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단편제

설명



불면증insomnia

작성자
익명
작성
10.03.20 20:49
조회
2,388

0.  

세상이 이렇게 희뿌연 안개에 가득 차서, 흔들거리고 가늘게 녹아나 곧 사라질 듯 비틀거릴 때면... 난 의문을 품게 돼. 늦은 밤까지 술잔을 쥐고 눈물 어린 눈으로 잠들게 해 달라고 중얼거렸던 너, 그런 너의 불면증이 어느 새 내게 옮아온 것은 아닌지.  

1.  

회색 안개가 깔렸다. 이 도시의 명물이자 특징이자 정체성인 회색 안개의 냄새는 연기와 습기의 진득함을 가지고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에 부딪치는 빗줄기가 하염없는 동그라미만 그려댔다. 동그라미에 천천히 번져가는 붉은 핏줄기는 금세 오리오리 풀어져, 녹아들 듯 사라졌다. 물 웅덩이 쪽으로 스며드는 핏물은 점차 많아졌다. 웅덩이가 투명한 빨강으로 변할 때까지 흘러드는 피의 양은 줄어들지 않았다.  

남자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스산한 교회의 풍경도, 현재의 그의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도 화약 냄새가 가시지 않은 총구에선 가는 연기가 올라왔다. 분명히 비싼 물건인, 남자가 입고 있는 검은 가죽 코트엔 피와 빗물이 가득 배어 번들거렸다. 여자가 선물로 준 가죽 코트였다.  

그 때, 그 여자가 어떤 표정으로 내게 무슨 말을 건넸더라. 아아, 그래. 콧등을 살짝 찡그리며, 입가엔 시큰둥한 미소를 띄고 이렇게 말했었지.  

- 비싼 거니까 아껴가며 입으라고. 한 번 입을 때마다 큰절도 몇 번씩 해 주고. 가죽 재질이니까 술 같은 거 묻히고 돌아다니지 마.  

참 우습지? 지금 이 가죽 코트를 더럽힌 것은, 당신의 피잖아. 어때, 이 지독한 역설이? 만약 당신이 살아 있었더라면, 심술궂은 미소만 지을 줄 알던 그 빨간 입술에 담배 한 가치를 물었겠지. 이마를 가리는 금발을 쓸어올리며, 파란 눈동자로 날 노려보듯 올려보았을 거야. 그래, 참 재밌는 역설이다 개자식아. 이러면서 말야.  

아, 근데. 당신의 이름이 뭐였더라? 이젠 그것조차 기억나지 않아. 한때는 꽤 사랑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사람의 감정이란 참 얄팍한 거지. 단지 한 방, 한 방의 총알이었는데, 그 총알 하나로 모든 감정이 산산히 부서진 듯한 기분이 들어. 사람이란 원래 이런 거야. 실망스러워? 하긴- 나도 조금 실망스럽네. 목숨이란 게, 총알 하나로도 쉽게 날아갈 종류의 것이었을 줄이야. 이리도 가벼운 것이었더라면, 조금은 더 쓸모있게 써볼 수도 있었을 텐데.

- 응......... 잠들게 해 줘.

그래서 잠들게 해 줬어. 그러니까, 더 이상 나를 그 눈으로 바라보지 마. 마약이랑 수면제를 잔뜩 처먹고 게슴츠레한 눈동자를 보이기엔, 당신의 그 파란 눈동자는 꽤나 투명했잖아. 잠들지 못하는 게 두려워, 매일 찾아오는 현실의 악몽이 무서워, 잠 속으로 도망치고 싶은데 잠이 오지 않아, 라고 말하면서 품을 파고들 땐 그래..... 나도 당신을 조금은 동정했던 것 같아. 동정인지 애정인지 그때의 내가 가졌던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니까, 싸구려 감정 따윈 필요 없어! 라고 말하지는 말라고.  

하긴- 나 자신이 싸구려 인생을 살았으니까. 구겨진 담뱃갑보다도 더 가치없는 인생이란 바로 나를 말한 것 아닐까. 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야. 당신도 참 쓰레기같은 인생을 살았지.

