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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제

설명



댄서와 장미꽃다발

작성자
익명
작성
10.03.20 13:33
조회
1,153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댄서입니다. 오랜 시간 춤을 추고 피곤해져서 잠시 쉬고 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내 침대를 내어주고, 옆에 앉아 쭉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얀 피부, 굽슬거리는 검은 고수머리, 달큰한 숨소리, 부드럽게 미소 지은 입술. 그녀는 몹시 사랑스럽습니다.

나는 그녀의 연인입니다. 그녀는 나의 연인입니다. 5년 전부터 그래왔었지요. 하지만 그녀가 서커스단의 댄서이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적습니다. 내 곁에 잡아두고 싶지만 차마 용기가 나질 않아-. 그래서 계속 그녀를 떠나보내기만 했습니다. 그녀가 돌아올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요. 오늘은 왠지 무리해서라도 그녀를 붙잡아 두고 싶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해가 떠올라 그녀가 눈을 뜨면, 내 맘을 고백할 겁니다.

나와 같이 있어 달라고. 떠나지 말아주라고. 거절의 말은 두렵지 않습니다. 이미 그녀의 마음을 확인했으니까요. 그녀는 나와 함께 있어줄 겁니다. 그래요, 이제 우린 계속 함께 할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어느 날, 그녀와 처음 만났습니다. 알록달록한 마차가 이 작은 도시에 들어왔지요. 사실 서커스단을 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대도시에 나가서 더 큰 규모의 서커스도 구경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서커스단은 특별했습니다.

그녀가 있었으니까요.

그녀는 마차 지붕에 올라 앉아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은 뒤돌아보게 만드는 매력. 사람을 잡아 이끄는 공기가 그녀의 주변에 흘렀습니다.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의 머리에 매여 있던 붉은 리본이 바람에 날려 떨어졌습니다. 그녀는 리본이 풀린 줄도 모르고 노래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마차는 점점 멀어졌지요. 마차가 안 보이게 되고 나서야 땅에 떨어진 리본을 보았습니다.

붉은 리본. 나중에 돌려줘야지, 하며 리본을 갈무리 했었죠.

다행이도 서커스단은 우리 집 가까이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녀를 만나고 저녁이 될 때까지 서커스단 천막과 리본을 번갈아 보았습니다. 다른 일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책을 펼쳐 놓긴 했었지만 결국 한 줄도 제대로 못 읽었습니다.

마침내 저녁이 되어서 그녀를 만나러 갔을 땐 정신이 혼미했습니다. 무대 위의 그녀는 너무도 멀어 보여서 닿지 못 할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두려웠습니다. 품속의 리본을 전해 주지 못 할 것만 같았어요. 그랬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습니다. 피에로가 다가와 물어 보더군요.

“여기서 뭐 하십니까, 손님?”

전 리본을 꺼냈습니다. 전해 줘야 할 사람에게 전해주지 못 했다며. 피에로는 리본을 보곤 씩 웃었습니다.

“그럼 제가 전해 드리죠. 따로 전할 말이 있습니까?”

말이 나오질 않아서 잠깐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러다 아무 말이나 뱉는다는 게

“춤이 멋있었다고......”

고작 한 마디 말한 게 전부였습니다. 헌데 피에로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휑하니 가버렸습니다. 저는 한참을 더 멍하니 앉아 있다 집에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신께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간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아서 밖에 나갔습니다. 아침 산보라도 할 요량이었지요. 현관을 나선 순간,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습니다.

탐스럽게 핀 붉은 장미꽃들을 보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 붉은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옅은 미소를 지은 그녀.

짙은 장미향 때문인지 머리는 어찔어찔해지고 혀가 타들어갔습니다.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했고, 개구리가 핥는 것처럼 서늘하고 저릿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내 쪽을 돌아보았고-가슴팍을 망치로 얻어맞았는지 먹먹해졌습니다.

“이 장미가 참 예뻐서 나도 모르게 들어와 버렸네. 미안.”

나의 귀가 멀었습니다.

그녀가 날 걱정스런 눈길로 보았습니다. 그녀의 눈은 맑고 깊은 호수입니다.

나의 눈이 멀었습니다.

