본의 서신에 대한 답장이었다. 종이를 펼치자마자 가득한 시어와 비유가 눈에 들어왔다.

창웅은 힐끗 그것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필체는 개선이 되고 있습니까?"

"말도 마세요. 제가 썼지만 정말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입니다. 이거 원, 까마득한 옛날 그 의장 출마 연설문 이후로 글을 써 본 게 얼마만인지. 전하께서 연설문 사본은 안 보내주신답디까? 더 이상은 정말 견딜 수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군요. 어디 그 문제의 글이 얼마나 유치한지 볼까……. 으웩, 정말 소문대로군."

과장된 몸짓으로 가흐렌이 쓴 글을 도저히 읽지 못하겠다는 의사표현을 한 창웅이었지만, 둘 모두 지금의 웃음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 아님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목숨, 그리고 그들 주군의 목숨이 달린 진중하고도 진중한 일이었다. 곧 닥쳐올 일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농담을 주고받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부는 방식이었다.

노신 가흐렌의 도움으로, 레본 그리즐리는 무사히 옴네스 섬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그가 보낸 서신이 가흐렌에게 무사히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서신을 온갖 비유로 꾸미고 전령 창웅에게 서신의 내용을 따로 가르쳐 준 이유이기도 했다. 그의 경로는 염비선이 묵고 있음이 분명한 귀빈실 앞을 지났다. 호위무사 출신인 창웅은 기척을 잘 숨기지 못했다.

그는 한때 염비선의 직속 호위무사였다. 레본의 계획을 들으며 창웅은 혹시라도 자신이 배반하면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물었고, 그는 물론 그럴 리가 없다고 답했다. 둘은 그것에 동의했다.

창웅이 염비선을 배신하고 레본에게로 온 지도 어느덧 2년 전이었고, 그는 충분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혼혈 군주를 직접 만나본 사람은 모두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레본은 서신에 썼다.

'나도, 그대도, 제가 지금 와 있는 이 아름다운 작은 고장의 마을 사람들도, 그리고 우리 사이를 이어 줄 전령도 모두 공감할 것입니다. 그의 눈빛에 이끌려 나는 이렇듯 목숨을 걸고 마지막으로 소박한 계획을 벌이고 있고, 그의 말에 감동받아 우리의 전령은 나의 영원한 적수를 떠나 나에게로 왔습니다. 그가 불태워지지도,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들짐승과 독수리의 먹이가 되어가고 있는 지금도,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를 추억하며 그의 얼굴을 회상합니다.'

그것은 한 치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레본에게 했던 것처럼 눈높이를 맞추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존대를 하고, 대중에게 했던 것처럼 사람을 이끄는 열정적인 언어로 웅변을 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염비선과 같은 사람이나 오직 일신의 안위만을 좇는 박쥐같은 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그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고, 창웅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코르케우스에 대항해 귀족들이 연합해 들고 일어나겠다는데 어떻게 감히 동조할 수 있을까. 창웅이 그 혁명가에게로, 또 레본에게로 오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적수가 노리고 있는 것은 망각입니다. 높은 탑과 성벽의 그림자 아래에 숨고, 또 채찍과 창으로 혹독하게 백성을 다스림으로써 마지막 일말의 기억마저 없애버리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들의 안위, 또 자신들의 권력으로 직결되는 길이니까요. 우리가 일어서면 세상은 변할 수 있다, 우리가 목소리를 높이면 저들은 우리를 귀로 들을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그를 민중의 마음으로부터 몰아내어 다시 그들이 백성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백성이 그들 앞에 복종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가, 하고 레본은 창밖의 아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어떤 나쁜 일이든 금세 딛고 일어나는 아이들의 특성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지 이런 것이 다름 아닌 '그들'이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코르케우스의 죽음이 전해지고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모든 교류와 공사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탄력을 받은 듯 돈의 오고 감은 활발해지고 공사의 진척 속도는 빨라졌다. 아직도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수심의 그늘이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지만, 이러다가는 다시 처음으로, 모든 것이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될는지도 모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처럼 천하고 가난한 이들은 채찍을 맞으며 비명 지르고, 예전처럼 배고픔에 지쳐 먹을 것을 구하는 이들은 대문 앞에서 쫓겨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특별히 그 혁명가와 같은 사상을 공유하기 때문이 아니었고, 추상적인 '희망과 사랑, 평화'의 철학을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적어도 아랫사람에게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으며 눈높이를 맞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존대를 해주며 미소를 짓던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높으신 분들이나 읽을 수 있는 케케묵은 역사책 속으로 그를 밀어 넣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의 한 파편만이라도 기억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그를 단지 지나간 역사 속의 인물 중의 한 명으로 만드는 것을 피할 수만 있다면, 이 조그마한 불씨는 언젠가 되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이지요.