뭐어, 이렇던 저렇던 지금은 상관 없나.

남자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당신은 이미 뒈졌고 말야, 나도,

남자의 총구가 자신의 머리를 향했다.

곧 뒈져줄 테니까.

타앙-!

먼 길 가는 당신이 외로워할까봐 따라가주는 거니까, 고맙게 생각하라고.  

2.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고운 얼굴이 짜증으로 인해 흉하게 일그러졌다. 새하얀 나신의 여인이, 침대에 길게 늘어진 채 한쪽 손만 들어 흔들거렸다. 잘 손질하면 분명 우아해 보일 여인의 화사한 금발도, 난장판인 침실의 어둠침침한 조명 아래에서는 싸구려 창녀의 것처럼 천박해 보였다. 뭐, 그렇다 해서 그녀가 창녀가 아닌 건 아니었지만. 게다가 마약도 하고, 주당에, 아무튼 인생 막장이란 그녀를 지칭하는 단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빠르게 살폈다. 짙은 멍이 하얀 몸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헤실헤실 미소 짓고 있는 얼굴도 여기저기 부어 있는 걸로 보아선, 취향이 좀 과격하신 손님을 하나 받았나 보다.

그리고, 그녀가 빚 대신 주기적으로 받는 '과격한 손님'은, 딱 하나다.  

어쨌거나 그녀는 이 유곽에서 가장 예쁜 여자였으니까.

"뭡니까, 당신."

"아아. 왔어?"

"또 술에 마약 타 처 드셨군요. 당신, 보스한테 갚을 것도 한참 남았을 텐데 그따위로 마약해도 되는 겁니까? 돈이 썩어나나 보죠? 그래놓고 또 끌려가서 뒈지게 얻어터질 텐데요. 요즘 당신 손님도 안 받는 것 같은데, 도대체 빚은 언제 갚으시려고?"

"카말렌은 잔소리쟁이이이-. 인기인이라 이거지이-?"

여인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자는 버릇처럼 인상을 쓰고는, 인사불성이 된 그녀의 팔을 잡아 거칠게 일으켰다. 손님 앞에서는 늘 화사한 미소를 지을 자신이 있는데, 어째 이 여자가 옆에 있을 때면 늘 짜증이 나곤 한다. 남자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인기인인지 아닌지는 그쪽이 더 잘 알 테고. 보스한테 이번달까지 갚아야 하는 거, 내가 반은 냈으니까 나머지는 당신이 어떻게 잘 해 봐요."

"꺄아아, 도와준 거야아-?"

여자가 나지막히 킥킥대는 소리를 냈다.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그녀가, 남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파란 눈동자엔 헤픈 웃음이 담겼다.

"이런, 고마워라. 근데 이번 달은 안 내도 되는데...... 나, 왜 옷도 제대로 안 입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뭐 뻔한 거 아닙니까?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요."

"오늘, 보스한테 좀 대 줬거든. 여자 몸이란 건 참 편한 거야."

"그거, 다달히 있는 행사 아닙니까? 궁금하지 않다고 했잖아요."

도대체.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신경을 끄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저 여자는 도대체 한순간이라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왜일까.... 라고 머리를 굴리던 남자는, 결국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다시 삼켰다. 이유는 알고 있다. 다만 인정하기 싫을 뿐이다.

저 여자는, 이 유곽에서 그를 낳고 마약에 취해 바싹 말라 죽어갔던 그의 어머니와 무척 닮았다. 어머니와 똑같은 금발과 파란 눈동자까지. 그의 어머니가 가졌던 눈동자는 청록색에 가까웠고, 그 눈은 그가 물려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는 저 여자를 볼 때마다, 어머니의 최후가 생각나 그대로 놓아둘 수가 없었다.

신경을 끄기엔 왠지 거슬리는 여자다. 어지간히 피곤한 여자.