그녀가 내 이마를 만졌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긋한 향을 맡은 순간, 코마저 기능을 멈췄습니다.

느껴지는 건 빨라진 고동소리와 아득함 뿐. 그 무엇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녀가 몹시 좋다는 것. 삼류 소설에나 나오듯이 첫눈에 반했다는 것.

아득한 침묵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여전히 내 앞에 서 있었습니다. 내 입이 멋대로 움직였습니다.

“좋아해요.”

내가.

내가.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너무도 후회스러워서 나는 나를 잡아 뜯었습니다. 얼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이 되어서, 수증기가 되어서 사라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처한 그녀 앞에서 멀뚱히 서 있지 않아도 될 텐데. 차라리 사라져버렸으면!

아직 닫히지 않은 현관문이 떠올랐습니다. 뒤돌아서서, 집으로 도망치려 했습니다.

“어딜 가는 거야?”

신이시여, 귀가 멀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좋아한다고 했었지?”

아아. 제발. 제발.

“나랑 사귀지 않을래?”

내가 뭘 들은 걸까요. 목소리가 종소리가 되어 울립니다. 다시 한 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았습니다. 바로 옆에서 숨을 쉬고 있는 그녀가 진짜인지 헷갈려서 어지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확인하기 위해 꺾었습니다. 가시에 손이 베이는 아픔도, 방울져 떨어지는 핏방울도 어딘가 먼 나라의 얘기만 같았습니다.

그녀의 머리에 장미를 꽂아주는 순간에야 현실이 되었습니다. 감자기 밀려들어오는 아픔, 꽃냄새, 산들바람의 촉감, 지저귀는 새소리, 사람들의 소리......

그렇게 우린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기적처럼, 꿈속의 일처럼.

그 후 5년간 우리는 멀고도 가까웠습니다. 그녀가 이 마을을 떠나 있는 동안, 나는 그녀에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부쳤습니다. 그녀는 몰아서 답장을 해주곤 했구요. 어떤 때는 아무 말도 없이 말린 꽃잎을 넣어 답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편지가 수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걸 전해 주었죠.

그녀는 점점 유명해졌습니다. 멀리서 실려 오는 소식을 들으며 그녀를 더듬어보곤 했지요. 나에 대한 소식도 종종 그녀에게로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가슴의 허전함을 메울 순 없었습니다. 내게는 그녀의 곁이 제일 행복했습니다.

일 년에 일주일. 나는 그 일주일만을, 장미가 탐스럽게 피는 일주일만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리고 어제 아침, 그녀는 일 년 만에 돌아와 줬습니다. 그녀는 처음 만나던 날처럼 마차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붉은 리본을 매고. 젊은 곡예사와 나란히 앉아.

집에 돌아와 정원의 장미를 꺾었습니다. 공연이 끝나면 그녀에게 전해 줄 장미 꽃다발을 만들었습니다. 꽃다발을 만들면서도 마음의 파문은 가라앉질 않아 손이 자꾸만 떨렸습니다. 혹시나, 혹시나 그녀가 곡예사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닐까. 그건 아닐 거라고 주문처럼 계속 외웠습니다.

내 마음이 불안하거나 말거나 공연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녀와 함께 있던 곡예사도 나왔습니다. 그는 멋졌습니다. 날렵한 몸으로 아슬아슬한 묘기를 부릴 때마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장막 뒤에 있을 그녀만이 신경 쓰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순서가 되었을 때-.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 춤추지 않았습니다. 멋진 곡예사가 그녀의 파트너가 되었으니까요. 이토록 아름다운데,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춤인데 어째서 슬퍼지는 걸까.

그와 그녀의 눈빛이, 서로를 바라보는 다정한 눈빛이-익숙해서 질투가 났습니다. 그들이 춤추는 내내 나는 기이하게 비틀리어 소리 없이 발작하고, 경련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아무도 내 비명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녀마저도.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어느새 공연이 끝나 천막은 텅 비었습니다. 이젠 익숙한 얼굴이 된 피에로 씨가 물었습니다.

“여기서 뭐하고 있니?”

나는 말했습니다.

“꽃다발을 전해 줘야하는데......”