동방의 속담 중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다지요?  언어의 힘이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선세트의 아동 교육부에서도 외운 것을 소리 내어서 읽게 한다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학습 효과가 커진다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번에 이것이 정말인지 실험을 해 보고자 합니다. 과연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을 지를요. 과연 얘들아, 언젠가는 그와 같은 불길이 다시 한 번 일어나서 푸른 하늘과 넓은 들판을 되찾아 줄 것이란다, 라는 말로써 우리의 가슴 속에 그를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을 지를요.'

레본은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미 초고는 준비해 둔 상태였고, 그것이 과연 이 고장 사람들에게 먹힐 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관찰해나가야 할 숙제였다.

그는 결심을 굳혔다. 나는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 식으로 나의 우상을 잊히게 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의 웅변과 같이 심금을 울리고 마음을 움직이는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살아남지는 못하겠지만, 그 정도 각오는 되어 있다.

그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레본, 네가 언제부터 이런 사람이 되어 있었나. 오직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면 권세도, 재산도, 왕좌까지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었던 생존주의자 레본 그리즐리, 그런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코르케우스에게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나. 그는 피식 실소했다.

옛날의 그였다면, 지금의 그와 똑같은 계획을 세운 사람이 있었다 해도 그의 말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중요하신 목숨까지 버릴 각오를 하고 대담한 계획을 꾸미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변화시켰을까?

아마도 혁명이겠지, 하고 레본은 생각했다.

가흐렌은 염비선이 은밀히 파견한 첩자 하나가 옴네스로 출항하려 시도한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상념에 빠져 있던 레본 역시 그 첩자가 온갖 질문 공세를 펼쳐, 레본의 그 무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서신의 발신인이 바로 선세트의 국왕 레본 그리즐리임을 알아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창웅은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가흐렌은 마침내 어떤 수상한 자가 그의 통제를 벗어나 옴네스로 가는 암표를 샀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늦게까지 무언가 계획을 꾸미고는 녹초가 되어 들어왔다. 그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창웅은 조용히 집무실을 나섰다.

좌의 의원들은 그들을 위해 제공된 정원을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정원이었다. 정원사들은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뜰의 꽃과 풀을 한 번씩 점검하며 새삼 자긍심을 느꼈다. 우연인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현자의 정원에는 세이지 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었다.

길 양 옆에는 붉은색과 푸른색의 세이지 꽃이 피어 있었고, 그 뒤로는 잡초 하나 없는 아름다운 정원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같은 겨울에는 흔히 볼 수 없는 샛노란 해바라기는 계절에 상관없이 꽃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한 정원사들의 각별한 노력 덕분에 그 아름다움을 자랑할 수 있었다.

다 외우지는 못했지만, 창웅은 레본이 보낸 서신의 내용을 대충 엿본 적이 있었다. 천하의 레본이 시구에 비유에 온갖 위장도구들을 사용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쩔쩔매는 모습이 떠오르자 가느다란 웃음이 새어나왔다. 만약 그 서신이 가흐렌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더라면 그 무뚝뚝한 사람도 한참을 웃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은 곧 잦아들었다.

이제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레본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모든 것은 새롭게 시작되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염비선의 서슬 퍼런 칼날이 그들 모두를 찔러 죽일 터였다.

'토착민 출신 창웅, 기껏 출세하고서는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가.'

허탈감이 찾아왔다.

그러나 이 계획에 참여한 것에 후회는 없었다. 이것은 목숨을 버릴 만큼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었고, 그리 할 각오도 되어 있었다.

염비선이 창웅의 출신을 무시하고 능력 위주의 인사 발탁을 시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호위무사가 되기를 바랐던 다른 토착민들과 그가 달랐던 점은 단지 교묘한 말로 그의 출신지를 숨겼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토착민이라면 무조건 천대받고 박해받으며 경멸당하는 이러한 시기에, 출신을 속여서라도 이 정도로 출세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렇게 만족할 수 있었는데, 그 생활에 안주할 수 있었는데.

창웅은 문득, 다시 정신을 차렸다. 과연 내가 그 생활에 안주할 수 있었을까, 정말로?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코르케우스를 만난 이상 그렇게 염비선의 곁에 남아있는 것은 무리였다. 주군을 배신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따라가고 싶을 만큼 그 혁명가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었다. 이제 그는 죽었지만, 그는 결코 잊혀서는 안 된다. 코르케우스 그 자신을 위해서도, 본래의 주군을 배신하고 여태까지 달려온 창웅을 위해서도, 그가 잊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가 염비선을 배신한 것은 바로 코르케우스가 목숨을 잃은 중앙 해전에서였다. 마침내 궁지에 몰린 혁명가는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고, 염비선을 가리키며 알아듣지 못할 무언가를 소리쳤다. 아마도 저주였을 것이다.