남자는 그녀를 외면하고 자신의 코트를 집어들었다. 이 유곽에서 가장 인기있는 남창이 입고 다니는 코트라고 보기엔, 다소 낡아 있었다. 그러나 외모가 받쳐줘서일까, 다소 허름해 보이는 그 코트는 남자가 대충 몸에 그 옷을 꿰자마자 꽤나 그럴듯해 보였다. 일부러 관리도 안 하고, 시간에 일부러 노출시킨 듯한 분위기.

남자는 아름다웠다.

퇴폐적이고, 유혹적이며, 더럽혀진 아름다움이었다.

남창이 가지고 있을 아름다움으로는 최상이었고, 여러 귀부인들의 하룻밤 상대로는 더할나위 없이 안성맞춤이었지만....

순결한 결혼의 상대로는, 어느 누구도 택하지 않을 법한 악취나는 아름다움.

그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유곽의 분위기가 깊게 몸에 배인 탓이다.

여자가 다시 침대에 웅크려 누우며, 주변에 흩어진 옷가지를 그러모았다. 남자는 여자를 힐끗 돌아보았을 뿐 별 말을 꺼내진 않았다. 여자는 입술을 모으며 작게 웅얼거렸다.

"....좋은 옷을 입고 다녔으면 좋겠어."

"그쪽이 신경쓰실 일이 아닙니다만."

"내가 하나 사 줄까?"

여자가 고개를 길게 빼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파란 눈동자는 이미 새 코트를 상상하고 있는 듯했다. 심히 부담스러운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피하며, 남자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 끄십시오. 어차피 그쪽이 사 주지 않으셔도, 코트 하나 정도는 살 수 있는 능력은 있습니다."

"그럼, 어째서 사지 않는 거야-?"

"그야...."

무심코 대답하려던 남자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여자의 빚을 갚아 주기 위해 돈을 따로 모으고 있다는 소리를, 저도 모르게 내뱉을 뻔했다.

당신은 나의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빚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새 인생을 찾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그러지 못했지만, 당신은 그런 인생을 쥐었으면 합니다.

달칵, 소리를 내며 나무문이 닫혔다. 여자는 닫힌 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어째서 내게 그렇게 잘해 줘? 늘 묻고 싶었지만, 한 번쯤은 진지하게, 그의 짙은 보랏빛 눈을 바라보며 왜 내게 이렇게 잘해 주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무서우니까.  

그가 나를 왜 이렇게 잘 돌봐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도움마저 없다면 난 보스의 손에서 녹진하게 녹아나다가 언젠가 학대의 끝에서 죽고 말겠지.  

어렸을 때부터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유곽에 팔려왔고, 수없는 남자들을 상대하며 아무리 돈을 벌어도 태생부터 지워진 빚에선 놓여나질 못한다. 인생을 저주하며 자포자기로 시작한 마약은 그녀 자체를 좀먹어 들어가, 이젠 마약이 없인 단 한 순간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다. 마약을 하면서부터 생긴 불면증은 그녀를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잠과 현실의 경계에서 흐느적거리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일부러 그의 앞에서 생각없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도 가끔은 무척 미안하다.

난 참 우스운 여자야. 그녀는 자조하고는, 아까 찾아 둔 옷가지를 입기 시작했다. 나들나들하게 실이 끊어질 것 같은 검은 팬티와 브래지어를 끼워 입고, 낡은 원피스를 걸쳤다. 어깨의 검은 브래지어 끈이 선명하게 비치는, 얇고 허름한 원피스였다. 그녀는 입술을 비죽하게 내밀며, 자신이 입은 옷가지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새 코트를 사 주고 싶다.

그 자리에 선 채 멍하니, 그렇게 생각했다.

잠시 후 그녀는 살금살금 밖으로 걸어나갔다. 유곽의 어깨들에게 들킬까 어깨를 가볍게 움츠리며 걷는 그녀에겐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3.

남자는 얼굴에 길게 흉터가 남은 보스의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통칭 보스, 라고 불리우는 이 자의 이름조차 남자는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어머니가 소속되었었고 현재 여자와 자신이 소속된 이 유곽의 주인이며, 그들에게 벗어날 수 없는 빚을 지우고 그 빚을 갚으라 윽박지르는 사람인 것만을 남자는 알고 있었다.  