피에로 씨는 꽃다발을 받아 들었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내가 전해줄게.”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천막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찌됐든 꽃다발은 전해지겠죠. 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도 비명을 지르는 마음은.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비로 얼룩진 현실과 눈물로 얼룩진 몽상 사이에서 걸었습니다. 집으로도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곁에 돌아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없는 장소. 이제는 어디로 가야할까. 속옷까지 흠뻑 젖게 되도록 걷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눈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천막 앞에 와 있었습니다. 달콤한 말들이 작게 들려와서, 눈물이 나왔습니다. 살짝 벌려진 틈 사이로 매끈한 등이 보이고 그녀의 웃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와 그녀는 작고 예쁜 소리로 지저귀다 입을 맞췄습니다.

그래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 곡예사를 볼 때부터 짐작했던 겁니다. 마음 속 저 아래에서 속삭임이 올라왔습니다. 너는 그녀의 연인이 아냐. 될 수 없어. 알고 있잖아. 그녀와는 사이가 아주 좋은 친구 정도밖에 되지 않았잖아. 나는 발악했습니다. 그녀의 눈은 진심이었다고. 속삭임은 냉정했습니다. 네가 저 여자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았냐?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확신 할 수 있어?

지친 걸음을 옮겼습니다. 발은 아무데나 가 붙었습니다. 이대로 빗물이 되어 땅에 스며들었으면. 아무 감정도 생각도 없이 속 편하게 살 텐데. 조금 있으면 부서질 몸과 마음. 거친 풀밭을 헤메이는 망령. 외로운, 한없이 외로운.

“거기서 뭘 하니?”

조금씩 조각나 부유하던 나를 잡아 준 것은 피에로 씨였습니다. 피에로 씨가 들고 있는 등롱이 나를 비추자, 천천히 현실이 다가왔습니다. 빗물이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실연당했어요.”

요한은 5년 전에 알게 된 청년이다. 아무도 없는 공연장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소년. 꿈을 머금은 눈동자. 풋내기 댄서 카르밀라에게 반한 감수성 풍부한 아이.

5년이 흐른 지금은 많은 게 바뀌었다. 카르밀라는 유명한 댄서가, 요한은 주목받는 젊은 작가가 되었다. 두 사람의 사랑도 더 깊고 그윽해졌다.

하지만 오늘의 요한은 그 어느 때와도 달랐다. 창문 밖으로 던지면 곧바로 부서질, 금 간 도자기 인형이 되어 있었다.

“실연당했어요.”

전혀 의외의 말이었다. 자세한 사정을 듣기 위해 요한을 내 천막으로 데리고 갔다.

요한은 말을 자꾸만 더듬었다. 얼굴은 곧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잔뜩 흐려져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는 듣기 힘든 이야기를 힘들게, 아주 힘들게 풀어놓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야기를 하는 요한의 얼굴이 조금씩 평안해져갔다. 이내 이야기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땐 평소처럼 차분해졌다.

“이제 괜찮아? 아까는 정말 위험해 보였다고.”

“네. 다 털어 놓으니 괜찮아지네요.”

요한은 어설프게나마 웃었다. 그 웃음에 담긴 짙은 슬픔은 참으로 모순되었다. 요한이 다 식은 커피를 몇 모금 들이마셨다. 들릴 듯 말듯 옅은 한숨을 내뱉고는 질문을 던졌다.

“전 이제 뭘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요한은 시선을 공중에 두었다. 방향을 잃은 자들의 눈이다.

“글쎄요. 저도 느꼈어요. 그녀에겐 저보다 그 곡예사가 어울리는 걸요. 둘이서 춤을 출 땐 너무 잘 어울려서 부정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인정해야겠죠. 그게 사실이니까.”

요한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말을 이었다.

“최대한 기분 좋게, 아름답게 헤어질래요.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좋을 테니.”

말을 마치자마자,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밤중에 어딜 가려고?”

요한은 천막을 나가면서 등 뒤로 대답했다.

“장미를 꺾으러 가요.”

요한이 나가고 난 다음, 정확히 열을 셀 시간이 지났다. 카르밀라의 희고 가는 손이 천막 휘장을 젖혔다. 카르밀라 역시 얼굴이 밝지 않았다. 저승의 강을 건넜다 방금 돌아온 사람처럼 창백한 납빛이었다.