그가 끝까지 웃음을 띤 채로 죽어갈 때, 혁명군은 그의 곁으로 달려가 눈물을 흘리는 대신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넋이 나간 채로 서 있었다. 그들을 제압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으나, 창웅은 차마 칼을 들 수 없었다. 해전이 끝나고 그는 신효를 탈출하여 반(反)왕국 세력에 합류했다.

그리고 어찌 인연이 닿게 되어 레본과 가흐렌과도 만났다. 그러나 이제.......

"이것도 이제 얼마 안 남았나."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하고 말았다. 혹여 누가 듣고 의심스럽게 생각할까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친 감상에 빠져 있으니 잠시 경계를 놓은 게지.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애초에 죽을 각오를 했지만, 더 이상 문체를 두고 농담을 주고받는다거나 또는 서신을 쓰는 레본의 모습을 상상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자 괜스레 우울해졌다.

부스럭― 하고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창웅은 무시했다. 좌우로 핀 세이지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씻어 보내는 것을 두고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눈에 문득 체리 세이지 하나가 띄었다. 꽃잎이 젖어 있는 것을 보고 창웅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리지 않는 듯 조금씩 흩날리던 눈발이 어느새 강하게 날리고 있었다. 그만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세이지 꽃에서 눈을 떼는 순간, 예의 그 소리가 다시 들렸다. 어쩐지 불안해졌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을 꽤나 많이 떼었다. 숨이 턱에 찰 정도로 뛰었는데도 아직 본궁 입구는 저 멀리에 보였다. 눈에 젖는 것이 싫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 전의 그 불안감이 계속 창웅을 괴롭히고 있었다.

'가흐렌에게 돌아가면 다 잘 될 거야.'

그는 스스로를 달랬다.

'게다가 이 근거 없는 불안감이 설득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애써 안심시키려 했지만 불안감은 계속되었다. 또 부스럭― 하고 풀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고, 이미 눈 때문에 푹 젖은 창웅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본궁 앞에 다다라 그는 가쁜 숨을 들이마셨다. 궁에는 경비병들이 있을 테니 안심해도 좋겠지, 하고 그는 옆에 있는 경비병을 돌아보았다. 경비병은 정중하게 목례를 하고는 히죽 웃었다. 창웅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었다.

가흐렌은 잠에서 깨어났다. 밖을 내다보자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창웅은 집무실 안에 있지 않았다. 순간 섬뜩한 예감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고 그는 애써 그것을 뿌리치려 노력하면서 창웅을 찾기 위해 궁성 내부를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흐렌의 갑작스러운 그 직감이 사실임을 입증하듯, 그 어디에도 창웅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청소 물품 창고까지 뒤져 보았지만 역시나 없었다. 그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불안감을 끌어안고 다시 그의 방으로 가 의자에 쓰러졌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는데, 창웅을 찾아야 할 텐데,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니어야 할 텐데.......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관이 말했다. 염비선은 빠른 걸음으로 자신이 묵고 있는 귀빈실로 향했다.

"특히 코르케우스, 그 자는....... 그, 그러니까,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다 이겁니다."

그의 지나치게 넓은 보폭을 따라가기 힘든지, 부관이 숨 가쁜 소리를 내며 진언을 계속했다. 염비선은 손을 들어 부관을 제지했다.

창웅, 이 쥐새끼 같은 놈, 그 날 밤에는 갑자기 쏟아진 잠 때문에 운 좋게도 탈출했다마는, 이번야말로 끝장을 내 주마. 한때 신뢰했던 호위무사가 혁명군에 대한 승리를 거머쥔 그 순간에 그를 배신하고, 이렇듯 레본의 개가 되어 있는 모습을 목격한 기분은 매우 더러웠다.

귀빈실 앞에 다다른 염비선은 문고리를 잡았다. 이 괴이한 사건의 전모를 기필코 밝혀내고야 말리라. 그리고 그는 문을 열었다.

정신을 차린 창웅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염비선의 모습을 보고 움찔 몸을 떨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괴물 혼혈 놈의 요망한 연설이 그렇게도 좋더냐?"

"예."