왼뺨에서 턱까지 길게 흉터가 진 자리를 버릇처럼 매만진 보스는, 남자가 내민 은화 주머니를 들여다보았다. 쯧, 하는 소리와 함께 불쾌하다는 양 보스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모자라잖냐? 저 여자, 밖에 내보내고 싶다며."

"....그럴 리가 없습니다만. 전에 말씀하셨을 땐 분명 56실버라고.."

"에에이, 이 개자식아! 이자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 거냐!?"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나가떨어졌다. 거대한 주먹으로 남자의 하얀 뺨을 가격한 보스는, 입술을 실룩이며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흉터의 하얀 자리가 어둠 속에서도 도드라지게 보였다. 보스는 턱짓을 하며, 문을 가리켰다.

"나가, 새꺄! 저 여자 내보내고 싶으면 돈을 더 가져오라고!"

".....얼마나...?"

"이자 포함, 3골드 80실버!"

.....3골드, 80실버? 남자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갔다. 원금 자체를 훨씬 상회하는 금액인데다가, 일반 평민이 거의 1년을 벌어야 1골드라도 만져볼까 말까 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자라는 말 자체가 그저 핑계였던 것이다. 너희들은 절대로 이 유곽에서 놓여날 수 없어. 보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자는 혀로 입 안을 훑어보고는, 안의 살갗이 다 터진 것을 알았다. 입 안에 가득 괴인 피 섞인 침을 퉤, 하고 뱉어난 남자는, 지친 얼굴로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항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어차피, 그렇게 사육된 존재였으니까. 힘없이 어깨를 떨어뜨리고 문을 밀어 여는 남자의 등 뒤에 대고, 보스는 큰 소리로 외쳤다.

"3골드 80실버야! 잊지 말라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문을 닫았다.

4.

남자는 빠르게 걸었다. 걸으면서, 점점 이 부조리가 미칠 듯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운명이 정해준 길목 바깥으로는 절대 나갈 수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남자의 하얀 이마에 파란 힘줄이 돋았다. 마구 소리를 지르며 주변의 집기들을 때려부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다스리며, 남자는 자리에 멈췄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낡은 판잣집 중 가장 작은 판잣집 앞에 멈춘 그는, 심호흡을 하며 문을 열었다.

여자가 있었다. 고급스런 검은 가죽 코트를 손에 쥐고, 다소 시큰둥한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콧등엔 미소로 인해 작은 주름이 져 있다. 그녀의 그 표정과 그녀가 손에 든 코트 모두가 남자에겐 너무나 생경했기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멍한 얼굴을 했다.

"비싼 거니까 아껴가며 입으라고. 한 번 입을 때마다 큰절도 몇 번씩 해 주고. 가죽 재질이니까 술 같은 거 묻히고 돌아다니지 마."  

"....도대체, 무슨 돈으로 그걸...?"

"그런 거 묻지 말고. 지금껏 나한테 잘해줬으니까 한 번쯤은 선심써도 되잖아?"

여자는 웃음을 지었다. 술과 마약에 찌들어있지 않을 때의 그녀는, 해맑기는커녕 시큰둥하기만 하다. 그리고 오늘은 마약에 손을 대지 않은 듯, 그녀가 행복한 부유감에 젖어 있다는 증거인 멍한 기색이 없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충동적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했다.

"도망쳐요, 우리."

"...어?"

"도망치자구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망칠 수 있을 리가..."

그 순간, 남자는 두 눈을 꽉 감고 소리를 질렀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이 운명에 도망치려는 시도라도 해 봐야 할 거 아닙니까!"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의 파란 눈동자에 첫 번째로 떠오른 감정은 의아함이었다. 그것은 경악으로 변하더니, 단단한 결심으로 허물을 벗었다.

"좋아."

".........."

여자가 정말로 승낙할 줄은 몰랐던 남자가 당황한 눈동자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짙은 금발 새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입술이 또박또박 말을 뱉어냈다.

"도망치자."

5.