“오빠.” “방금 왔다 간 사람....요한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밀라는 붉어진 두 눈에서 눈물을 떨어뜨렸다. 결국은 울음소리가 커졌다. 카르밀라가 갈라진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요한이 뭐라고 한 거야? 날 욕했지? 그렇지?”

“아냐. 그러지 않았어. 너도 요한을 알잖니.”

카르밀라는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투둑, 하고 떨어졌다.

“나는 알고 있었어. 결국은 이렇게 되리란 걸. 하지만 두 사람 다 사랑했단 말이야. 두 명을 사랑하면 안 되는 거야? 이기적이지만, 그렇지만......”

나는 카르밀라의 등을 쓸어주었다.

“내일 요한과 이야기해 봐. 요한은 마음이 넓으니까 이해해 줄 거야.”

카르밀라는 울어서 살짝 부은 눈으로 날 보았다.

“정말 그래줄까?”

“그럼.”

이제야 카르밀라는 눈물을 멈추었다. 그녀는 몹시 지쳐 보였다. 나는 그녀를 부축해부며 말했다.

“자, 네 천막으로 돌아가자. 가서 쉬어야지. 내일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야 하잖니.”

그녀는 우리 극단의 간판스타. 손님들에게 부은 눈을 보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카르밀라는 얼음으로 눈을 찜질한 뒤 잠들었다.

피에로 씨의 천막을 나와 밤길을 걸었습니다. 불빛이 없어도 문제는 전혀 없었습니다. 행선지는 정해져 있었으니까요. 나의 정원. 그녀와 내가 처음 만난 장소. 언제나처럼 그 곳에 핀 장미들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단, 이번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크고 아름답게. 우리 둘이 헤어진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꽃다발을 말입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은 짧았습니다. 짙은 장미향이 감도는 정원에 정원가위를 들고 섰습니다. 하현달이라 달빛이 밝진 않았지만 일부러 등을 켜지 않았습니다. 가급적이면 달빛을 머금은 장미를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내 손으로 직접 피워낸 장미들은 아름다웠습니다. 올해에는 유난히도 송이가 크고 색이 선명해 몹시 아름다웠지요. 그녀가 기뻐하는 얼굴이 눈에 선했습니다. 조심스레 꽃을 따 모았습니다. 내 품에 들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서야 만족감이 들었지요.

달이 지기 전에 꽃다발을 만들었습니다. 한가운데에 가장 크고 화려한 송이를 놓고, 점점 작은 송이를 둘렀습니다. 하얀색 리본을 멋지게 매어주니 눈이 부셨습니다. 이정도면 그녀도 틀림없이 만족하겠지. 완성된 꽃다발을 하얀 천으로 덮어두고 잠에 들었습니다.

다음날은 놀랍게도 평온했습니다.

마음이 정리 되어서 그런 걸까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여느 때처럼 인사도 하고, 원고를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펜을 잡고 글을 쓰다 이따금 꽃다발을 보며 웃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해서 오늘이 안녕을 고하는 날이라고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점심이 지나고, 오후의 티타임이 지나고, 저녁 해가 저물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직 하늘에 아슬아슬 걸린 해를 보고 집을 나섰습니다. 다른 때보다 일찍 나선 편이었지요. 거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녀 말고도 작별인사를 고해야 할 단원들이 있었거든요.

천막을 돌면서 단원들과 눈을 마주치고 간단히 인사했습니다. 제법 친하게 지내던 동물들과도 악수했습니다. 모두 보이지 않게 포장한 꽃다발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이 꽃다발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것이니까요.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은 그녀가 되어야 합니다.

거의 모든 단원과 인사를 마쳤을 때, 피에로 씨가 나타났습니다. 피에로 씨는 괜찮으냐고 물었습니다. 괜찮다고 대답하자, 피에로 씨는 한적한 곳에서 얘기를 나누자고 제안했습니다. 피에로 씨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공연 시간까진 여유가 많았고, 오늘 이후로는 피에로 씨도 다시 보지 못 할 테니까요.