창웅은 피식 웃으며 애써 태연한 척 대꾸했다. 그러자 염비선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네놈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레본 놈도 아마 그 잡종의 번지르르한 말에 홀려 장례식을 치러 주러 떠났나 보지?"

필사적으로 농담을 찾아내 대꾸하려던 창웅은 어느새 염비선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음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전혀 농담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야겠다. 잡종 혁명가가 어딘가에 숨어서 흉계를 꾸미고 있든, 네놈들이 모두 미쳐 광인 노릇을 하고 있든,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그 때는 정말로 끝이다."

"그런다고......."

누군가 빨갛게 달구어진 인두를 그와 염비선 사이에 대령했다.

창웅은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서부 대륙은 선세트나 신효와는 계절이 반대였다. 육지에 접근할수록 안개는 짙어졌고 먹구름이 하늘을 메웠다. 덥고 습한 날씨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동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코르케우스의 망령이 다시 나타나 그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어리석구나."

"입 다물어라. 죽은 자 주제에."

그는 바다에 침을 뱉었다.

중앙 해의 마지막 전투에서 그를 배신하고 떠나간 호위무사 창웅이 레본과 가흐렌 사이를 이어 주는 전령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며칠에 걸친 고문에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계획에 대해서도, 배신에 대해서도, 그 무엇에 대해서도. 단지 가흐렌이라는 노신 또한 공범이었다는 것을 알아냈을 뿐.

놀랍게도, 눈을 지지고 창자를 갈라 몸이 시체가 되다시피 했음에도 창웅은 기어코 탈출을 감행했다. 곧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옴네스로 떠나는 배에 탑승했다는 보고가 들려왔다.

집무실 의자에 기절해 있던 늙은 여우 가흐렌도 잡아 족쳤다. 그의 임무는 레본을 위해 끝까지 시간을 끌어 주는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괴물을 풀어놓은 것도,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 놓은 것도 가흐렌의 똘마니들이었다.

가흐렌은 그가 지체시킨 시간만큼 고통을 받고 비참하게 죽었다.

"미친 놈. 혼혈 괴물 혁명가도, 그 혼혈을 추종하는 국왕과 주군을 배신한 호위무사도, 그 국왕을 돕는 상의원도 모두 미쳤어."

염비선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곁에서 웃고 있는 코르케우스의 망령이 그 날과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흐흐흐……. 나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너는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리.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부르지. 나와 똑같이 반쯤 미친 사람들이 마지막에 웃게 될 거야."

가만히 망령의 말을 듣고 있던 염비선은 쏘아붙였다.

"네놈 말대로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괴상한 일이 벌어질 리 없지 않은가? 모두들 머리가 돈 것이지."

망령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체 반쪽 인간 혁명가의 어디가 좋아서 모두들 이 모양인가? 그는 죽었고, 복수는 불가능하다. 난도질당한 몸을 이끌고 탈출하는 것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왕을 위해 죽으면서까지 시간을 끌어주는 것도 미치지 않고서는 벌일 수 없는 일이야."

그의 혼잣말에도 망령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헛소리. 뭐가 우습다고 죽기 직전에야 실실 웃어댄 거냐? 그걸 알아? 네놈이 그렇게도 바랐던 혁명은 이제 끝났고, 나의 시대가 왔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고, 그게 변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망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 웃음의 메아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그는 난간을 내리쳤다.

"개수작 마라! 넌 이미 죽었어! 끝났다고! 나를 미치게 만들지 말고 네놈이 빠져 죽은 바다뱀의 아가리로 돌아가라!"

울렁이는 바다가 구슬피 우는 듯했다. 염비선은 머리끝까지 벌게진 채로 손을 크게 휘저었다.

마침내 망령은 웃음을 그치고 사라졌다.

느닷없는 고함소리에 놀란 병사들이 창을 들고 올라왔을 때 이미 염비선은 차가운 갑옷과 날카로운 검으로 무장한 채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날이었다. 멀리서 다가오고 있을 핏빛 군주를 환영하기라도 하듯 음습하고 축축한 날씨였다. 조용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레본은 마지막 연설을 위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임시 거처에는 심복 창웅이 반 주검이 된 채로 누워 있었다. 잔혹한 고문으로 인해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팔을 들어 그를 필사적으로 제지하며, 그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입술만을 움직여 이야기했다.

'가면 죽습니다.'

레본은 씁쓸하게 웃었다.

"후회되지 않나? 그 전투에서 그의 죽음을 얌전히 인정하고, 그대로 신효 국왕의 밑에 있었다면 다시 잡혀 고문을 받을 일도 없었을 테고 말이지."

'죽을 각오로 시작한 일입니다.'