둘은 도망쳤다. 도망쳐봤자 그들의 삶은 바뀌지 않을 것임을 알았어도 도망쳤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했느냐, 고 묻는다면 분명 대답할 수 없으리라고 남자는 자조했다. 그럼에도 그들을 이끌었던 건 충동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그 기분, 그것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도시 밖으로 탈출하고 싶었다. 이 퇴폐적이고 음산한 이 곳, 늘상 안개가 자욱이 끼고 손을 내밀어도 구원을 말하는 자 하나 없는 이 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것이 한낱 꿈일 뿐이라도 그 꿈을 꾸는 순간에는 행복할 것이라 믿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달렸다. 앞길은 묘연하고 온통 뒤얽혀 있는 미로 같은 이 곳에서 탈출하고자, 아니 그들이 탈출하고 있다는 생각이라도 하고자, 그들은 달렸다. 달리고 달려서 마침내 도달할 곳이 어디일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실은 상관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꿈이라는 것을 아니까 상관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기뻤다. 그들을 얽어매는 사슬이 사라졌다는 게. 숨이 턱에 닿도록 도망치고 어깨들의 눈을 피하여 구석진 골목에서 새우잠을 청해도 기뻤다. 처음으로 닿아 본, 두려움과 함께 온 자유란 것이 이리도 짜릿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힘들어도 좋았고 견딜 수 없을 만치 고통스러워도 좋았다. 그는 행복했다.

하지만 여자는 그렇지 못했다.

처음 도망칠 때 갖고 왔던 마약은 금세 동났다. 금단증세에 시달리는 여자는 환각을 보았다. 그들을 찾아다니는 어깨들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들킬까 우려되는 마음으로 발악하고자 하는 욕망을 최대한 억누르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금단증세는 끔찍했다. 여자는 손톱을 물어뜯고 손발을 덜덜 떨었다. 푸른 눈동자는 그 빛을 잃었다. 숨조차 쉬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지독한 불면증이 이어졌고, 잠은커녕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했다.

그리고 결말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들은 낡은 교회로 찾아들었다. 교회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황량한 곳이었지만,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십자가가 그 곳이 원래는 교회였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남자는 비틀대는 걸음으로 여자를 끌고 들어왔다. 여자는 아예 정신을 놓은 듯, 그의 품 안에 안겨서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교회 안에 을씨년스럽게 놓인 기다란 의자 위에 그들은 아무렇게나 몸을 던졌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인해 그들은 흠뻑 젖어 있었다. 비릿한 비 냄새가 풍겼다.

여자는 남자의 품에 안긴 채 버르적거렸다. 그 움직임이 벌레 같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혐오감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여자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에는 변함없었지만, 그녀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대상은 바뀌었다. 처음에는 보스를 위시한 조직들에게서 그녀를 보호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는,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금단증상에서 그녀를 빼내고 싶었다.

그녀의 불면증을 없애주고 싶었다.

잠들게, 해 주고 싶었다.  

"나의 어머니는, 솔직히 말해 인간 쓰레기였죠.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어떠한 행복도 맛보지 못하고 자신의 몸 위에 수없이 거쳐갔던 셀 수 없는 남자들의 씨 하나를 받아 나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런 내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길 바랬어요. 그렇지만 어머니는 결국 벗어날 수 없었고, 그 삶 끝에서 아등바등하던 그 분을 바라보던 내 생각은 점차 그 분의 삶을 끝내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왜 그렇게 처절한 삶을 이어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남자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조근조근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연인을 대하는 양 달콤하고 다정했다. 그가 상대하던 손님들을 대할 때도 저런 목소리를 내 본 적이 없던 그는 여자의 금발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하지만 내 어머니는 내 손으로 그 삶을 끝내주지 못했어요. 그렇기에 내 어머니와 닮은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로 잠들기를 바랍니까? 당신의 불면증에서 벗어나고 싶습니까?"  

여자는 멍한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던지, 처음엔 그녀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독한 금단증상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생각을 이어나갔다. 내 불면증에서 벗어나고 싶냐고?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해사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왜 당연한 것을 묻는 거야? 카말렌도 참, 짓궂긴.

"응......... 잠들게 해 줘."