피에로 씨와 부드러운 풀밭 위에 앉았습니다. 저녁 바람은 그녀의 손길처럼 따뜻했습니다. 피에로 씨가 다시 물었습니다.

“정말 괜찮은 거야?”

괜찮잖아요. 절 보세요. 이렇게 웃고 있잖아요. 얼굴엔 눈물이 흐르고 있지만 웃고 있잖아요. 오늘 밤이 지나면 그녀와 헤어지겠지만, 다시는 못 만나겠지만. 그녀가 보기 두려워 지고, 정원에 심은 장미를 모조리 뽑아 버리겠지만. 그리하여 울타리엔 삭막한 덩굴만이 자라도록 내버려둘 테지만.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거짓말.”

피에로 씨가 내뱉은 단어 한 마디에 억누른 감정이 흘러 넘쳤습니다.

전 겁쟁이입니다. 매일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꼬리를 말죠.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현실도피주의자인 셈입니다. 그래요, 사실은 너무 슬펐습니다. 장미를 꺾으면서, 그것들을 다발로 만들면서, 리본을 매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지.

어젯밤 눈물을 많이 흘려 오늘은 증발된 줄 알았습니다. 아니에요, 사실은 그런 게 아닙니다. 겁쟁이 토끼처럼 굴속에 머릴 박고 있었던 겁니다. 자신을 속이면서, 현실에서 도망치면서. 마음이 아픈 것을 애써 부정하면서. 그녀와의 이별이 담담해진 것처럼 연기했던 겁니다.

속여 왔던 눈물이 흘렀습니다. 피에로 씨는 한심한 절 계속 보아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 참은 것만큼의 눈물을 흘리고 난 다음, 피에로 씨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녀가 춤을 출 때 가장 가까이에서 있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피에로 씨는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무대에 오를 단원들이 대기하는 장소. 거기에 있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느 때처럼 해가 진 하늘에 별이 떴습니다. 즐거운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지나갔습니다. 동물들의 묘기도. 광대들의 우스갯소리도. 아슬아슬한 곡예도. 피에로 씨의 외줄타기도. 마지막으로 그녀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오늘 그녀는 혼자 무대에 올라왔습니다. 어째선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꽃다발의 포장을 풀었습니다. 춤추는 동안 그녀가 이 꽃다발을 봐 주길 기대하며. 이윽고 그녀가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춤 솜씨는 오늘도 멋졌습니다. 다만 감정이 사라진 인형의 춤 같아 섬뜩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사뿐사뿐 춤추다 우연히 내 쪽을 보았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에 표정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날보고 기쁜 얼굴로 달려 왔습니다. 공연은 안중에서 사라진 걸까요. 내 가슴에서도 따뜻한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습니다. 나는 아직 사랑 받고 있던 겁니다. 세상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들리는 건 그녀가 날 향해 달려오는 발소리뿐.

그러나 너무 급하게 뛰었던지, 그녀는 그만 발을 접질렸습니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녀에게 집에 가서 쉬자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날 올려다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습니다. 허락의 뜻이 분명한 그 미소에,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졌습니다.

카르밀라는 아침부터 안절부절못해 했다. 어젯밤 요한의 일이나, 파트너였던 곡예사가 사라진 일 때문이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요한과 공연에 관한 걱정만 했다.

“그 사람 어디 간 걸까? 어젯밤 나대신 요한을 데리러 간다고 해 놓곤.......”

나는 보다 못해 카르밀라에게 말했다.

“곡예사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공연이 코앞에 닥쳤다고.”

“하지만, 하지만. 오빠.”

“무대에는 너 혼자 서도 되지 않나? 그 동안 파트너 없이도 잘 해왔었잖아.”

그건 확실한 사실이었다. 카르밀라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곡예사 덕에 춤의 질이 떨어져 있었다. 저녁이 되자, 카르밀라는 혼자서 춤추기로 마음먹고 분장실에 틀어박혔다.

하루 종일 카르밀라를 달래느라 피곤해진 나는 산보를 했다. 때마침 요한이 와 있었다. 그는 어제와 전혀 다른 얼굴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요한은 여린 사람이다. 실연의 아픔을 의연히 이겨낼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마디 말로 부추기자 눈물을 흘렸다. 그는 한바탕 울고 나서 내게 부탁을 했다.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었기에 들어주마고 승낙했다.