그는 간신히 대꾸했다.

레본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언젠가……. 나도 그 비슷한 대답을 그에게서 들어본 적이 있다. 혁명 영웅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난다더니, 과연 사실이었어. 혼혈이라 그런지 얼굴은 못생겼는데, 정말이지 빛나는 풍모였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영웅이었지."

이 사람은 여기서 죽어야 할 사람이 아닌데.

"혁명은 실패합니다, 기필코.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말처럼 말이지요.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코르케우스는 허리를 굽혀 그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살아남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 단지......."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사람들을 위해."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얼마 뒤에 있었던 공화정 수립 회의에서 레본은 적극적인 찬성 의사를 표했다.

"그래....... 살아남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야."

창웅은 힘없이 팔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떨리는 입술을 열어 다시 입모양을 만들었다.

'다녀오십시오, 주군.'

레본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짚으로 엮은 도롱이를 걸치고, 그는 빗속으로 나섰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그런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야."

광장으로 걸어가며, 레본은 중얼거렸다.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정치에 휘말리는 순간 목숨이란 한낱 도구로 전락해버린다는 사실을 너무도 일찍 깨달았던 그였다. 그리하여 약간 모자란 체 평민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허점투성이의 정책을 제안하고, 자존심을 굽혀 무릎을 꿇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가 이제 연설 한 번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었다.

단지 한 사람을 위해.

비가 내리는 어둡고 우울한 날이었다. 덥고 습한 공기는 매우 불쾌했고, 가뜩이나 기분도 좋지 않은데 시종일관 축 늘어져 있는 그의 병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수행원들의 무의미한 호위를 물리치고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섬에서 나는 냄새 하나하나마다 코르케우스의 그것이 실려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서 레본을 처형하고 이곳을 떠나야겠어, 그는 생각했다.

"세 조로 나눈다. 각각 마을을 우회하여 동쪽을 터놓고 출구를 봉쇄하도록. 동쪽에서 내가 신호를 내림과 동시에 진입한다."

"예!"

장교들은 일사불란하게 조를 편성해 각자 제 위치로 향했다. 염비선은 붉은 전포를 휘날리며 마을의 동쪽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희미하게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들려오는 듯도 했다.

마을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아이를 안은 여인과 마주쳤다. 여인은 염비선과 병사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의아해하는 아이를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는 그의 앞을 막아섰다. 증오와 원한이 서린 눈빛이었다.

"무슨 일이죠?"

"비켜라. 평민이 왕족의 길을 막는 것은 중죄라는 것을 모르느냐?"

그의 뒤에 서 있던 장교가 다그쳤다.

여인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염비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괴물 잡종 놈의 추종자가 연설을 한다지? 죄다 그 놈에게 홀려서 광장으로 몰려간 줄 알았더니, 남아있는 사람이 있군."

"괴물 잡종 놈의 추종자?"

여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바꿔서 한 번 말해보죠. 여기 계신 여러분은 피에 미친 짐승의 추종자 분들이신가요?"

"신효의 대왕이시다!"

장교는 분노 어린 목소리로 외치고는 염비선을 바라보았다.

염비선은 아무런 대꾸 없이 여인을 밀치고 지나갔고, 그의 의도를 알아들은 장교는 칼을 빼들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같이 그 놈만 불러댄단 말이지, 염비선은 생각했다. 심지어는 왕족까지.......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는 징조다. 기이하도록 스산한 이 날씨도 그런 징조의 일환일 게야.

그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땅에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바람은 서늘했다.

일부는 적대적인 눈빛으로, 일부는 간절한 갈망이 담긴 눈빛으로, 또 일부는 절망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길을 비켜준 군중은 레본이 광장 한가운데의 연단에 올라설 때까지도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선세트의 왕족이라, 그들의 얼굴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코르케우스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놈들과 같은 족속이로군!

슬픔과 비탄이 지배하는 죽음 같은 침묵을 견디다 못한 레본은 크게 소리쳤다.

"누가 당신들에게서 그를 앗아갔습니까?"

"그는 죽었소! 당신네 높으신 어르신들이 그를 바다뱀의 먹이로 던져준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가 답했다.

레본은 슬펐다. 이들과 함께 핏빛 깃발을 휘날리고 함께 말발굽 소리로 세계를 지배한 코르케우스는 더 이상 이들 앞에 서 있지 않다는 말인가? 이들은 혁명 영웅이 더 이상 그들 앞에서 숨 쉬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말인가?

그의 무응답에 힘입어, 적대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레본은 절망적으로 다시 외쳤다.

"그가 정말 죽었습니까? 혁명의 기치는 이미 높이 들렸는데, 그는 정말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소이까!"