남자는 여자의 파란 눈동자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음울한 하늘과는 달리 맑게 개어 있었다. 그 안에 굴곡져 비치는 자신을 응시했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삶에 지쳐 때묻은 남자가 거기 있었다. 남자는 교회의 안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나무로 만든 낡은 제단과 먼지가 뽀얗게 얹힌 촛대, 그리고 벽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남자는 입술을 비틀었다. 아, 그렇지. 이 곳은 교회였어.

"그럼 나와요."

"왜?"

"이 곳은 교회 안이니까요. 빌어먹을 신 앞에서 당신이 잠드는 모습 따위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신은 정말 엿 같았으니까요. 개처럼 비참하게 잠드는 모습을 저 십자가 앞에서 만들어내긴 싫으니."

남자는 여자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온 몸에 힘이라곤 한 올도 없는 여자는 비틀거리며 남자의 손 끝에 제 몸을 맡겼다. 교회의 육중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잔뜩 찌푸린 날씨와 진득하게 몸을 감싸는 습기가 그들을 반겼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는 전혀 시원스럽지 않다. 말라 비틀어진 검은 나무는 회색 하늘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남자는 권총을 뽑아들었다. 손 안에 뿌듯이 쥐이는 묵직한 쇳덩어리를 바라보며 남자는 싱긋 웃었다. 생명의 무게란 총알보다도 가벼운 것이 될 줄, 이 총을 개발한 자는 알고 있었을까나?

남자는 다정한 웃음으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잘 자요."

-타앙!

단 한 발의 총소리였다. 여자는 멈칫 몸을 굳히더니, 힘이 풀리는 사지를 인형처럼 바닥에 늘어뜨렸다. 내리는 비로 인해 만들어진 물웅덩이 위를 힘없이 꺾이는 무릎이 덮쳤다. 털썩, 소리가 났다. 관자놀이를 정확히 관통한 구멍 안에서 쉴새없이 핏물이 흘러나왔다. 눈물처럼 진득하게, 쉴 새 없이, 흐르고 흘렀다. 물웅덩이에 핏물이 섞여들었다. 붉은 물 안으로 얼비치는 하늘이 스산했다. 남자는 키득키득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총소리가 울렸다.

첨벙, 하고 남자의 몸이 물웅덩이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남자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여자의 해사한 얼굴이었다.  

6.

아아, 그러고 보니 이제야 느낀 건데........

난 당신의 불면증과, 불면증이 만들어내는 현실과 꿈의 경계와, 지친 현실 속에서도 늘 해맑게 웃었던 당신 때문에 미칠 것 같은 기분에 시달리곤 했었어.

왜 난 당신을 쐈을까? 단순히 미쳐가는 여자의 헛소리라고 치부하면 그만이었을 것을, 이리도 간단하게 당신의 생명을 거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해.  

당신이 미쳐 날뛰는 꼬라지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근데 그것보다 더 웃긴 거 하나 알려줄까?

당신의 발악에 매혹되고, 같이 미쳐버리고 싶은 나 자신이 싫었어.

하하, 미안하군. 나의 혐오감에 당신을 희생시켜 버린 것에 대해서.

그래, 당신의 이름은 에일린이었지?

이제야 기억났네. 하지만 내게 있어, 당신은 언제나 지독한 불면증과 같은 존재였어. 끊임없이 날 피곤하게 하지만 떼어낼 수는 없는 존재. 어느 새 나의 일부를 차지하고 내가 여기에 있노라며 싱그레 웃는 그런 여자.

7.  

댕그렁, 댕그렁, 댕그렁, 종소리가 길게길게 퍼져나갔다. 낡은 교회의 다 삭아빠진 나무 십자가가 위태롭게 삐걱거렸다. 비가 천천히 그쳤다. 바싹 마른 잡초와 옹이져 길게 뻗은 딱딱한 나뭇가지 사이에 놓인 작은 교회는 황량했다. 그 교회 앞에 나란히 쓰러진 두 남녀는, 꼭 그만큼 황량해 보였다.