언제나처럼 공연이 시작되었다. 극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관객들이 환호하고, 점점 마지막 차례가 다가왔다.

내 다음이 카르밀라였다. 그녀는 언제나 클라이맥스를 맡고 있었다. 내가 출연자 대기석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이미 무대 위에 있었다. 요한은 반대편 출연자 대기석에 있었다. 그는 천천히 꽃다발의 포장을 풀었다.

그리고 난 보았다. 흰 천 뒤에 숨겨진 꽃다발. 붉은 장미들 가운데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곡예사. 네가 왜 거기 있는 거지? 소리 소문 없이 도망갔다던 네가, 왜 꽃다발이 되어 있지?

꽃다발 속에 핀 곡예사의 얼굴은 오직 세 사람만이 볼 수 있었다. 들고 있는 당사자인 요한과 그 반대편에 선 나. 그리고 무대 위의 카르밀라. 다른 사람들의 눈은 전부 무대로 향했다. 그 누구도 한 구석에 수줍게 서 있는 청년을, 섬뜩한 꽃다발을 보지 않았다.

내가 나서기도 전에, 카르밀라가 꽃다발을 보아버렸다. 그녀는 벌벌 떨며 스텝을 옮겼다. 그렇지 않아도 안 좋던 얼굴빛이 시체처럼 되어버렸다. 공포가 짓누르고 있을 텐데도 그녀의 춤은 멈추지 않았다. 카르밀라는 계속 춤추며 뒷걸음질 치다, 그만 허공을 밟았다.

그녀는 허공에서 까지도 춤추었다. 그러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추락했다. 높은 무대 위에서. 머리부터.

눈 깜짝할 새였다. 카르밀라는 한 순간에 져 버렸다. 뜻밖의 사고에 객석이 술렁였다. 요한은 달렸다. 그는 카르밀라의 껍데기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이젠 무표정한 얼굴을 쓰다듬고, 피가 타고 흐르는 머리칼에 입 맞췄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고 있었다. 카르밀라의 유해를 가져갈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카르밀라의 영원한 동반자는 자신이라고.

공연은 허둥지둥 막을 내렸다. 극단의 모든 단원이 요한을 위로했다. 그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요한은 지금쯤 방향을 잃은 미치광이 미소를 짓고 있을 터였다.

단원들은 요한에게 시신의 운구를 도와줄까 물었으나, 요한은 거절했다. 오직 나에게만 도움을 요청했다. 요한을 도와 카르밀라를 옮겼다.

요한의 집은 장미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생전에 장미를 좋아했던 카르밀라와 잘 어울리는 집이었다. 그녀는 장미향이 짙게 풍기는 침실에 뉘어졌다. 커다란 창문 너머, 만개한 장미들이 보였다. 그 중 두엇은 벌써 시들어 있었다. 침대에 누운 그녀처럼.

요한이 나를 바래다주며 밝게 웃었다. 이제부터 카르밀라와 같이 살 거라고. 그녀가 눈을 뜨면 청혼할 거라고. 그 때 요한의 눈은 어릴 적으로 돌아갔다. 사랑에 빠진 순수한 소년의 눈. 처음으로 만났을 때의 그 눈.

요한과 카르밀라가 있는 집을 떠나, 서커스단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웃음이 터졌다. 요한은 끝까지 거짓말을 했다. 카르밀라는 누군가에게 속박될 존재가 아니다. 속박될 수 없다. 그런데 영원을 함께 한다니, 웃기지 않은가. 바보 멍청이.


Comment ' 5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4 00:59
    No. 1

    범인이 누구야... 찝찝해!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6 18:02
    No. 2

    뭔가 호러반전은 예상 못했는데....
    반전 자체는 좋았지만 해피엔딩이면 더 좋았을수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7 16:58
    No. 3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29 18:49
    No. 4

    이만하면 해피엔드인가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익명
    작성일
    10.03.31 01:28
    No. 5

    .......섬뜩한 이야기 입니다. 글의 짜임새도 좋구요. 잘 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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