"여러분에게는 그의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그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그 '높으신 어르신들'이 휘두른 망각의 칼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것입니까?"

"......."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혁명가가 아니라, 난세에 피었다 사라진 한낱 범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까?"

그는 코르케우스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선세트를 정복한 그와 마주쳤을 때, 전쟁 영웅에 가까운 그는 분명히 무언가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리라고 예상했었다. 그 '전쟁 영웅'이라는 사람들이 모두 그랬고, 신효 국왕의 얼굴도 그러했다. '피에 찌들었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마치 얼굴에 그림자라도 드리워져 있는 듯한, 그런 음산하고 괴기스럽다는 인상을 주는 얼굴이 바로 레본이 보아왔던 전쟁 영웅들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는 영웅이었습니다, 아니, 영웅입니다. 혁명 영웅입니다! '영웅들의 큰 불은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는 오랜 격언을 잊으셨습니까? 그의 불은 아직도 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세찬 바람도, 차가운 폭우도, 무정한 말발굽도 이를 꺼뜨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여러분은 그 불씨를 스스로 짓밟고 있는 것입니까?"

"그는 살아있다!"

여러 군데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그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다시 그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혁명가 코르케우스다!"

산발적으로 들려오던 외침은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레본의 연설 소리를 압도했다.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그가 돌아왔다!"

"나팔을 울려라! 혁명은 이제 막 시작이다!"

"혁명은 이제 막 시작이다!"

레본은 잠시 소리치는 것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압도적인 열기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비록 나이는 훨씬 많았지만 오랜 친구이자 조언자였던 가흐렌이 웅변에 대해 말해주던 때가 눈에 선했다.

'말 몇 마디로 사람의 말을 움직인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대개 그런 소문은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하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능합니다. 이것은, 흔한 비유를 쓰자면 불길이나……. 그래, 폭동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최소한의 불씨만 있다면 그것을 건드려줌으로써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고 해도 나, '말더듬이 연설가 레본'이 그 불씨를 건드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래도 꽤 하는데, 레본.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제대로 된 연설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는 사람치고는 괜찮은 성적이야.

그리고 실제로 그의 생각 이상이었다.

어느덧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무정하고 냉혹한 바람과 호우에 병사들은 모두 도롱이를 썼지만, 거추장스럽고 짜증난다고 판단한 염비선은 걸치고 있던 전포마저 벗어던졌다.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은 확실히 레본의 연설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열정적인 웅변을 하고 있다지만 그에게는 그저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곧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사방에서 불시에 광장을 습격할 테고, 레본의 그 시끄러운 머리는 몸뚱이로부터 분리되리라.

병사 하나가 제 몸도 못 가누는 환자 하나를 끌고 온 것은 그 때였다.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는 그 환자는 갑작스레 맞은 세찬 비에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꺽꺽대고 있었다.

"창웅. 마지막 해전에서 나를 배신하고 다시 잡혀 고문을 받고도 기어코 여기에 와 있구나."

'너는 끝난다.'

창웅은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염비선의 눈썹이 꿈틀했다. 걷잡을 수 없이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의 이성으로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합리적인 일들이 아니었다. 코르케우스를 해전에서 무찔렀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창웅은 용케 입모양을 만들어냈다.

한낱 연설로 코르케우스가 되살아나는 것도 아닐 테고, 그는 생각했다. 레본이 세 치 혀로 폭동을 주도할 리도 없는 노릇이고, 대체 뭘 믿고 저런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그의 양 옆에 선 병사들은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칼에 손을 대고 있었다. 염비선은 그들을 제지했다.

'큰 불은 이 세찬 비로도 끄지 못해.'

창웅은 마지막으로 입술을 움직이고는,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숨을 멈추고 축 늘어진 창웅의 시체를 염비선은 간단한 손짓으로 바다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병사 둘은 즉각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큰 불, 제깟 놈이 얼마나 큰 불을 낼 수 있다고 그러는지.

코르케우스의 망령은 이제 사라졌다. 한 사람의 힘으로 무언가 큰일을 벌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잘못 판단한 것이요 영웅도 아니었다. 애초에 꺼지지 않는 큰 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이 거센 비바람이 마지막 불씨마저 꺼뜨리면 한 줌 재만이 남게 되리라.

염비선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무자비한 폭풍우와 짙게 드리운 먹구름 아래 염비선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멈추지 않는 레본의 연설을 염비선은 그를 강제로 끌어내림으로써 중단시켰다. 저항하는 자들은 차가운 창날이 가슴을 꿰뚫었고, 레본은 이제 손발이 단단히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러나 먹구름 사이로 비친 한 줄기 태양빛은 레본의 눈이 생기를 잃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장교가 형식적인 절차를 집행하고 있었다.