8.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회색 안개는 주변을 가득 메운 채였다. 연기와 습기 냄새 사이로, 채 사그라들지 못한 엷은 피 냄새가 섞여들었다. 뒤늦게 도착한 유곽의 어깨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발 끝으로 두 시체를 툭툭 쳐 굴려 보았지만, 정확히 머리를 관통당한 두 시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에이, 씨. 보스가 뭐라 갈구겠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이 년놈들한테 퍼부어놓은 돈이 얼만데. 특히 이 남자놈, 이름이 카말렌이라 했나? 이 새끼는 유곽 수입의 거의 1할은 벌어온다고, 보스가 꼭 살려서 곱게 잡아 오라고 했는데. 시팔, 이렇게 뒤져버리고."

"아아 인생 참 좆같다- 그쟈?"

입 안으로 몇 마디 욕을 씹어 굴리던 남자들은 그 자리를 떠났다. 두 시신은 발 끝에 굴려진 그 불편한 자세로, 그대로, 숨을 멈추고, 가만히 그 자리를 지켰다.

어느 죽음이 있었다.


Comment ' 7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2 20:21
    No. 1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13:30
    No. 2

    몸 파는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군요? 반전... 화자와 시점이 바뀌면서 약간 복잡한데 나름 괜찮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3 23:33
    No. 3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7 08:51
    No. 4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9 22:15
    No. 5

    밤늦도록 잠 못 자는 거 정말 끔찍하죠?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0 15:35
    No. 6

    으음 뭘 말하려고 하는지는 알겠는데...
    이 쪽이 제취향이 아니라서 그런지 잘 와닿지가 않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1.08.12 22:40
    No. 7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단편제 게시판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제2회 단편제, 응모요강 및 기간 심사방법 등... +20 익명 10.03.08 6,995
61 단편 --- 이 구분선 위가 본선 진출작들입니다. +6 익명 10.04.03 8,039
60 단편 점수 주기 및 기타 테스트용 +33 익명 10.03.21 6,708
59 단편 묵혈귀마대(墨血鬼馬隊) +22 익명 10.03.20 7,318
58 단편 수중몽(水中夢) +14 익명 10.03.20 6,454
57 단편 나는 '저거'였다 +36 익명 10.03.20 7,042
56 단편 아롱지는 피아노 소리 +12 익명 10.03.20 2,269
55 단편 (가제) 단편제 참가작 # 88 +12 익명 10.03.20 2,390
54 단편 두 개의 샬레 +9 익명 10.03.20 2,271
53 단편 블러디 에이스 +10 익명 10.03.20 2,299
52 단편 대지에 내리는 비 +7 익명 10.03.20 2,231
51 단편 Play The Game +9 익명 10.03.20 2,175
50 단편 인류를 찌르는 창. +9 익명 10.03.20 2,430
49 단편 그녀는 죽음을 염원한다 +6 익명 10.03.20 2,315
48 단편 그렇게, 너는 죽었다. +9 익명 10.03.20 2,330
47 단편 라스트 불렛(Last Bullet) - 장르 좀비 아포칼립스 +11 익명 10.03.20 2,337
46 단편 +8 익명 10.03.20 2,044
45 단편 혁명 +5 익명 10.03.20 2,369
» 단편 불면증insomnia +7 익명 10.03.20 2,388
43 단편 노트 +5 익명 10.03.20 2,212
42 단편 피의 강을 오르는 연어 떼 +6 익명 10.03.20 2,339
41 단편 (가제) 단편제 참가작 # 70 +6 익명 10.03.20 2,146
40 단편 (가제) 단편제 참가작 # 45 +7 익명 10.03.20 2,137
39 단편 - 환상 가족 - +7 익명 10.03.20 2,435
38 단편 바이의 추억 +11 익명 10.03.20 2,213
37 단편 결전전야 +5 익명 10.03.20 2,176
36 단편 wolf the rain +9 익명 10.03.20 995
35 단편 악마의 계약 +8 익명 10.03.20 1,115
34 단편 댄서와 장미꽃다발 +5 익명 10.03.20 1,090
33 단편 약왕 +4 익명 10.03.20 967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genre @title
> @subjec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