"선세트의 국왕이자 코르케우스 혁명군에 가담한 반동분자였던 죄인 레본 그리즐리는 신성한 왕국의 소환 명령에 불복하고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 죄, 왕국에 위해를 가하는 반동적인 선동을 시도한 죄, 혁명에......."

"집어치우고, 형을 집행하도록 한다."

염비선이 차갑게 말했다.

장교가 당황하는 사이 염비선은 허리춤의 칼을 빼들고 레본의 앞으로 걸어왔다. 하늘을 뒤덮은 폭풍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나를 원망하는 사람이 있을까? 레본은 마찬가지로 결박당한 옴네스의 주민들을 둘러보았다. 아마도 없는 것 같았다. 모두 무표정했고, 비통했고, 적대적이었지만, 레본은 혁명군의 함성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몰아치는 찬바람 속에서도 한 가닥 뜨거운 북풍을 느낀 그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염비선은 창웅이 말한 '큰 불'을 찾아보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무표정했고, 비통했고, 적대적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 사건은 역사에 한 줄조차 남지 못한 채 먼지로 사그라질 것이다.

그는 냉소를 띠고 레본을 내려다보았다. 레본도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염비선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서로에게 말했다.

"실패했군, 가련한 운명아."

"실패하셨군요."

순식간에 염비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죽을 때까지 헛소리를 지껄이던 코르케우스의 피를 이어받기라도 한 것인가?

염비선은 다시 말을 건넸다.

"백성의 안위보다 자신의 목숨을 중히 여기던 불쌍한 레본이, 무슨 바람이 불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 말더듬이 연설가 대신 미친 선동가만 남았구나."

"피비린내 나는 중앙 해의 바람을 타고 왔지요. 광인(狂人) 곁에는 광인이 꼬이는 법, 이제 우리끼리 손을 잡고 큰 불을 지르려 모였습니다."

"남쪽에서 온 세찬 비와 거센 폭풍을 보아라. 이래도 그 큰 불이 꺼지지 않을 불이더냐? 이제 너는 그를 따라 '불을 내려' 한 것을 땅을 치며 후회하겠고, 그 때처럼 조용히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탄식할 것이다."

"시인이 되는 건 그만둡시다. 후회 따윈 없습니다."

염비선은 칼을 들어 레본의 목에 겨누었다.

레본은 초연한 듯, 칼이 잘 들 수 있도록 목을 내밀었다. 옴네스의 주민들도 누구 하나 놀라는 사람이 없었다. 이 기이한 광경을 보고 놀란 것은 오히려 염비선의 병사들 쪽이었다.

레본이 실실 웃으며 말을 걸었다.

"보십시오, 후회 따윈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끝까지 시간을 끌어 주려다가 개처럼 죽은 늙은이 가흐렌도, 나를 배신하고 고문을 받으면서까지 네놈을 졸졸 따라다니다가 바다뱀의 먹이가 된 창웅도 이제 여기에는 없다. 이 상황에서도 희망이 보이는 것인가? 불씨가 있으면 불은 언젠가 타오르지만, 여기에 불씨가 있다는 것인가?"

"아니, 눈이 어떻게 되셨나 봅니다. 이곳을 가득 채운 이 거대한 불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닥쳐라! 그는 죽었고 그의 불길은 꺼졌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와 같이 타오르지 못할 것이다!"

"영웅들의 큰 불은 아직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 대사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영웅이 아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 대사를 이룩했기에, 그는 영웅입니다."

"시인이 되는 건 그만두자고 하지 않았나! 말장난은 집어치우도록 하지. 네놈은 그가 정말 역사에 흔적을 남겼다고, 거대한 흐름에 어떤 변화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렇게 비참하게 묶인 옴네스의 반역자들을 보고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염비선은 더 대답하지 않은 채 숨을 몰아쉬며 레본을 내려다보았고, 레본은 역시 초연하게 웃고 있었다.

정치에 휘말리지 않고 싶었던 레본은 이제 한 사람을 위한 연설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말더듬이 연설가'는 어느새 희대의 웅변가가 되어, 코르케우스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었다.

"네놈이......."

염비선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로 코르케우스는 영웅이었는가? 미치지 않고서야 벌일 수 없었던 그 일들은, 모두 코르케우스가 놓은 불길이었던가?

노신 가흐렌의 모습이 떠올랐다. 염비선의 출항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느라 녹초가 된 그를 그의 집무실에서 포박했다. 레본을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시간을 끌어주었다. 단지 그 임무 하나를 위해서.

한때 그의 호위무사였던 창웅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충성스러운 심복이었던 창웅은 기이하게도 코르케우스의 죽음의 그 순간에 그를 떠나갔다. 고문을 받아 시체가 되다시피 한 몸을 힘겹게 끌고 탈출해 마지막까지 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의 앞길을 막아선 여인과 그 아이가 떠올랐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아이였으리라. 무엇이 그의 앞을 막아서 욕설을 하도록 그녀를 부추겼을까? 그녀는 물론, 그녀의 아이까지 위험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혼란의 기색이 역력한 염비선에게 레본이 마침내 말했다.

"이제야 보이는 것입니까? 그가 놓아 이렇게 번진 큰 불이. 그의 위대한 깃발과 말발굽 소리가. 당신은 그가 정말 역사에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고, 거대한 흐름에 어떠한 변화도 주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보아 온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면서도?"

염비선은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표정하고, 비통하고, 적대적이었던 좀 전의 불운한 주민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오직 혁명군의 막사와 함성을 지르는 병사들의 모습만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혁명가 코르케우스가 서 있었다.

"너, 너는 망령이야! 꺼져라!"

배 위에서와 같이 그는 팔을 크게 휘저었지만, 코르케우스와 혁명군은 다가오고만 있었다.

코르케우스는 칼을 쳐들었다. 환상 속의 병사들이 창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레본과 창웅, 가흐렌과 여인의 형상이 나타났다. 곧 옴네스의 주민들이 나타났고, 이내 창을 쳐든 사람들은 점점 불어났다. 영웅 코르케우스가 놓은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너는 죽었고, 산 자인 내게 그 어떤 해도 가할 수 없다. 혁명은 실패했고, 이제는 나의 시대야....... 폭풍우가 불을 꺼뜨리리라........"

그는 침을 삼켰다.

사람들은 일어났고, 그들은 영웅이 놓은 불길과 같이 타오르며 코르케우스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들의 선두에 선 혼혈의 혁명가는 진정 영웅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고, 과연 그가 이룩한 일은 혁명이었다.

염비선은 마침내 칼로 레본을 겨누었다.

"네놈이 환상을 만들어 나를 속이려 한 것이로구나. 내가 이깟 술수에 속을 줄 알았더냐?"

"당신은 당신이 느낀 것을 보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가 어떤 일을 행했는지.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야! 네놈도, 코르케우스도, 창웅도, 가흐렌도, 모두 미친 것뿐이야. 그리고 코르케우스는 영웅이 아니야. 그래, 이것이었군. 미쳐버린 네놈들이 멋대로 그 괴물 놈을 영웅으로 추앙한 것뿐이었어. 흐하하, 레본, 현실을 직시해라! 넌 이제 목이 달아나게 생겼다고!"

레본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습니다. 이제 내 명이 다한다 해도 아쉬울 것은 없지요. 코르케우스가 놓은 불에 작은 힘을 보탰다는 것에 나는 자부심을 느낍니다. 자, 목을 칠 테면 치십시오."

"후회하지 않는 것인가? 정말로?"

"몇 번을 말씀드리지만, 후회 따윈 없습니다."

줄줄 흐르는 땀을 억제하지 못한 염비선은 당황하여 레본을 내려다보았다. 사방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코르케우스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모두 환상이야! 잠시 미쳐버린 것뿐이다! 이제 네놈을 죽이고 모든 것을 되돌려 놓겠다!"

염비선은 칼을 들어올렸다.

레본은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혁명입니다, 코르케우스여.'

광기의 가운데에서 레본은 조용히 눈을 감았고, 염비선의 칼날이 번뜩였다.

남쪽 사람들에게는 폭풍우가, 북쪽 사람들에게는 눈보라가 닥친 와중에도 태양은 한 줄기 비추었다. 혁명의 깃발과 말발굽 소리가 세계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코르케우스는 죽지 않았고, 혁명의 불길은 당겨졌다.


Comment ' 5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23:33
    No. 1

    ..아...뭐랄까. 제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너무 내려 앉아서 보기가 힘듭니다. 감정이입이 안 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20:12
    No. 2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6 21:44
    No. 3

    잘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9 22:57
    No. 4

    그렇죠, 큰 불은 쉽게 꺼지지 않는 법이죠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0 16:30
    No. 5

    뭔가 혁명이라는 느낌을 아주 잘 살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뭔가 아주~약간 모자란 느낌이 드는데...
    그게 뭔지는 저도 모르겠군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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